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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로키/번역]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 (1/16)

토르로키 / Thorki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왕세자와 야수)"

by triedunture


원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5267873


  • 작가님께서 번역은 출처를 포함하여 자유롭게 하라고 명시하셨습니다. (https://i.imgur.com/r6PfDqx.jpg)
  • 에시르 토르x요툰 로키 정략결혼 AU입니다. 정략결혼이라고는 하지만 로키 입장에서는 거의 포로로 잡혀온 신세이기 때문에 초반의 로키 취급이 좀 좋지 않습니다...구전동화 느낌이 살짝 끼얹어진 작품으로 이야기 중간중간에 화자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 로키를 비롯한 모든 요툰 종족은 인터섹스(자웅동체)라는 설정입니다. 엠프렉 언급이 있습니다.
  • 요툰헤임에는 성별의 구분이 없고 누구나 아이를 밸 수 있기 때문에, 어머니/아버지라는 단어 대신 (주로 동물 번식에서) 누가 씨를 뿌렸고 누가 새끼를 배었는지 칭하는 단어인 dam/sire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 단어들은 원문에서 사용한 의미와 가장 비슷한 단어인 '종빈/종모'로 번역합니다.



*    *    *



1장.


이것은 결혼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동화들은 결혼으로 끝을 맺지 않는가? 결혼은 보통 행복한 일로 여겨지니, 동화의 행복한 결말을 위해서는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이 결혼은 그렇지 않다. 이 이야기는 아니다. 달콤하고 온화한 이야기를 찾고 있는 사람이라면, 부디 눈을 돌리기를. 이 동화에서는 그런 것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고통과 역경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부디 스스로에게 친절을 베풀기를. 다른 즐거운 여가 거리를 찾아 나서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그렇지.

결혼 이야기. 아스가르드 왕의 두 번째 자식인 토르 오딘슨 왕자와, 요툰헤임의 왕세자인 ‘조그만 자’ 로키 사이의 결혼이다.

이 둘의 결합에 얽힌 기묘하고도 슬픈 이야기를 들려 줄 테니, 부디 잘 따라 오기를.

그 날, 로키는 아스가르드의 대회당 바로 바깥에 서 있었다. 웅장한 대회당의 거대한 문을 장식하고 있는 황금이 노란색 태양의 강렬한 빛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좁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에도 불구하고 로키는 몸을 떨었다. 로키는 가죽 요의와 어깨에 걸친 모피 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대회당 앞 통로로 새어 들어오는 외풍 때문에 뼈까지 시려 오는 느낌이었다. 로키의 칠흙처럼 까만 머리카락은 평소처럼 뒤로 단정하게 빗어 넘긴 대신 얼굴 앞쪽으로 드리워 내려 있었다. 로키의 손목과 발목에 둘러진 황금 고리가 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목에도 역시 정교하게 세공된 황금 장식이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 장신구들은 로키가 자기 손으로 착용한 것이 아니다. 로키가 요툰헤임에서 붙잡히자마자 에시르 병사들이 그에게 채워 놓은 것이다. 로키가 금방 알아챈 바에 따르면, 그 황금 장신구들은 단순한 장식용 물건이 아니었다. 그 장신구들은 로키에게서 마법 능력을 앗아 갔으며, 머지 않아 그를 아스가르드의 왕자에게 강제로 혼인 시키려고 들 사람들에게 로키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것은, 이 결혼이 사랑의 산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건대, 비통과 참상이 당신을 언짢게 만든다면 부디 이 이야기는 피해 가도록.

여전히 따라 오고 있는가?

그렇다면,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가도록 하겠다.

두 왕자의 혼인은 올파더와 라우페이 사이에서 중개되었다. 라우페이는 아스가르드인에게는 ‘서리거인’이라고도 불리는 요툰인들을 이끄는 지도자이다. (‘조그만 자’ 로키라는 별명은 요툰인들에 비해서 조그맣다는 의미이다. 보통 요툰인들은 3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키였고 로키는 180센티미터가 조금 넘는 정도였으니, 그 별명은 로키가 결코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두 왕은 오랫동안 서로와 전쟁 중인 상태였다. 하지만 각 왕국의 군대 절반 가까이가 몰살되었던 유혈 낭자한 전쟁이 있은 후로, 두 왕은 이 분쟁을 이만 끝내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했다. 따분하고 오래 끈 협상 끝에, 두 왕에게는 각각 실망스럽기 그지 없는 왕자 두 명을 서로와 혼인시키는 것으로 결론이 맺어졌다. 그 혼인은 두 세상 사이에 잠정적인 평화를 이끌어 올 것이다.

그 문제에 관해 그 누구도 로키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았다. 사실 그 협상의 내용은 로키가 적군을 마주하고 포로로 붙잡혔던 바로 그 절체절명의 순간까지 로키에게서 철저히 숨겨져 왔다. 도움을 청하며 성 안 휑한 홀에 울려 퍼지는 자신의 비명 소리가 아직도 로키의 귀 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맏아들이 끌려 나가는 모습을 얼음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지켜 보던 라우페이의 얼굴도 여전히 눈 앞에 맴도는 것만 같았다.

“질질 짜기는.”

로키의 비명 소리 너머로 종모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너도 좀 쓸모를 발휘하겠구나. 날뛰는 것은 그만 두고, 요툰헤임에 공헌하는 일을 하는 데 기쁜 마음을 가지거라, 로키.”

자신이 버림받았으며 이제 혼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로키는 맞서 싸웠다. 아스가르드의 전사가 그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 뭉툭한 창 끝으로 내려치는 바람에 입에서는 피가 철철 흘렀다. 그 소란 덕분에 머리카락은 마구 헝클어졌고, 황금 고리 밑에서 마법 능력은 억눌러졌으며, 몸에서는 옷이 뜯겨져 나갔다. 자신의 왕자로서의 삶이, 마치 실크와 모피가 앗아가진 것처럼 자신에게서 얼마나 빨리 박탈되어 버렸는지 소화하기가 힘들었다. 로키의 머리속이 핑글핑글 돌았다. 그러고 나더니 여러 가지 색깔을 띤 불빛이 로키와 로키의 납치범들을 감싸 왔다. 다음 순간 로키는 바이프로스트에 의해 운반되어, 책 속에서나 읽어 보았던 땅에 도달했다. 유혈에 굶주려 살며 죽어가는 포악한 존재들이 거주하는 땅, 아스가르드.

이제 자신의 의지에 반해 누군가의 배우자가 될 운명을 기다리고 있는 로키는, 대회당의 황금 대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서 흘러 내리던 피는 닦여 나갔으나, 푸른색 피부 위에는 이제 보라색 멍이 지저분하게 물들어 있었다. 로키가 자신의 이목구비에서 가장 괜찮은 부분이라고 생각하고는 했던 예쁜 진홍색 눈은 눈물로 인해 분홍색으로 옅어져 있었다. 과묵한 시종들이 자신에게 강제로 입혀 놓은 옷쪼가리들은, 로키의 마른 허리와 떨리는 어깨에서부터 언제고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로키의 모습은 끔찍해 보였다. 그의 마음 속 또한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고통 밑에서는 끔찍한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땅 한 구석을 팔아 넘기듯 자신을 팔아 넘긴 종모에 대한 분노, 자신의 생득권이었던 왕좌를 박탈해간 모국에 대한 분노, 그 못 배운 잔인한 야만인들의 나라 아스가르드에 대한 분노, 그들의 왕이자 로키의 일생의 적인 오딘에 대한 분노,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남편이 될 그 짐승 오딘슨에 대한 분노.

혼자만의 생각 속에서, 로키는 그 모든 이들 하나하나에 복수를 맹세했다. 평생 동안 허약한 약골 취급을 받으며 살았지만, 이제 자신의 집에서 쫓겨나 적들 사이에 홀로 남겨진 이상, 로키는 자신이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증명해 보일 것이다.

