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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로키/번역] Arenas Temporis (8/14)

토르로키 / Thorki

"Arenas Temporis(시간의 모래)"

by thorvaenn


원문 : https://archiveofourown.org/works/4275582/


  • 작가님의 허락을 얻어 번역합니다. (https://i.imgur.com/e3N884O.png)
  • 총 14편으로 완결된 작품입니다. 
  • 토르가 자신의 삶을 계속 반복하며 매 삶마다 로키와 함께 하고 사랑하는 루프를 겪습니다.
  • 워닝: 로키 과거 성적 학대 암시



*    *    *


8장 ‘기억’



토르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은 채 로키가 불안하게 담요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로키는 토르와 약간 거리를 유지한 채 침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로키의 얼굴은 창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것을 쳐다보고 있는듯 했다. 밝은 회색의 빛이 방 안으로 스며 들어오고 있었다. 밤이 지난 후에도 토르가 구름을 거둬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네게 사과해야 할 것 같구나.”

토르가 입을 열었다. 로키는 토르의 목소리에 몸을 움찔했다.

“사실 사과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네가 내 곁에서 지내는 데 그렇게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줄은 몰랐단다.”

로키가 몸을 돌려 그를 마주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토르는 부드럽게 손을 올려 로키의 말을 막았다.

“아니야, 괜찮다. 네가 많은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날 믿을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도. 그리고…아무 것도 안 하면서 그저 네 문제들이 사라져 버리기만을 바랐던 것은 내 잘못이야.”

“그렇게 생각하신 것도 무리는 아니었죠.”

로키가 조용히 말했다.

“제가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것은 맞아요. 하지만…그 동안 내내 두려워 하기만 했던 것도 아니에요. 그냥 가끔씩…한 차례씩 불안감이 제 마음을 압도해 버려요. 그리고 그 감정이 분노로 바뀌어 버리기도 하고요. 그 점에 대해서는 죄송해요.”

“네 잘못이 아니다.”

토르가 힘주어 말했다. 다시 한번 몸을 기울여 로키를 자기 몸 쪽으로 당겨오고 싶었다. 하지만 낮 시간의 밝은 빛이 비쳐 들어오고 있는 지금 그런 결정은 환영 받지 못할 것이다. 밤의 절반을 서로를 껴안은 채 지새웠던 기억은 소중히 간직할 생각이었지만, 그 이상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로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로키의 시선이 잠시 떠나갔다. 침착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저를 왜 계속 옆에 두려고 하시는지는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아요.”

진실을 말해주고 싶은 충동이 잠깐 토르를 유혹해 왔다. 하지만 그 충동은 빠르게 짓눌려지고 말았다.

“그냥 단순히 내 어리석음이라고 대답한다면 믿어 주겠니? 나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어리석음이라고 대답한다면? 나는 이 왕국에 내 삶을 바쳐 왔지. 이 곳에는 내가 신뢰하는 사람들도, 상호적인 애정을 나누는 사람들도 있지만…내 삶에는 진실된 동반자가 있었던 적이 없었어. 그리고 나는…요툰헤임의 왕이 내게 너를 데려온 방식에 대해 매우 분노했고 기분이 언짢았단다.”

로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토르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건 내 감정을 상하게 하기 위한 모욕의 행사일 뿐이었어. 그리고 너는 그 계략의 장기말으로 이용되었을 뿐이고…하지만 나는 네가 그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니?”

“저는 제가 어떤 존재인지 몰라요.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해 준 것을 제외하고는, 저는 제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라요.”


*    *    *


로키는 그 말을 너무 깊이 숙고하지 않으며 말했다. 머리 속이 쿵쿵 울리고 있었고,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한데 온통 뭉쳐져 있었다.

간밤에 깨어나 자신이 왕의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과 옆에서 토르가 자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로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열오른 혼란스러운 머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결과는 한 가지 뿐이었다. 당연히 토르는 자신을 그런 식으로 원했던 것이다. 로키의 생각을 가지고 장난을 쳐 대던 왕의 게임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

그래서 로키는 몸을 떨었고 빌었고 오랫동안 묻어 놓았던 고통과 수치의 기억에 압도당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토르는 아니라고,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고집했다. 로키는 자기가 어쩌다가 토르의 팔 안에 안기게 되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더 혼란스러운 점이 있었다.

왕은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안겨 있는다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울 정도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아침의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는 지금도, 그들은 전날 밤과 마찬가지로 그저 침대 위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몸이 닿지 않은 채, 그냥 이야기만을 나누면서. 이번에도 로키는 감정을 쏟아낸 것에 대해 처벌 받지도, 자신이 원하지 않은 무언가를 하도록 강요 받지도 않았다.

