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토르로키/번역] Arenas Temporis (4/14)

토르로키 / Thorki

"Arenas Temporis(시간의 모래)"

by thorvaenn


원문 : https://archiveofourown.org/works/4275582/


  • 작가님의 허락을 얻어 번역합니다. (https://i.imgur.com/e3N884O.png)
  • 총 14편으로 완결된 작품입니다. 
  • 토르가 자신의 삶을 계속 반복하며 매 삶마다 로키와 함께 하고 사랑하는 루프를 겪습니다.
  • 워닝: 로키 과거 성적 학대 암시




*    *    *


4장. ‘금장(金裝)’



토르는 시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토르는 잠시 동안 그 시선을 무시하며 거실의 테이블 위에 놓인 튜닉들 중 하나에 손을 얹고 부드러운 천을 쓸어 보았다. 어두운 붉은색, 모든 색조의 녹색, 눈에 띄는 보라색, 검은색, 회색의 다양한 옷들이 가지런하게 무더기 지어 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조금 더 숫자는 적었지만 바지 더미도 있었다. 주로 검정색의 은은한 색깔을 한 바지였지만, 다른 색깔의 바지도 있었다. 특히 예쁜 녹색을 띤 가죽 바지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시프는 토르에게서 눈을 돌리고는 말없이 옷 더미로 손을 뻗어 안이 다 비춰 보이도록 얇은 붉은 색 옷가지를 하나 빼내 들었다. 입은 사람의 상체에 딱 달라붙는 슬립온이었다.

“이게 네 몸에 맞을 거라 생각해?”

시프가 건조하게 물었다.

“요툰에서 온 우리 손님이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던 모습은 너도 이미 봤을 텐데.”

토르는 시프의 어조를 그대로 돌려 주며 대답했다. 지금이 아닌 다른 때였다면 그 농담에 웃어 주었을 것이다.

“옷가지들을 가져다 주지 않으면 실례가 될 거야.”

“그래. 네가 의상 준비 업무를 감독하고 있는 게 아주 정상적인 일이란 소리지. 심지어 네가 입을 옷도 아닌데.”

시프가 말을 이었다.

토르는 시프를 잠깐 쳐다보았다. 시프는 믿음직한 친구였다. 언제나 그랬다. 언젠가는 자신도 이런 경솔한 식의 행동은 그만두고 시프에게 그럴듯한 설명을 해 주어야 할 것이다. 시프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금씩 통제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토르는 로키의 부재로 인해 변덕스럽고 비통에 찬 존재가 되었다. 삶의 방향이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음에 따라 불만족스러워졌으며, 하루하루 더더욱 낙담해 갔고, 그 때문에 자신의 평소 버릇과 행동들을 하나씩 포기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로키가 여기 있었고, 토르는 로키가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도록 자신의 힘이 허락하는 한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기나긴 삶의 경험을 되돌이켜 보았을 때, 시프나 자신의 세 명 친구 전사들이 로키를 의심하거나 불신하게 되는 것은 늘 장기적으로 로키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결과를 낳았다. 물론 로키가 그들을 짜증나게 만드는 것을 즐겨 마지않기는 하지만 말이다. 일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았다.

“헬블린디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어.”

토르가 시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헬블린디의 손에 로키가 엄청난 고충을 겪었다는 사실은 확실하지. 이 곳에서는 그 누구도 로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려 주고 싶어. 그렇게 한다면 헬블린디가 혹시 무슨 간계를 꾸미고 있을 경우 로키가 우리에게 도움을 제공할 수도 있겠지.”

시프가 그 말을 오랫동안 곰곰히 생각했다. 그녀는 집어 들었던 튜닉을 다시 앞에 던져 놓았다.

“만일 로키가 그 간계의 일부라면 어떡하려고?”

“만일 그렇다면…” 토르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똑같은 논리가 적용되는 거지 뭐. 로키는 여전히 우리의 환대를 받을 거고, 그러다 보면 우리를 배신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은 사라질지도 몰라.”

“흐음.”

시프가 짧게 답했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토르의 말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토르. 네가 의상 담당이라니?”


*    *    *


로키의 반응도 시프와 별로 다를 것은 없었다. 물론 훨씬 조용했지만 말이다. 시종들이 무리 지어 두 손 가득히 옷가지를 안고 들어오고 토르가 그 뒤를 따르는 것을 본 로키의 얼굴에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시종들은 능숙하게 옷가지를 내려놓은 후, 텅 비어 있던 로키의 방 안 옷장과 서랍들을 차곡차곡 채우기 시작했다.