이 망할 놈의 수갑과 목줄에서 자유로워질 수만 있다면 말이다.

로키는 손목을 감싸고 있는 얇은 팔찌를 당겨 보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올가미에서 벗어 나려 했던 몇 십 번의 시도가 그러했듯, 아무 소용조차 없었다. 대문 앞에 서 있던 근위병 한 명이 로키의 그 고투를 보고 잔인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로키의 필사적인 시도를 막기 위한 그 어떤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되었군.”

다른 근위병이 눈을 가늘게 뜨고 태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근위병의 창이 로키 쪽을 향했다. 로키를 언제든 찌를 수 있다는 게으른 암시였다.

로키는 마음 속의 복수 명단에 그 근위병 또한 추가했다.

태양빛을 받아 광이 나는 대문을 보이지 않는 손이 활짝 열었다. 그리고 로키는 회당 안에 들어차 있는 몇 천 명의 아스가르드인들을 마주했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로키를 기묘하게 허여멀건한 눈으로 응시하며, 입을 가린 손 뒤에서 키득거리고 속닥거렸다. 그 자들의 손에는 반지와 귀한 보석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저 멀리 있는 제단 위에는 피 범벅이 된 천이 덮여 있었고, 그 위에는 로키가 알아볼 수 없는 무슨 뿔 달린 짐승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죽은 짐승의 입으로부터 혀가 비집어져 나와 있었고, 짐승의 두 눈은 뿌연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로키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어쩌면 이 결혼이라는 것도 그저 계략이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로키 또한 저 임종 직전의 짐승 곁에서 전쟁의 신에게 제물로 바쳐질지도 몰랐다.

창 끝이 로키의 등 뒤를 찔러 왔다.

“움직여.”

근위병이 투덜거렸다.

로키는 걸음을 옮겼다.

로키는 죽은 짐승 쪽을 향해 대회당의 판석 위를 차디찬 벗은 발로 걸었다. 군중들이 그가 걸어가는 길 양 옆을 지키고 선 채, 도망칠 일말의 가능성조차 허락하고 있지 않았다. 로키는 코를 찔러 오는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자신이 걸음을 옮기는 동안 에시르족들이 속삭이는 것 또한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닥쳐온 일에도 불구하고, 로키는 여전히 요툰헤임의 왕자였다. 로키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든 채 걸었다. 이 야만인들이 자신을 죽이려 든다면, 그러라고 하라. 로키는 결코 그런 행사에 주눅들지 않을 것이다.

제단에 가까이 도달할 무렵, 로키는 군중에서 떨어져 서 있는 에시르 한 명을 발견했다. 그 남자는 키가 컸다. 물론, 아스가르드의 기준에서 말이다. 로키보다 몇 센티미터 정도 큰 것 같았다. 남자의 보기 싫은 황금색 머리카락은 에시르 족의 풍습에 맞추어 갈래갈래로 땋여 있었다. 그는 이 곳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갑주를 걸치고 있었고, 어깨에는 붉은색 망토가 걸쳐져 있었다. 가슴과 상체에는 은으로 세공된 원형 장식과 성패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전쟁터에서 앗아간 목숨이 몇이나 되는지 새겨 놓은 장식일지도 몰랐다. 남자의 턱과 뺨은 거친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로키로서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풍습이었다.

그래서, 이 자가 바로 아스가르드의 야수, 자신의 남편이 될 전사이자 왕자, 오딘슨이었다.

로키는 몸서리가 치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이 시련 앞에서 그 어떤 두려움조차 드러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왕족으로서의 몸가짐은 이런 압박 아래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로키는 자신이 섬기는 신들을 두고 맹세했다. 로키는 오딘슨의 옆에 자리를 잡고 선 채 턱을 치켜들었다. 그 왕자의 시선이 자신의 몸 위에 무겁게 내려앉는 동안에도 로키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세상에, 로키는 정말이지 몸을 가리고 싶었다. 이 야만인들 앞에 반쯤 벗은 몸으로 서 있는 데 대한 수치심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키는 그것을 감당하고 있어야 했다.

섬뜩한 제물이 놓여 있는 제단 뒤로부터, 올파더가 두 손을 뻗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올파더는 번쩍거리는 몇 백 개의 보석이 잔뜩 박힌 정교한 황금 왕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눈 한 쪽을 가리고 있는 안대 또한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 뻔뻔한 부의 과시에 로키는 불쾌감이 밀려오는 것을 삼켜 눌렀다. 라우페이에게도 많은 결함이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종모는 저런 천박한 싸구려 보석들로 몸을 감싸고 다니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 날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해 왔다.”

올파더가 입을 열었다.

로키는 이를 갈았다. 자신은 결코 이 날을 위해 기도한 적이 없었다.

왕이 말을 이었다.

“요툰헤임과의 전쟁이 끝을 맺기를, 오랫동안 기도했지. 이제 더 이상은 그 머나먼 얼음의 땅 위에서 우리 자식들의 죽음을 목격하지 않을 것이다. 그 죽음이 아무리 영광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아스가르드의 왕자, 천둥의 신 토르 오딘슨이—”

그 말과 함께 왕의 미묘한 시선이 자신의 아들 쪽을 향했다. 로키는 그 모습을 흥미롭다고 생각하며 마음에 담았지만, 그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요툰헤임의 왕세자이자, 라우페이의 맏아들, ‘조그만 자’ 로키를, 자신의 반려로 맞아들일 것이다. 우리 두 왕국이 평화 조약으로 결합하였듯이, 이 혼인 의식이 두 사람을 한 데 결합시켜 주기를.”

오딘이 망토 뒤에서 두꺼운 은색의 끈을 꺼내더니, 시체가 놓인 제단 옆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로키는 이를 갈며 조용히 왕이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에시르 족이 이런 전통을 수행한다는 사실은 이미 들은 바 있었고, 그 의식이 상징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남편에게 결합된다는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결합이 얼마나 일시적인 것이든 상관 없었다.

“네 약혼자의 손을 잡거라.”

오딘이 아들에게 명령했다. 두 사람만 들을 수 있을 작은 목소리였으나, 못 들은 척 할 수는 없을 만큼 단호한 목소리였다.

토르 오딘슨의 거칠고 각진 짐승 같은 손이 자신의 손을 붙잡는 것을 느끼면서도, 로키는 앞쪽만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로키는 그 끔찍한 손아귀 속에서 자신의 손가락에 완전히 힘을 뺐다. 조그만 손의 떨림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오딘이 두 사람의 손과 손목을 끈으로 감싸, 그 위로 단단히 매듭을 지었다.

“이제 끝났다.”

왕이 선언했다. 자신이 포획된 것에 아스가르드인들이 함성을 내지르는 것을 들으며, 로키는 심장이 부스러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울지 마, 로키는 스스로에게 일렀다. 네가 자기네들보다 못한 존재라고만 생각할 걸. 때를 기다려. 가장 뜻밖의 순간에 저 자들의 갈비뼈 사이로 칼날을 밀어 넣는 거야.

에시르 왕자가 몸을 돌려 군중 쪽을 향했다. 손이 여전히 잡혀 있는 바람에 로키의 몸 또한 반원을 그리며 끌려갔다. 로키의 몸이 휘청했지만, 오딘슨은 잡은 손을 지탱해 그를 똑바로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그 때야 처음으로 두 사람의 눈이 마주했다. 본능적인 시선의 움직임이었는지라 피할 수 없었다. 그 야만인의 눈동자에는 푸른 색깔이 박혀 있었다. 거짓 봄날에 서리는 얼음을 떠오르게 만드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색깔이었다.

“똑바로 서 있어, 요툰인.”

오딘슨이 숨죽여 말했다.

“빨리 해치워 버리자고.”