로키는 신선하고 축축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로키는 마침내 믿을 수 있었다. 오래 전 희망이라는 것을 포기했던 자신 마음 속 일부가, 다시 깨어나 자리를 찾아 돌아오고 있었다. 그 어떤 격렬한 운동과 그 이후의 단잠조차 몰아내지 못했던 몇 년 전의 고통의 기억들이 자신을 떠나가고 있었다. 아니,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 때 이후 처음으로, 로키는 그 일들을 과거의 그것으로서 바라볼 수 있었다. 지금 현재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미래가 아니라, 왕의 손에 의해 자신에게 행해질 무엇인가가 아니라.

로키는 토르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가 앉아 있는 모습, 잠자는 동안 지저분하게 헝클어진 머리카락, 무릎 위에 놓인 팔. 토르는 침착하게 로키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그의 모습 또한 로키에게는 새롭게 다가왔다.

토르는 수려했고 마음이 확고한 사람이었으며 로키를 자신 곁에 두기를 원하고 있었고 로키는 처음으로 그것이 함정이 아니라 기회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로키는 그 생각에 매달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다시 확신을 얻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찾았고, 로키는 발을 당겨 무릎으로 일어선 후 토르가 앉아 있는 쪽으로 몸을 옮겨 갔다. 로키는 한 손으로 토르의 팔을 붙잡고 다른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토르는 여전히 로키를 쳐다보고 있었고, 몸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토르의 눈이 살짝 내려감긴 채 그 푸른 빛깔로부터 따뜻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토르는 그저 로키가 하는 대로 가만히 두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로키를 밀어내지 않았고 (그의 행동이 무례하다고 여겨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키를 자기 쪽으로 더 가까이 당겨 오지도 않았다 (그의 행동이 유혹이라 여겨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넌 네 스스로의 주체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단다.”

토르가 입을 열었다. 로키는 그가 입술을 움직여 말을 하는 동안 손가락 밑에서 그의 피부가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려움이 아닌 어떤 새로운 감정이 느껴지는 데 너무 마음이 쓰인 나머지 로키가 토르의 말을 이해하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어떻게요?”

“방법은 여러 가지지. 그냥 여러모로 시도해 보렴. 수석 치료사인 에이르가 네가 세이드를 훈련한다면 아스가르드의 온도에 좀 더 잘 적응할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를 하더구나. 그러니, 네게 열려 있는 수백 가지의 가능성 중, 세이드를 배우는 것도 그 하나가 될 수 있겠지.”

로키는 손을 뗀 후 뒤로 물러 앉았다. 그렇게 멀리 물러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로키는 얼굴을 찌푸린 채 그 말을 숙고했다.

“그래서 폐하께서는…제가 원하는 것 무엇을 하든 그냥 두실 건가요? 제가 세이드를 어떻게 배울 수 있죠?”

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널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들은 많단다. 그리고 책들도 있지.”

“그 사람들이 그냥 선의로 절 가르쳐 주시지는 않을 거잖아요. 그들에게 봉급을 지급하실 건가요? 아니면 명령을 내리실 건가요? 그러실 이유가 있나요?”

로키가 도전하듯 말했다. 왕의 논리를 알고 싶었다. 토르가 입술 한쪽을 끌어올려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직접 그들에게 보수를 주면 되지. 로키 네게는 왕실에서 일한 댓가로 받은 황금이 있잖니. 기억 안 나니?”

아. 로키는 그것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로키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토르의 웃음도 더 크게 번졌고, 로키는 그 표정에 담긴 명백한 애정을 망설이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노부인 한 명에게 황금을 죄다 주고 실 짜는 법이나 알려 달라고 할 까봐요.”

로키가 농담을 했다가, 토르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토르의 시선이 아래로 내리 깔렸다. 그의 손이 꽉 주먹 쥐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로키는 침착하게 앉아 있도록 노력했다.

“농담이었어요.”

“알고 있다. 미안하구나.”

토르가 다시 눈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입가에 슬픈 미소가 떠 있었다.

“나는 그저…내 어머니이신 프리가 왕비께서 천을 짜는 데 아주 솜씨가 있으신 분이셨거든. 안 그래도 어젯밤에 네가 그 분을 만나뵐 기회가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안타까워 했던 터라.”

토르가 화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로키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왕비님께서 설마 자신 같은 사람을 신경쓸 리가…?

“같이 가자꾸나.”

토르가 일어서며 말했다. 아까의 슬픔 대신 들뜬 감정이 그의 목소리에 언뜻 드러났다.

“보여 주고 싶은 게 있구나.”

로키는 허둥지둥 침대에서 기어 나오며 자신이 바지 하나만 입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아챘다. 아스가르드의 관습에 이제 꽤 익숙해져 있던 차라 이런 모습으로 밖에 나가기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편안한 옷차림을 한 채 서 있던 토르가 로키가 맨가슴 주위로 팔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눈치채고는 말했다.

“잠깐 기다려 보렴.”