토르는 소란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로키가 자기 눈 앞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토르는 몰래 지켜보았다. 로키가 조금씩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가 되기 시작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다른 삶에서였다면, 로키가 마음이 상한 이유는 토르의 선택이 마음에 차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거나, 천이 자기 취향이 아니라거나. 그게 아니라면 자기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옷을 골라왔다는 데 화가 났을 수도 있다. 로키의 그런 모습은 깃을 퍼득 곤두세우는 새나 불만스럽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는 고양이를 연상시키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 삶에서는 둘 중 어떤 쪽도 아니라는 것을 토르는 이미 알 수 있었다.

로키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닌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왜 화가 난 것인지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시종이 고개를 꾸벅해 인사한 후 문을 닫고 떠났다. 두 사람만 남자 토르는 로키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고른 것들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토르가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로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아름다워요.”

로키가 희미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잠시 말을 멈췄다가 로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나요?”

토르가 말 없이 입을 잠깐 열었다가, 할 말을 찾으려 애썼다.

“음…딱히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매일매일 입을 옷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렇군요.”

로키가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조용했고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로키의 시선은 토르의 어깨 위쪽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려는 것일 터였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한 확실한 전략일 것이다.

“감사드립니다.”

토르는 그만 떠나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로키가 혼자서 그 선물들을 구경해 보고 정말로 그저 옷 선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도록 해 주는게 나을 것 같았다. 더 이상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였다. 토르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로키의 어깨를 쥐었다. 몸 속에 뿌리 깊게 새겨져 있는 듯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토르는 곧바로 고통어린 신음을 뱉어내며 손을 홱 떼 냈다. 손바닥과 손가락이 지저분한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작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토르는 놀란 표정으로, 그리고 상처 받은 표정으로 (그럴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로키를 바라보았다. 로키가 접촉을 원하지 않을 만한 이유를 다시 기억해 내는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동상. 보통 시원한 정도의 온도인 로키의 피부가 빙점보다 훨씬 차갑게 식어 있었다. 따뜻한 피부를 가진 종족들에게는 위험할 정도의 온도였다.

요툰인의 이런 생리에는 익숙했고, 정확히는 이런 일을 처음 겪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임은 틀림없었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한참 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로키의 눈길이 토르의 눈을 떠나 그의 다친 손으로 향했을 때야 마침내 그 맞닿은 시선이 끊겼다.

“그러려고 의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왕이시여.”

로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차분했다. 조용하고 딱딱한 어조이기는 했지만, 떨림은 없었다.

토르는 손을 몇 번 흔들어 보며 통증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았다. 치료사들에게 일단 들르기는 할 것이지만, 심각하게 생각할 정도는 전혀 아니었다.

“내가 너를 놀라게 했으니, 내 잘못이다.”

토르가 대답했다.

“이제 떠나도록 하마. 새 옷들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토르는 등 뒤로 문을 닫기 전에 잠깐 멈춰 로키가 있는 곳을 돌아 보았다. 로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팔을 배 양쪽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의 취약한 심리를 드러내는 자세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키는 침착해 보였고, 그의 몸은 똑바로 곧추세워져 있었다.

치료사들의 방에 도착할 무렵, 토르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자신 손의 상처는 좋은 징조임이 틀림 없었다.

“거기 있구나, 로키.”

시뻘겋게 물집이 잡혀 있는 손을 내려다보며 토르는 애정을 담아 혼잣말로 속삭였다. 치료사가 방에 들어왔을 때야 토르는 겨우 웃음을 감췄다. 치료사가 자신의 손을 고치는 동안 토르는 거기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생각들과 계획들이 이미 잔뜩 머리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그는 곧 자신의 로키를 되찾을 것이다.


*    *    *


이대로 끝날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었다.

로키는 몇 시간 동안 기다렸다. 뻣뻣하게 의자에 앉은 채, 켜져 있지도 않은 거실 한복판의 벽난로를 빤히 쳐다보면서 기다렸다.

왕을 다치게 해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로키가 저지른 범법 행위가 왕을 다치게 한 것 뿐만은 아니었다. 그 후에 로키는 그저 성의 없는 사과만을 건넸다. 무릎을 꿇지도 않았고, 빌지도 않았다. 그것 말고도 자신의 상처어린 마음이 끔찍한 이미지들을 이리저리 떠올리며 행했을 만한 그 어떤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은 사치스러운 물건들이 또다시 방으로 밀려들어 오는 것을 보며 느꼈던, 가슴이 내려 앉는듯한 공포감 뿐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방, 음식, 심지어 황금 (그것이 자신의 이름 밑에 달린 물건이라는 사실은 어제야 알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름다운 옷으로 가득 찬 옷장까지.