“날 왕세자로 칭하지 않는 이상 네게 대답할 일 없어.”

로키가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키는 혀를 꽉 깨물었다. 뺨에 열기가 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애초에 자신의 손을 잡아 끈 것에 대해 이 오딘슨이라는 작자에게 욕을 퍼붓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로키는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 사이에 홀로 둘러싸여 있었다. 조그만 도발이라도 했다가는 그들 중 누구라도 자신의 목을 뜯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야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자는 그저 투덜거리는 소리를 내며 행복을 빌어 주는 관중들 사이로 로키를 끌고 갈 뿐이었다. 시종들이 음식 그릇과 음료를 잔뜩 짊어진 채 쏟아져 들어왔다. 그래서, 이 연회에는 테이블은 없나 보군. 로키는 에시르 귀족이라는 작자들이 양고기 다리와 돼지 갈비를 맨손으로 집어 든 채 먹는 모습을 역겹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 인간들은 살코기를 이빨로 뜯어 먹은 후 뼈는 아무 데나 집어 던지고 있었다. 로키의 새로이 남편이 된 자는 음식은 모두 거절하는 대신, 시종이 들고 지나가는 쟁반에서 술잔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 야수는 구역질이 날 것 같이 달콤한 향을 내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더니, 바닥 판석 위에 술잔을 집어 던졌다. 술잔은 몇 백 개의 파편으로 부서져 버렸다.

로키는 그 유리 조각 위로 맨발을 디디려는 것을 간신히 피했다. 움직이던 방향에서 급하게 몸을 트는 바람에, 오딘슨도 잠깐 몸의 균형을 잃었다. 그 야만인이 다시 걸음을 지탱하며 로키를 자신 곁으로 홱 끌어당겼다.

“옆에 꼭 붙어 있는 게 좋을 걸, 왕세자.”

그 자가 로키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오딘슨의 숨결에서 풍겨 나오는 술냄새에 로키는 코를 찡그렸다. 끈으로 묶인 두 손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안 되는 이유를, 로키는 짐작할 수 없었다. 로키가 이 깡패에게 그 말을 꺼내려던 순간, 키가 커다랗고 어두운 사람의 형체가 두 사람의 길을 막았다.

요툰헤임의 전장으로부터 전해져 와 들었던 이야기로부터, 로키는 그 사람이 누군지를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여자는 헬라라고 불리는, 오딘의 맏이, 죽음의 여신이었다. 두 왕국의 군대 절반을 파괴시켜 놓았던 그 유혈 낭자한 전쟁을 이끌었던 것도, 바로 헬라였다. 그녀의 번쩍이는 두 눈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그 때 일로 인해 잠을 못 이룬 적은 없는 모양이었다.

소문에 따르자면, 헬라는 자신의 포위 작전에 감히 의문을 제기한 자신의 부대 일부마저 살해했다고 했다. 헬라의 병사들조차 그녀를 미쳤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지닌 힘이 너무나 엄청났기에 그 미친 짓에 감히 반대할 위인은 없다고 했다. 로키는 헬라를 바라보며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헬라는 녹색과 검은색을 띤 가벼운 갑옷을 입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얼굴 앞으로 가닥가닥 축 늘어져 있었고, 헬라의 입가에는 잔혹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로키는 그런 표정을 너무도 잘 알았다. 광기에 사로잡힌 짐승이 공격하기 직전 짓는 표정이었다.

“우리 왕국으로선 행복한 날이 아닐 수 없구나, 동생아.”

헬라가 말했다.

“그래서, 마침내 너도 결혼을 했군. 모든 일이 다 잘 해결되었고.”

“신의 축복에 의한 것이지.”

로키의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남편이 이렇게 대답했다. 털이 수북한 그의 얼굴 위로 멍청한 웃음이 떠올랐다. 오딘슨은 지나가는 시종으로부터 술잔 하나를 더 집어 들더니, 네 모금 만에 술을 모조리 삼켜 버렸다.

로키는 몸을 피할 준비를 했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 야만인이 빈 잔을 바닥에 집어 던지는 대신, 옆에 지나치는 쟁반 위에 올려 놓았다. 이걸 호의라고 생각해야 하나. 로키가 얼굴을 찌푸린 채 생각했다.

헬라가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여기 계셔서 네 모습을 보지 못한 게 딱한 일이구나. 당신 유일한 아들의 혼인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면 무척이나 좋아하셨을 텐데.”

헬라의 시선이 마침내 로키를 향했다. 로키는 그 시선이 자신을 향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헬라의 시선이 자신의 피부를 찢어 발기는 것 같았다. 그녀의 저녁 식사 접시에 대령된 고기 한 점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헬라가 혀를 끌끌 찼다.

“어쩌면 네가 이런 것에 결혼한 꼴을, 어머니께서 보지 못한 쪽이 더 나았을 수도 있겠군.”

어떻게 감히 이 더러운 에시르가 자신을 쓰레기통 취급하듯 말하는 거지? 이 황금 수갑으로부터 자유롭기만 했더라도! 로키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슴 속의 모든 증오를 끌어 모아 헬라를 노려보는 것 밖에 없었다. 자신의 눈빛만으로 이 여자를 죽일 수 있었으면 좋을 것이라고, 로키는 생각했다. 헬라는 로키의 그 모습이 재밌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헬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헬라의 남동생 또한 그 웃음에 합류했다. 오딘슨의 웃음이 회당 안에서 울려 퍼졌다. 그러더니 오딘슨은 몸을 돌려 로키를 자신 몸의 그림자 안쪽으로 가려 왔다. 덕분에 헬라의 모습이 시선에서 사라졌다.

“헬라, 내 누이여. 괜찮다면 이만 떠나 보아도 될까?”

“물론이고 말고.”

오딘이 갑자기 군중들 사이에서 나타나더니 불쑥 이렇게 대답했다. 오딘의 곁에는 마치 그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올려다 보고 있는 아첨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내게 하루 빨리 손자를 안겨 주고 싶어서 마음이 급한 게로구나. 라우페이가 그 일이 가능하리라는 사실을 내게 단언해 주었다. 손자를 볼 계획을 게을리 할 필요는 없겠지.”

올파더를 따르던 무리들이 천장을 향해 잔을 치켜들며 환성을 질렀다. 로키는 공포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로키는 고개를 홱 돌려 오딘슨의 멍청하게 웃음 짓고 있는 얼굴을 응시했다. 정말로 이 더러운 야만인과 잠자리를 하기를 바라는 것인가? 이 자의 아이를 배라고? 팔다리에 감각이 사라져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점을 머리속에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로키가 순진했던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 강제 혼인으로부터 무엇이 수반될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기에는 로키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로키는 가축 취급을 받게 될 예정이었다. 에시르 산 새끼를 번식해 낼 도구인 것이다.

로키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오딘슨이 두 사람의 손이 한 데 묶인 자리에서 로키의 손을 꽉 붙잡아, 적어도 그 한쪽 손의 떨림은 잠재워 주었다. 로키는 의아하게 그 자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거칠고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올파더의 수행원들 중 한 여자가 입을 열었다. 술에 잔뜩 취한 것이 틀림 없는 목소리였다.

“올파더, 그렇다면 그 이야기가 사실인가요? 요툰 남성들이 여성의 성기 또한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가요? 그저 꾸며낸 이야기인줄로만 알았습니다.”

“아니, 아니지. 소문이 아니라 진실이라네.”

오딘이 장담하듯 대답했다.

“요툰인들은 우리처럼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네. 아홉 왕국 중에서도 매우 진기한 특성이 아닐 수가 없지. 요툰인들 중 대부분은 씨를 뿌릴 수 있는 능력도, 아이를 밸 수 있는 능력도 동시에 가지고 있네.”

“정말로 기묘하군요!”