토르는 드레싱룸으로 들어갔다가 나와 로키에게 부드러운 빨간색 튜닉을 건네 주었다. 로키는 살짝 안도하며 그것을 몸에 꿰어 입었다. 옷이 그의 몸 위로 헐렁하게 늘어뜨려지는 것은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았다. 토르가 이제 막 옷장에서 꺼내 깨끗하게 세탁되어 접혀져 있던 옷이었겠지만, 거기에서는 희미하게 토르의 피부에서 맡을 수 있는 냄새가 났다. 전혀 불쾌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방을 나서고 나서야 토르가 둘의 옷차림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던 이유가 명확해졌다. 왕의 침소를 나선 후 평소처럼 복도의 왼쪽으로 향하는 대신, 토르는 오른쪽으로 걸음을 향했다. 로키는 자신이 그 쪽 방향으로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꽤 오랫동안 걸은 후 두 사람은 층계 두 개를 올라갔다. 그 위에는 조금 더 작은 복도가 있었다. 복도 양쪽으로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거센 바람이 안으로 불어 들었다. 로키는 이 곳이 얼마나 높은 층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탑 정도의 높이임이 틀림 없었다. 복도에는 문이 하나 밖에 없었다.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문 양쪽으로 식물들이 벽을 따라 오르내리며 자라 출입구를 뒤덮고 있었다.

토르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뒤를 로키는 조용히 따랐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로키는 이 방이 자아내는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호화로운 외관은 아스가르드에서 볼 수 있는 다른 방들과 비슷했지만, 방의 분위기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더 부드러웠고, 더 따스했다. 높이가 낮은 벨벳 의자들이 짙은 푸른색의 천으로 덮여 있었다. 오랫동안 비워져 있었고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이 분명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조그만 테이블 위에는 화분에 담긴 싱싱한 꽃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여기저기 놓여진 자수용 실과 온갖 색깔을 한 천 더미와 베틀이었다.

왕비의 방. 로키는 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기분에 갑자기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이 방에서 느껴지는 친밀감 때문일지도, 혹은 로키가 몸을 돌려 바라본 토르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조용한 비탄 때문일지도 몰랐다. 방을 둘러보고 있는 토르에게서 너무나 큰 슬픔이 와 닿아, 로키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토르의 손목을 붙잡았다. 토르가 작게 웃음을 지으며 그를 쳐다 보았다.

“저것 말고도 더 있다. 어머니께서 만들어 내신 아름다움을 더 보여주고 싶구나.”

두 사람은 다른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로키의 숨이 갑자기 탁 멈추었다. 이 방에는 벽에 창문이 하나도 없었고 천장에만 창이 몇 개 나 있었다. 옛날에 여자 거인과 함께 살던 동굴을 떠올리게 하는 방이었다. 물론 그것 외에는 닮은 점이 없기는 했지만. 머리 위로 뚫려져 있는 그 구멍에서 빛이 보일듯 말듯 새어 들어왔다.

벽은 호사스러운 무늬의 태피스트리들로 완전히 덮여 있었다. 붉은색과 녹색, 파란색과 은색, 감청색과 금색이 특별히 눈에 많이 띄는 색깔들이었다.

“와.”

로키가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그의 눈이 바쁘게 끝없이 이어지는 무늬들을 쫓았다.

그 무늬들은 이야기 같이 느껴졌다. 천 속으로 짜여져 들어간 기나긴 역사. 처음 아스가르드에 왔을 때 로키는 아스가르드의 책을 읽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눈 속이나 얼음 위에 새겨진 룬 문자들에만 익숙했던 까닭이었다. 물론 읽는 것을 빠르게 배우기는 했지만, 노력이 꽤 필요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것들은…마치 귀에 흘러 들어오는 노래처럼 눈 앞에서 흘러 지나갔다.

“원하면 언제든지 여기 와도 된단다.”

토르의 목소리가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들려왔다. 로키는 화들짝 몸을 떨며 다시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폐하 어머님의 방이잖아요. 왕비님의 방이고. 사적인 공간이지 않나요?”

“그렇지. 하지만…”

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만난 이후 처음으로, 로키는 토르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식했다. 로키가 살아온 것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

“네가 언제든 드나들 수 있는 허락을 주도록 하마. 그리고 무엇보다…어머니께서 널 축복해 주셨을 것이란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단다, 로키.”

토르의 목소리가 너무나 엄숙해서 로키는 차마 더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실은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로키는 토르가 방 안을 둘러보며 태피스트리를 하나하나 눈으로 읽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나중에 자신이 이 방에 혼자 와서 태피스트리들에 푹 빠져 지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토르가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토르가 태피스트리를 살펴보는 것을 끝낸 후 그 똑같은 무거운 시선으로 로키를 응시했다.

“네가 알았으면 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요툰헤임에 관한 일이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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