그 화려하고 색 선명한 옷더미들이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이는 것을, 시종들이 떠난 후 토르가 자신을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을 보고 있던 로키의 마음 속에서 뭔가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로키는 화가 나 있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익숙한 감정이 아니었다. 더 이상은 아니었다.

왕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해 주기라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아니, 로키. 너는 내 창부가 되지 않을 거다. 나는 그저 화대만을 준 후에 기다릴 것이니, 네가 제공받은 그 호의를 다시 뺏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마침내 들거든, 그 때 내게 오거라.

로키는 토르가 차라리 자신에게 솔직하게 굴었으면 했다. 왕이 자신을 침대로 데려가기 전에 즐기는 놀이가 이런 것이라면, 마침내 왕의 침대에 들었을 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상상만 해도 몸이 떨려 왔다.

로키.

자신이 그 이름에 너무 빠르게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혼자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중에도 자신 스스로를 그 이름으로 칭하지 않았던가? 그런 깊은 의미를 지닌, 너무나 중요한 선물도 받아 놓고는 (정말로 그것은 선물이었다. 그 전까지 자신에게는 이름이 없었고, 왕의 속셈을 의심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름이 있다는 것은 아주 좋은 기분이었다) 그 뒤에 별 것도 아닌 다른 물건 몇 개를 받았다고 평정을 잃어버릴 이유가 뭐가 있었을까?

별 것도 아닌 물건 몇 개? 자기 운수에 얼마나 빨리 적응해 버렸는지 좀 보게. 상해 가는 고기 한 조각을 얻겠다고 빌고는 하지 않았었나? 태풍이 네 비참한 삶을 끝내 버리려고 위협할 때 피신처를 제공해 달라고 바닥에 엎드리지 않았었나?

로키는 그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머리속에서 빠져나가기를 바라며, 소용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이 언제나 이렇게…자신의 마음 속에 갇혀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 이렇게 스스로의 날뛰고 질주하는 생각에 붙들린 죄수였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여자 거인은 로키가 영리한 아이라는 소리를 자주 하곤 했다. 보통은 그를 꾸짖기 위한 말이었지만, 어찌 됐든 로키는 그 말에 웃고는 했다.

그때 시절을 떠올리자니, 지금 이전의 시간들을 떠올리자니, 몸이 퍼득 뛰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근육이 움찔거렸다. 몇 시간 동안이나 잔뜩 긴장한 채 움직이지도 않고 앉아 있기만 했던 것이다.

그래,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났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로키는 자기를 향해 못마땅하게 고개를 흔들고는 하던 여자 거인을 떠올리며, 그 기억에 매달렸다. 그녀의 창백한 입술이 미묘한 즐거움을 띠며 씰룩거리던 기억. 로키는 마음 속 그 이미지를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인도자로 삼았다. 자신에게 벌이 내려지게 된다면, 자신은 그 벌을 받을 것이다. 이 예쁘게 금장을 한 감옥 안에서 그것을 기다리고만 있을 필요는 없었다.

왕은 로키가 마음껏 정원을 산책해도 된다고 말했다. 로키는 토르 오딘슨이 정말로 자신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로키는 침을 꿀꺽 삼키며 옷장 중 하나를 열어 손에 잡히는 대로 바지와 튜닉을 하나씩 꺼냈다. 옷의 소재는 로키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었고, 그 색깔 또한 여전히 그를 놀라게 했다. 자신이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훨씬 더 간소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여기에 있는 옷 정도는 감당할 수 있었다.

문 손잡이에 손을 얹을 무렵 그는 거의 자신감을 잃을 뻔 했다.

“나가.”

로키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네 불쌍한 삶에서 최악의 하루라고 생각하며 한탄했던 날이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이 그 날들보다 더할 리가 있겠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어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도움이 되었다. 자신의 입에서 강인한 말이, 용기 있는 말이 튀어 나오는 것이 듣기 좋았다.

로키는 문을 열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다음, 밖으로 걸어 나갔다.


*    *    *




nal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10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15
[토르로키/번역] Arenas Temporis (3/14)
#17
[토르로키/번역] Arenas Temporis (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