그 여자가 외쳤다. 로키는 도무지 그 사실이 뭐가 그렇게 기묘한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번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걸요.”

그 멍청이가 정말로 손을 뻗어 오더니, 제 눈으로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듯 로키가 허리에 두른 옷을 손으로 건드렸다.

로키는 그 손을 찰싹 쳐 냈다. 로키의 눈이 매서워졌다. 이 더러운 종족들은 로키에게서 마법 능력이 박탈된 것에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마법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모욕의 대가로 이 여자를 판석 위의 얼룩으로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로키의 반응에 그저 놀란 듯 헉 숨소리를 낼 뿐이었다. 잘못한 쪽이 로키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외람되지만….”

오딘슨이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

“제 반려에게서 보고 싶어하시는 그 모습은 이제 저만이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저는 제 것을 나누는 데는 한 번도 정통해 본 적이 없어서 말이죠.”

오딘슨이 로키를 자신의 곁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로키는 그 자를 노려 보았다. 낯선 자의 손길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는 것은 반가웠으나, 로키를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이 야만인과 이렇게 가까이 접촉해 있는 것도 딱히 내키지 않았다.

“내 아들이 자신이 얻은 포상을 한시라도 빨리 열어 보기 위해 안달이 난 모양이로구나.”

오딘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딘의 수행원들 또한 거기에 합류했다. 잠깐 어색했던 순간은 빠르게 잊혀져 버렸다. 물론, 불편한 감정이 마음 속에 쌓이고만 있는 로키는 제외하고 말이다.

오딘슨이 몸이 착 달라붙을 정도로 로키를 되려 더 가까이 끌어당겨 왔다.

“조금 서둘러 떠나는 것을 허하신다면 말이지요. 이만 제 반려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가 자식을 가지려는 노력을 다해볼까 합니다. 한 번의 노력 가지고는 안 될 수도 있겠지만요.”

“아, 마침내 처음으로 토르가 참된 아들 노릇을 하려 하는군.”

헬라가 술잔에서 술을 들이키며 즐겁게 입을 열었다가, 술잔 테두리를 빤히 응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뭐 제 성기를 어딘가에 쑤셔 박는 일이라면 어지간히 잘하겠지만 말이야….

오딘이 헬라의 무례한 논평을 자르고 끼어들어, 모여든 사람들 머리 위로 술잔을 높이 들어올리며 외쳤다.

“운명의 여신의 축복을 받아, 겨울이 오기 전 손자를 볼 수 있도록 건배하도록 하지!”

군중들의 시끌벅적한 함성 소리 사이로 헬라가 몸을 기울여 남동생에게 속삭였다. 로키도 충분히 들을 수 있을 만한 소리였다.

“이 요툰인이 네 색깔을 지닌 새끼를 낳아 주기만을 바라자고, 토르.”

“누이도 좋은 시간 보내길.”

오딘슨이 내놓은 대답은 그것이 다였다. 오딘슨은 로키를 자신의 뒤로 잡아 끌며 사람들의 어깨를 밀치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로키는 목구멍으로부터 쓰디쓴 증오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침대 위의 죄수가 되어 이 야만인 왕자 밑에 깔린다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두려움 때문에 심장이 얼어 붙을 것만 같았지만, 로키는 그에 맞서 싸웠다. 그런 야만적인 행동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절망적인 심정 가운데서, 로키는 군중 사이에 있는 한 사람의 허리 벨트에 매달려 있는 짧은 칼자루를 발견했다. 그 칼자루를 매고 있는 멍청이는 이미 잔뜩 취한 채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로키는 날랜 손기술의 소유자였고, 그 기술을 이 자리에서 기꺼이 선보였다. 로키는 아스가르드인 옆을 지나칠 때 그 조그마한 무기를 슬쩍 빼낸 후, 팔 뒤쪽으로 무기를 똑바로 세워 숨겼다.

로키는 오딘슨이 눈치채지 않았을 지 두려웠다. 로키는 거의 벌거벗은 상태나 다름 없었고 그 물건을 숨길 곳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행운은 그의 편이었다. 대회당을 떠나는 동안 야만인은 로키 쪽을 거의 쳐다보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석조로 된 홀을 느릿느릿 걸어갔다. 연회장의 소리가 뒤에서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로키는 틈을 타 자신의 상대를 가늠해 보았다. 두 사람의 키는 거의 비슷했지만, 오딘슨의 몸은 더 거대했고, 자기네 종족들이 찬양해 마지않는 근육으로 잘 짜여 있었다. 하지만 오딘슨은 짧은 시간 동안 술을 아주 거나하게 마셨고, 그의 걸음걸이가 약간 불안한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이 야만인이 바지를 더듬거리며 벗느라 방심한 틈에 목을 베어 버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고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로키는 복도 양쪽을 감싼 단단한 돌벽을 바라보며 절망했다. 이 성은 거의 요새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왕실의 혼인이 있었던 만큼 보초병들이 두 배, 어쩌면 세 배로 배치될 것이다. 로키는 이 곳의 지도 같은 것은 지니고 있지 않았고, 도심 속으로, 혹은 그 너머의 황무지 속으로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까지 간다고 하더라도, 로키에게는 옷이 필요할 것이고, 돈도 있어야 할 것이고, 요툰의 얼굴을 가릴 만한 두건도 있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이 족쇄들을 부숴줄 수 있는 대장장이를 찾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야!”

오딘슨이 급작스럽게 나무로 된 문 앞에 몸을 멈춰 세우는 바람에, 로키는 오딘슨의 널찍한 등에 부딪혀 뒤로 나가 떨어질 뻔 했다. 로키는 자신의 포획자와 한데 엮인 손을 들어 올려 화끈거리는 코를 문질렀다. 덕분에 하고 있던 생각이 죄다 머리에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빌어먹을.

에시르는 그저 어깨 너머로 짧은 시선을 던져 보이더니, 열쇠를 꺼내 잠긴 문을 열었다.

“당신의 방이오. 왕세자.”

오딘슨이 조롱하는 듯한 거친 목소리로 말하며, 로키의 손을 이끌고 방 안으로 향했다.

문이 등 뒤에서 쾅 닫혔다. 방 안에 울려 퍼지는 그 시끄러운 소리에 로키는 펄쩍 뛸 뻔 한 것을 겨우 참아 눌렀다. 로키는 자신의 새로운 감옥 안 모습을 벽을 따라가며 둘러 보았다. 로키가 집에 있을 때 지내던 곳처럼 넓은 방은 아니었다. —아니, 이제 그 곳은 내 집이 아니지. 로키는 마음 속으로 생각을 정정했다. 그리고 이 방은 그 어떤 요툰 주거지보다 훨씬 추웠다. 방 안에는 창문 하나가 살짝 열려 있었고, 그 창문은 꽃이 핀 뜰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스가르드 양식의 커다란 침대가 바닥 위에 무대처럼 솟아올라 있었다. 바닥의 판석 위에는 곰 가죽으로 된 깔개가 깔려 있었고, 깜빡이는 수지 양초가 담긴 등잔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방 한쪽 구석에는 벽난로가 있었지만 그 안에는 잿더미밖에 차 있지 않았다.

오딘슨이 한 데 묶인 두 사람의 팔을 거칠게 들어 올리더니, 매듭을 풀어 내기 시작했다. 로키는 훔친 무기를 등 뒤에 숨겼다. 그저 격식 상 들고 다니는 것이 틀림없는 조그맣고 우스꽝스러운 칼에 지나지 않았지만, 로키는 그 칼이 충분히 날카롭기만을 기도했다. 오딘슨의 으스스한 푸른 눈이 로키의 얼굴 쪽으로 휙 튀어 와, 로키는 재빨리 무표정한 얼굴을 띄워 보였다.

오딘슨 역시 똑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내가 무섭지 않아?”

“지금까지 당신보다 훨씬 더 끔찍한 것들을 많이 봐 와서.”

로키는 이렇게 거짓말을 했다. 사실 로키는 끔찍한 것을 그리 많이 목격한 적은 없었다. 이야기로 전해 듣기만 했을 뿐이었다. 로키의 지금까지의 삶은 편안한 것이었다. 자그마한 몸집과 자신의 직책 덕분에, 전쟁터의 참상으로부터는 잘 격리되어 지내왔던 것이다. 전장에서 자신의 마법 능력을 시험하게 해 달라고 종모에게 애원한 적도 가끔 있었지만, 그 요청은 늘 거부당했다. 로키가 지금까지 맞서 싸운 것 중 가장 위험한 것이라고는 궁 안에서 신중하게 고른 대련 상대 뿐이었다. 하지만 이 무정한 괴물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오딘슨이 로키의 허세를 알아 보았다 할지라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딘슨은 끈을 풀어낸 후 그것을 바닥 위로 떨어뜨렸고, 손에 감각이 없는 모양인지 손을 몇 번 털어 보였다. 그러고 난 후 오딘슨은 로키에게서 등을 돌려 와인이 담긴 유리병과 와인 잔 몇 개가 놓여 있는 조그만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 잔 할래?” 

오딘슨이 물었다.

“당신과 같이?”

로키가 콧방귀를 꼈다.

“그럴 리 없지.”

로키는 칼을 준비했다. 왼손(그가 선호하는 쪽 손)에 칼을 움켜쥔 채, 오딘슨 뒤로 슬그머니 다가가기 시작했다.

“좋아.”

아스가르드의 왕자는 잔에 와인을 찰랑찰랑 넘치도록 따랐다.

“당신 원하는 대로 해. 하지만 난 오늘 밤 거나하게 취할 예정이라서.”

세상에, 이 무시무시한 동물에게 유린당한다는 생각만 해도 얼마나 끔찍한지! 그것도 술독에 빠진 상태로! 짐승 같은 욕망을 더 잘 발산해 내기 위함이 틀림 없었다. 로키는 자신의 연약한 몸을 보며 군침을 흘리는 오딘슨의 모습을 상상했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로키는 훔친 칼을 치켜 들었고—

—오딘슨이 염소처럼 민첩하게 몸을 돌리는 모습에 당황하고 말았다. 오딘슨의 손이 로키의 뼈대 가느다란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칼날 끝이 오딘슨의 목덜미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춰 섰다.

“아까 말은 정정하도록 하지.”

그 야수가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당신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되는데, 단 내 목은 가만히 놔 두었으면 좋겠군.”

“야만인!”

로키가 그 자의 수염 덥수룩한 얼굴에 대고 내뱉었다. 로키는 칼을 조금만 더 앞으로 밀어 꽂아 보려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오딘슨의 손아귀에는 흔들림조차 없었다.

“놔 줘!”

오딘슨의 입술이 잔인한 미소를 그리며 살짝 치켜 올라갔다.

“칼 내려 놔.” 

오딘슨이 말했다.

로키는 고집스럽게 칼을 더 꽉 움켜 쥐었다.

“내려. 놔.”

오딘슨이 어린아이에게 말하듯 되풀이했다. 로키의 손목을 쥔 손아귀가 점점 더 세게 죄어 왔고, 로키는 조그만 뼈들이 서로 맞닿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로키는 그 악력을 버텨 보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통어린 작은 신음을 내뱉으며 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오딘슨이 다른 손으로 떨어지는 칼을 붙잡더니, 그제서야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이건 내가 가지고 있도록 하지. 당신도 이해할 거라 생각해.”

오딘슨이 이렇게 말하며 로키의 손목을 놓아 주었고, 자신의 벨트에 그 칼을 쑤셔 넣었다.

로키는 맨 가슴 위에 팔을 감싸 안으며 신음 소리를 냈다. 황금 팔찌가 피부 위를 파고든 곳에 이미 멍이 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로키는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애를 썼다.

야만인이 무겁게 한숨을 쉬어 보이더니, 로키의 팔 쪽으로 손짓을 했다.

“내가 하라는 대로만 했더라면….”

“난 네게 절대 굴복하지 않을 거야.”

로키가 그 날카롭고 얼어붙은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 보며 말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야. 난 마지막 순간까지 싸울 거야. 에시르의 노리개가 되느니 죽는 쪽이 낫지.”

“이 파란 색 멍청이 같으니라고! 너는….

오딘슨이 말을 갑자기 멈추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의 목소리는 거친 속삭임이 되어 나왔다.

“난 당신과 잠자리에 들 생각 없어. 그 점 머리속에 잘 새겨 둬.”

오딘슨은 다시 와인 잔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잔에 따른 걸 한 모금에 들이켜 버렸다.

로키는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 보았다.

“하지만 네가…오딘이 자식 이야기를 했는데….”

“내 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상관 없어. 난 이 터무니 없는 평화조약에 동조한 척 한 것 뿐이니까.”

오딘슨은 테이블 쪽으로 가더니 유리잔을 다시 한 번 찰랑찰랑하게 채웠다.

“지금 당장은, 내가 내 새로운 반려에게 푹 빠져 있다고 아버지와 누이가 믿게 만드는 편이 나아. 내 계획을 실행할 시간을 벌 수 있거든.”

“계획이라고?”

로키의 머리속에서 손목에 든 멍 따위는 떠나 가고 말았다.

“계획이 있다고? 그게 뭔데?”

“지금 당장의 계획? 아까 말했듯이, 거나하게 취할 예정이지.”

토르가 몸을 돌려 테이블에 몸을 기대더니, 술잔을 입 쪽으로 가져 갔다.

“정말 한 잔 할 생각 없어? 앞으로 때워야 할 시간이 길거든. 이 방에서 너무 빨리 나가 버리면 안 돼. 내가 그렇게 떠벌려 놓고는 내 반려를 충분히 즐기지도 못했다고 생각들을 할 게 뻔하거든.”

로키는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쯤하면 얼굴이 틀림없이 자홍색으로 물들어 있을 것이다.

“즐거움 소리 따위는 관둬! 대체 왜 네 동료 아스가르드인들을 속이려 하는 거지?”

오딘슨은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긴 이야기야. 술이 좀 들어가야 어울릴 이야기기도 하고.”

“당신이랑 같이 술잔 기울일 생각 없어.”

로키가 말했다.

“그냥 내가 알고 싶어 하는 이야기나 말해 줘.”

“좋아. 어디 보자….”

토르는 다음 할 말을 궁리하는 듯, 와인 잔을 손 안에서 굴렸다.

“내 누이가 올파더에게 교묘한 말들을 불어넣는 바람에, 아버지의 마음이 내게서 떠나갔어.”

오딘슨이 와인을 더 따르며 말했다.

“긴 세월 동안 나는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야. 그렇게 되도록 헬라 누이가 확실히 조처해 주었지. 누이는 질투심이 많고 권력 욕심으로 미쳐 있어. 통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 가장 최근의 골칫거리를 주선한 것도 바로 내 누이야.”

오딘슨은 채워 놓은 와인을 입에 털어 넣은 후 얼굴을 찡그리며 삼켰다.

“아버지는 손주를 보고 싶어 하시지. 내 누이는 제공해 줄 생각이 전혀 없고. 그래서 그 일은 이제 내 유일한 과업이 되고 말았어.”

오딘슨은 술잔 밑을 빤히 응시했다.

“나는 그저 둘째 자식일 뿐이야. 정치 싸움에서는 속절없이 밀려나 있고, 전장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해. 이 왕국에서 내려지는 결정 또한 내 소관이 아니지.”

로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럼 당신도 이 혼인을 원하지 않았던 거야?”

오딘슨이 와인으로 젖은 입술을 팔로 닦더니 숨을 훅 내쉬었다.

“절대. 그럴 리가. 나도 당신처럼 마지 못해 끼게 된 거야. 그걸 티 내지 않을 분별력 정도는 있었을 뿐이지.”

이 정보를 소화하는 동안 로키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전개이기는 했으나, 어쩌면 이 더러운 오딘슨 작자가 자신의 유일한 동맹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날 놓아 줘.”

로키가 세 번째 잔을 따르려 손을 뻗는 오딘슨의 팔을 붙잡았다.

“이 성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고, 날 놓아 줘. 그럼 너도 내게서 해방될 수 있겠지.”

그 야만인이 로키의 손을 떨쳐 내며 피식 웃었다. 그는 와인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따랐다.

“그건 불가능해.”

오딘슨이 대답했다.

“누이가 모든 일이 자기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줘야 하거든. 그렇게 해야지 내가 칠 무렵에 의심하지 않을 거야.”

“치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로키가 물었다.

왕자가 로키를 뜯어보았다.

“요툰 포로에게 내 비밀을 전부 털어놓지 못하는 점은 양해해 주길 바랄게.”

그가 잔을 들여다 보며 중얼거렸다.

“널 떠나게 해 줄 수는 없어. 아직은 안 돼. 내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당신이 어딜 가겠어? 요툰헤임은 당신을 받아 주지 않을 거잖아.”

로키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야만인의 말이 맞았다. 자신 모국의 국민들마저, 자신과 피가 섞인 가족들마저, 자신을 이 곳 늑대들 사이에 버려 놓았다. 로키는 비틀거리며 넓은 침대 가장자리를 손으로 더듬어 잡은 후 그 곳에 무겁게 내려 앉았다. 로키의 손이 거의 가려지지도 않은 허벅지 위에 쓸모 없이 내려 앉았다. 팔에서 황금 고리들이 번쩍이며 빛났다.

로키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얻을 이득이 무엇이 있겠는가?

“네 계획의 도구로서 내가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로키가 낮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내 포로 신세에 매 번 맞서 싸울 거야. 그저 이 상황에 굴복해 버릴 수는 없어. 네가 이해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로키의 시선이 오딘슨의 불가해한 얼굴 쪽으로 향했다.

“당신의 입장은 이해하고 말고, 왕세자.”

더 낮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내 말을 믿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난 그 어떤 누구에게도 이런 운명이 처해지는 걸 바라지 않아. 아무리 내 숙적 종족인 당신이라 해도 말이지.”

로키는 오딘슨을 아래위로 훑어 보았다.

“네 말이 맞아.” 로키가 대답했다. “난 네 말 못 믿어.”

아스가르드인들이 피의 충동과 역겨운 욕망에 지배 받는 종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 술주정뱅이가 그것 외에 다른 감정을 느낀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었다.

오딘슨의 입술이 미소에 가까운 선을 그렸다.

“보아하니 당신이 가장 잘 연마시킨 무기는 당신의 혀인 모양이군. 당신이 이렇게 재치 넘치는 사람일 거라 예상치는 못 했거든.”

로키는 눈을 돌렸고 대답을 주지 않았다. 그 따위 칭찬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말을 받아쳐 줬다가는 이 야만인더러 더 어설프게 수다를 떨어 달라고 부추기는 꼴이 될 것이다. 로키는 그 생각에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물론 방이 너무 추워서 그런 탓도 있었다.

오딘슨이 잔을 마저 들이키며 로키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젖은 입술이 살짝 비틀려졌다.

“왜 몸을 떠는 거야?” 

오딘슨이 물었다.

“이 방 추워 죽겠어.”

로키가 대답했다.

“그리고 난 지금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나 마찬가지거든.”

로키는 열기를 조금이나마 더해 보려 팔을 비벼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로키의 이가 딱딱 부딪혔다. 오딘슨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챈 로키가 쏘아 붙였다.

“왜? 왜 날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요툰인들은 추위를 즐기는 줄 알았지. 당신의 모국은 일 년 내내 눈과 얼음으로 덮혀 있는 땅이 아니었던가?”

“그러는 네 나라는 물로 덮여 있지 않아?”

로키가 받아쳤다.

“너야말로 왜 물 속에 살면서 아가미로 호흡하질 않고? 정말이지, 오딘슨, 우둔하기 짝이 없기는….

“하지만 당신이 입고 있는 의복도 당신 종족의 관습 아냐? 그렇게 간단하게 입는 것도?”

야만인이 이렇게 항변했다.

“추위 속에 그런 복장을 하고 있는 것에는 익숙할 줄 알았지.”

토르가 로키의 맨가슴을 손가락질해 보였다. 차가운 공기 덕에 젖꼭지가 딱딱하게 올라 붙어 있었다.

로키는 어깨에 두르고 있던 모피를 끌어당겨 그 짧은 길이로나마 몸을 덮어 보려 애썼다.

“이건 내 옷이 아니야! 혼인 전에 누가 강제로 입혀 준 거라고!”

“하지만 당신 종족의 의복이잖아.”

“이 전투복을 어설프게 따라한 옷이 우리 의복이라고?”

로키의 성질이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이런 모양의 전투복은 전장 최전방에 나서는 전사들이 입는 옷이야! 제대로 된 겨울을 지내 본 적도 없는 허약한 적들을 겁 주기 위해 입는 거라고! 일반적으로는 우리 사람들도 네 족속처럼 튜닉과 바지를 입는다고. 이 머리 속에 든 것도 없는 멍청한 작자야!”

오딘슨의 입이 멍하게 벌려져 열렸다. 로키는 숨을 참았다. 아무도 감히 아스가르드의 왕자의 얼굴 앞에다 대고 이렇게 철저히 욕을 퍼부은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제서야 떠올랐다. 둘 사이의 잠정적인 휴전에도 불구하고, 로키는 이 무뢰한이 자신의 목을 부러뜨려 버리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야수 같은 왕자는 그저 와인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비우며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사과의 말을…해야 할 것 같군.”

그 말을 꺼내는 게 고통스럽기라도 한 목소리로, 오딘슨이 말했다.

“고작 그것 뿐이야?” 

로키가 투덜거렸다.

오딘슨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시종들에게 당신의 방을 이렇게 준비하라고 시킨 건 나야. 벽난로에 땔감을 채워 놓지 말고, 창문을 열어 놓아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게 하라고 했지. 그리고 네 혼인 의복을 준비한 것도 나고. 당신이 조금이나마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려고 그랬어. 뭔가 익숙한 게 있다면 그럴 수 있을지 모르니.”

오딘슨이 창문 쪽을 응시했다. 그가 침을 꿀꺽 삼키자 두꺼운 목이 아래위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내가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점은 몰랐군.”

로키는 뭐라고 대답해 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침내 겨우 말문이 열려 로키는 말을 꺼냈다.

“내가 편안함을 느끼게 해 주려 했단 말이야, 오딘슨?”

“토르라고 불러.”

왕자가 여전히 그의 눈을 마주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 쪽이 더 내킨다면, 토르라고 불러도 돼.”

“안 내켜.”

로키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 어떤 것도 내키지 않거든. 특히 배려심 없는 의사 표시는 더더욱 말이지.”

로키는 허벅지를 덮은 조그만 요의를 만져 단정하게 주름을 펴며, 토르의 얼굴을 바라보는 대신 결연하게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왕세자.”

토르는 마지막 남은 와인 한 방울을 찾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술잔 바닥을 열심히 들여다 보았다. 그러고는 아무 것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는 술잔을 옆에다 내려 놓은 후 벽난로 앞에 서 불을 때기 시작했다.

로키는 자신의 포획자가 불쏘시개를 쑤셔 넣어 불꽃을 피우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아니, 포획자라기보단 동료 죄수라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몰랐다. 갑자기 자신에게서 마법 능력이 박탈된 이상, 불을 손수 때는 법도 배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로키가 가장 먼저 익혔던 마법 주문 중 하나가 불꽃을 불러내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로키는 부싯돌을 다루는 방법 같은 것에는 무지했다.

“됐어.”

땔감이 딱딱 소리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하자 토르가 말했다. 그는 다시 몸을 일으킨 후 바지에 손을 문질러 닦았다.

“조금만 있으면 곧 따뜻해질 거야. 이것도 걸치도록 해.”

오딘슨이 어깨에서 그 이상한 붉은색 망토를 풀어 내리더니 로키 쪽으로 건넸다. 로키는 그 천데기에 대고 코를 찡그렸다.

“참 나. 필요 없어.”

그 망토를 받아들이는 것은 술을 함께 기울이는 것보다 더 친밀한 행위가 될 것이다.

“거기 그냥 앉아서 떨고 있는 쪽이 나을 것 같아?”

토르가 픽 코웃음을 치더니 로키가 앉은 침대 발치에 망토를 던졌다.

“뭐, 네 결정에 달린 일이니까.”

오딘슨이 그 거대한 어깨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로키는 그 망토를 못 본 체 하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불편함이 우위를 점하고 말았다. 로키는 망토를 집어들어 떨리는 어깨 위에 둘렀다. 망토에서는 아스가르드인들 피부 특유의 매캐한 흙 냄새 같은 것이 강하게 풍겨 왔다. 딱히 기분 좋은 향은 아니었지만, 로키는 그 묘한 체취를 모두 확인해 보려 냄새를 맡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망토는 꽤나 따뜻했다.

“내일 시종들을 시켜 새 옷을 가져오게 하도록 하지. 그렇게 빈약한 옷 말고 다른 옷 말이야.”

토르의 걸음이 침대 가장자리 쪽에서 맴돌았다.

“지금으로선 이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오딘슨이 말을 뚝 끊더니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였다. 그러더니 그가 로키의 턱을 거친 손바닥으로 붙잡아 왔다.

로키가 머리를 흔들어 그 손길을 떨쳐 냈다.

“제발 좀 부탁인데 말이야, 그 손 치워!”

“하지만 거기….”

로키 쪽으로 강한 와인 냄새가 풍겨 왔다. 오딘슨이 자기 자신의 입가 쪽을 손짓해 보였다.

“그 곳…. 누구에게 맞은 거야?”

로키가 손가락을 올려 여전히 쑤셔 오는 얼굴 한 쪽 구석을 문질렀다.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네 경비병들이. 내가 저항했더니 그렇게 했어.”

로키가 대답했다.

“그런 짓은 하면 안 됐는데. 널 잘 대해 주라고 명령을 내렸어.”

“난 내 모국으로부터 강제로 붙잡혀 왔는데, 얼마만큼 날 잘 대해 줄 수 있겠어?”

로키는 코를 훌쩍거리며 몸을 돌렸다. 흘러내리지 못한 눈물 때문에 자신의 두 눈이 얼마나 분홍색으로 변했는지, 이 건달에게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토르는 대답할 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대신 그 자는 침대에서 다시 떠나가 벽난로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곰 가죽 위에 몸을 앉히더니 불꽃을 빤히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왜 저렇게, 무슨 권리로 저렇게 좌절한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로키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살아온 자신의 삶에서 본 중 오딘슨이 가장 끔찍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오딘슨은 술주정뱅이었고, 냄새 또한 지독했으며, 그의 몸과 영혼 둘 다가 추하기 그지 없었다.

로키가 그를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술을 모조리 다 퍼 마셔 버렸으니 이제 남은 밤 동안 뭘 할 생각이야?”

“날 과소평가 하는군, 왕세자.”

토르가 중얼거리더니 벨트에서 조그만 금속 플라스크를 꺼냈다. 그는 플라스크의 뚜껑을 따더니 깊게 한 모금 들이마셨다.

로키는 눈알을 위로 굴렸다. 짐승이 따로 없었다.

플라스크에 들은 술은 목을 화끈거리게 타게 만드는 종류임이 틀림 없었다. 토르가 술을 삼키며 고통스럽다는 듯 신음을 뱉었다. 그가 털 덥수룩한 머리를 돌리더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로키를 바라 보았다. 오딘슨의 시선이 로키의 발 끝에서부터 새까맣게 윤기가 흐르는 머리 다발까지 훑어 올라갔다. 로키는 그 시선을 아주 잠깐 버텨 보았다가, 사납게 쏘아 붙였다.

“왜 계속 쳐다보는 거야?”

“아무 것도 아니야.”

오딘슨이 술을 더 들이키며 대답했다.

“그저 좀 익숙해 져야 할 것 같아서. 내 집 안에 요툰인이 있다는 사실에 말이지….”

그래. 기묘한 일임에는 틀림 없었다. 영원한 숙적 두 사람이 침실에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은. 로키는 그 점을 숙고했다. 두 손이 자유를 갈망하며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난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네 저급한 취향에 맞춰 줄 수 있는 모습으로 말이야. 이 고리를 풀어 주기만 하면 돼.”

로키는 손목을 감싸고 있는 황금 고리들을 덜렁덜렁 흔들어 보였다. 물론 승산 없는 시도이기는 했다. 토르가 아무리 멍청한 지능을 가졌다 할지라도 로키의 능력을 풀어 놓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 것이다.

토르가 로키를 향해 유감스럽다는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다시 플라스크에서 한 모금을 들이켰다.

“불운하게도 그건 내 누이가 만든 구속구야. 구속을 푸는 방법은 누이만 알고 있지. 네 마법 능력을 억제하기 위한 속박이지? 헬라는 네가 정말 강력한 마법사라고 생각했나 보군.”

오딘슨이 불신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내 누이는 미쳤고, 위협이 없는 곳에서도 위협을 보곤 하지.”

“이번만큼은 네 누이의 생각이 맞는 것 같군. 네가 인식하는 것보다 나는 더 위험한 존재야, 오딘슨.”

로키가 분개해 대답했다.

“정말로?”

토르가 그 모습을 상상해 보기라도 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요툰의 마법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 정말로 위협적이라면, 왜 전장으로부터 그런 이야기가 들려 오지 않는 거지?”

로키는 발을 들어올려 붉은 색 망토 안쪽으로 집어 넣었고, 망토단을 매만져 몸을 완전히 감쌌다.

“모든 요툰인들은 어느 정도의 마법 능력은 가지고 있어. 하지만 동시에 요툰인들은 네 족속들보다 훨씬 덩치가 크지. 그런 힘을 가진 이상 마법에 의존할 필요가 없고. 난 내 작은 체구의 약점을 상쇄하기 위해 마법 능력을 연마했어. 장담하건대, 얕보지 않는 게 좋을 걸.”

“아, 맹인에게서 잃어버린 시각을 대신해 청력이 더 밝아지듯 말이지.”

토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더니, 말을 멈추고 고개를 흔들었다.

“요툰인과 마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니. 내 신혼 첫 밤을 이렇게 지새울 줄은 상상도 못 했군.”

토르가 플라스크에다 입을 댄 채 자기 자신에게 투덜거리듯 말했다.

로키가 쓰디쓴 웃음을 터뜨렸다. 로키의 종족에게는 아스가르드인들처럼 한 사람과 혼인을 올리는 풍습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아스가르드인들이 신혼 밤에 어떤 것을 기대하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따뜻한 침대와, 연인의 행복한 품 속에서, 자식들을 가질 희망을 꿈꾸는 것….

로키는 눈처럼 흰 침대 시트를 쳐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로키는 붉은 망토를 어깨에 더 단단히 둘렀다.

“오딘슨….” 

로키가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토르라고 불러도 된다니까.”

“싫어.”

로키가 거의 자동적으로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와 내 종모가…우리의 결합에 대해 상세히 논의했을 거라 생각해?”

토르가 그 푸른 색이 어린 두 눈으로, 어깨 너머의 로키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내 아이를 밸 수 있는지 정도는 의논했겠지. 왜 물어보는 거지?”

로키는 입술을 씹었다. 이런 은밀한 이야기를 이 야만인에게 털어놓다는 생각만으로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생각했을 때, 수치심 하나 정도 더하는 것이 뭐가 문제겠는가.

“시트 위에 피를 남겨야 할 거야.”

로키가 마침내 겨우 말했다. 로키는 허벅지 위에 놓인 두 손을 힘주어 응시했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떠벌린 만큼 네가 날 충분히 가지지 않았다는 걸 시종들이 보고할 지도 몰라.”

그 말에 토르가 천둥 같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네 처녀성이 아직 온전하다면야 그렇겠지.”

토르가 말했다. 침묵이 뒤따랐고, 로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한 번도 잠자리를 가져 본 적이 없다는 뜻인가, 왕세자?”

토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 텅 빈 머리에 남아있는 걸로 생각을 좀 해 봐! 당연히 없지. 그 어떤 방법으로도.”

로키가 결국 시선을 치켜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체 왜?” 

토르가 물었다.

끓어오르는 감정으로 콧구멍이 벌름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 야만인에게 자기 상황을 줄줄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했다.

“나는 내 종족들의 절반 크기라고. 누가 날 가지려 들겠어?”

로키는 다시 팔을 문질렀다. 방 안은 여전히 너무 추웠다.

토르가 멍청하게 입을 딱 벌리고 쳐다보았다.

“하지만 당신의 지위는…구애자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로키는 얼굴을 붉혔다. 로키의 가장 마음 속 약한 구석에 그런 말을 쑤셔 넣는 오딘슨을 저주하고 싶었다.

“내 모국에서는 지위조차 그런 결함을 극복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아. 뭔가 진귀한 경험을 해 보고 싶어 날 욕정하던 변태 같은 자들이 있기는 했지.”

로키가 시선을 아래로 향하며 말했다.

“물론 그런 자들과는 절대 잠자리를 가지는 것을 거부했어.”

로키는 얼굴을 돌렸다. 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는 너무도 큰 성기를 받아들여 몸이 쪼개지지 않을까 하던 옛 두려움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게 아니면 자신의 조그만 성기로 비웃음을 산다든지, 혹은 살아있고 숨쉬는 존재가 아닌 이국적인 장난감 취급을 받는 데에 대한 두려움.

“그래. 그러니 내게는 아직…그걸 뭐라고 부른 거지? 처녀성? 그게 있어. 라우페이도 분명히 알 거야. 라우페이가 안다면 이미 오딘도 알 테고.”

“그렇군.”

토르가 천천히 대답했다.

“사과하지. 제대로 생각치 않고 이야기한 것 같군.”

로키는 가시 돋친 말을 뱉어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애초에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사는지는 모르겠는 걸.”

얼마간 더 침묵이 흘렀다. 로키는 그 동안 분노와 함께 수치심을 목구멍 안으로 삼켜 눌렀다. 토르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더니,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거리로 일어나 벨트에 손을 뻗었다. 토르는 아까의 그 훔친 칼을 손에 집어 들었다.

로키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쩌면 술을 퍼 마신 이 야만인 왕자를,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두려워해야 했는지도 몰랐다.

“당신의 피도 붉게 흐르나?”

토르가 칼의 날카로움을 시험하기 위해 엄지손가락으로 날을 훑으며 물었다.

“뭐라고?”

로키는 숨이 죄어들어오는 목소리로 물었다. 로키의 시선이 창문 쪽으로 휙 향했다. 너무 작았다. 저 곳으로 절대는 통과하지 못 할 것이다.

“네 피 말이야. 네 피도 내 것처럼 붉은 색깔인가?”

“물론이지.”

“그래, 좋아.”

토르가 칼로 자기 자신의 손바닥을 베어, 몇 센티미터 정도 되는 상처를 남겼다.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시트 위에 피를 남기도록 하자고.”

토르가 로키의 공포에 질린 표정을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 느낌도 없어. 술이 고통을 덜어 주거든.”

로키는 토르가 겹겹이 쌓인 침대 시트를 들추어 내는 것을 도왔다. 마침내 마지막 시트에 이르자, 토르는 피범벅이 된 손바닥을 부드러운 흰색 천 위에 대고 눌렀다. 붉은 얼룩이 시트 위에 남았다.

“옆 쪽으로 좀 문질러 봐.”

로키가 자기 손가락을 그 위에 문지르며 말했다.

“그래야 좀 더 자연스러워 보일 거야.”

핏자국이 만족스러운 모습을 띨 때까지 두 사람은 열심히 작업을 했다. 물론 로키는 자신의 경험에 빗댈 수는 없었지만, 경험 없는 눈에도 그 자국은 꽤 그럴 듯 해 보였다. 자신의 가짜 처녀성을 앗아 간 자취를 남기며 번진 자국인 것이다. 토르 역시 시트에서 뜯어낸 천 조각으로 베인 상처를 둘러 죄면서, 그 자국을 살폈다.

“누가 물어본다면 내가 당신을 어떻게 가졌다고 이야기해 주지?”

“당연한 소리겠지만, 난 감조차 못 잡겠는걸.”

로키가 눈썹을 치켜들며 대답했다.

“애초에 누가 왕자에게 그런 천박한 질문을 하겠어?”

“아스가르드를 아직 모르는군.” 토르가 씩 웃음 지으며 고개를 흔들면서 대답했다.

로키는 맨 가슴 위로 팔짱을 꼈다.

“알고 싶은 생각도 없어.”

로키는 다시 푹신한 침대 매트리스 가장자리에 걸터 앉았다. 최대한 토르와 핏자국 쪽에는 멀리 떨어져 있으려 노력했다.

토르가 침묵한 채 한참 동안 로키를 뜯어보더니, 다시 벽난로 앞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토르는 모피 위에 놓여 있는 플라스크를 집어 들더니 다시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여기 있은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내 나라와 국민들에 대해 재단하고 있군. 당신은 내가 아는 것 만큼 아스가르드를 몰라.”

“내가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로키의 마음속이 분노로 끓어 올랐다. 로키는 옆쪽으로 모로 누워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망토를 몸에 꼭 두른 채 로키는 석조벽을 빤히 쳐다보았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 마저 마시지 그래, 오딘슨. 나는 이만 쉬어야겠어.”

“편안한 잠을 청하기를, 왕세자.”

그 말이 조롱을 담은 것인지 친절함의 의사인지, 로키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그 목소리는 부루퉁하게 들렸다.

저 멍청이가 로키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든 누가 신경 쓰겠어? 로키는 눈을 꽉 닫은 채 곧이어 비통하고 지친 잠에 빠져 들었다.


*    *    *




새 시리즈 번역입니다. 토르로키 팬덤에 차고 넘치는 요툰로키 정략결혼물이지만, 최근에 연재되고 완결 난 작품이라 헬라, 발키리, 스커지 등의 인물도 등장하고 최근 MCU 시리즈 속의 장면이 떠오르게 만드는 부분들이 많아서 신선하고 정말정말 재밌게 읽은 작품입니다. 지금까지 번역한 것 중 한 편 한 편 가장 분량이 많은 작품이라 번역 끝내는 데 얼마나 걸릴지 잘 짐작이 안 가네요. 16편에 걸친 토르로키의 쌍방 삽질도 짜릿하고 작품 후반부에 헬라와 다른 여러 (스포)(스포) 인물들의 상호작용이 정말 카타르시스 넘치는데 얼른 완결까지 보여 드리고 싶어요! 번역 잘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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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로키/번역]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