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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로키/번역]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 (5/16)

토르로키 / Thorki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왕세자와 야수)"

by triedunture


원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5267873


  • 작가님께서 번역은 출처를 포함하여 자유롭게 하라고 명시하셨습니다. (https://i.imgur.com/r6PfDqx.jpg)
  • 에시르 토르x요툰 로키 정략결혼 AU입니다. 구전동화 느낌이 살짝 끼얹어진 작품으로 이야기 중간중간에 화자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 로키를 비롯한 모든 요툰 종족은 인터섹스(자웅동체)라는 설정입니다. 엠프렉 언급이 있습니다.
  • 요툰헤임에는 성별의 구분이 없고 누구나 아이를 밸 수 있기 때문에, 어머니/아버지라는 단어 대신 (주로 동물 번식에서) 누가 씨를 뿌렸고 누가 새끼를 배었는지 칭하는 단어인 dam/sire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 단어들은 원문에서 사용한 의미와 가장 비슷한 단어인 '종빈/종모'로 번역합니다.



*    *    *



5장.


‘조그만 자’ 로키는 죽은 아스가르드의 왕비를 만나는 자신의 꿈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유감스럽지만, 딱히 생각을 기울이지는 않았다고 해야겠다. 로키가 아침에 깨어날 무렵이면, 그 기묘한 꿈의 끈질긴 기억은 이미 마음 속 가장자리에서 희미해져 사라져 가고 있었다. 당신도 그 점에서는 로키와 비슷할 지 모른다. 잠시동안 꿈을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고, 꿈의 내용이 매우 충격적이었거나 너무도 생생했다면 조금 더 오래 생각을 기울여 볼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는 하루가 시작된다. 아침식사를 해야 하고, 옷을 갈아 입어야 하며, 머리도 빗어야 한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로키가 프리가의 꿈에 대해 생각을 기울였다 할지라도, 그는 그 꿈이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 꿈은 경청자를 필요로 하는 창백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거나, 로키의 과민한 상상력의 산물일 뿐일 것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더군다나, 로키의 강제 혼인이라는 감옥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계획만큼 중요한 일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 날 아침은 그렇게 지나갔다. 토르는 약속한 대로 로키를 데리고 말을 타러 갔다. 토르는 어제처럼 로키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 이미 방을 떠나 있었다. 어제처럼 로키가 마구간에 도착했을 무렵에 이미 말들은 떠날 채비가 되어 있었다. 역시 어제처럼 아침 안개가 떠나간 후의 날은 화창했고 밝았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다시 숲 쪽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어제와 달리 로키는 꽤 유용한 지식들을 배웠다.

로키의 요청을 토르가 기꺼이 받아들여, 두 사람은 어제와는 다른 방향의 길로 향했다. 스톰브레이커와 벨이 언덕과 바위 봉우리들을 넘어 두 사람을 더 높은 지대까지 이동시켜 주었다. 덕분에 로키는 지형을 살필 수 있었다. 절벽 가장자리까지 말을 타고 올라간 로키는 눈 앞에 펼쳐진 아스가르드의 모습을 눈여겨 보았다. 아스가르드의 그 모든 으리으리한 첨탑들과 번쩍거리는 건축물들…. 로키는 그 풍경을 머리 속에서 지워 없애 버리려 애썼다. 그 대신 로키는 주위의 지형지물과 이리저리로 구부러진 길을 잘 외워 두었다.

“저건 뭐지?”

로키가 한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아스가르드 수도의 해안으로부터 뻗어져 나가서, 견고한 요새가 세워진 작은 섬까지 연결되어 있는, 여러 빛깔을 띤 다리가 있었다.

“바이프로스트까지 연결시켜 주는 무지개 다리야. 바이프로스트를 이용하면 나라 사이를 가로질러 이동할 수 있고, 심지어 은하계를 넘어서 여행할 수도 있어.”

토르의 눈매가 부드러워지더니, 언뜻 불안한 기색을 띠었다.

“당신이 요툰헤임에서 여기로 잡혀 왔을 때도 저걸 타고 왔지.”

로키는 포로로 잡혔을 때 자신을 감쌌던 빛깔을 기억해 냈다. 그 때 로키는 마법 고리에 붙들린 채, 눈깜짝할 새 아스가르드에 도착해 있었다. 그 기억 덕에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로키는 이를 꽉 깨물었다.

“아, 그래. 아주 경이롭기 그지 없었지. 저건 대체 어떻게 작동하는 거지?”

“나도 상세한 원리는 잘 몰라. 하지만 저걸 타고 여행은 여러 번 해 봤지. 가고 싶은 곳을 문지기에게 이야기해 주면, 바이프로스트의 정교한 원리가 작동되어 당신을 그 곳까지 이동시켜 주지.”

토르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수 년 전에는 헤임달이 그 문지기였어. 하지만 헤임달이 지위를 박탈당하고 난 후 다른 자가 그 자리를 맡았지.”

“네 누이에게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말이지?” 로키가 추측해 보았다.

토르가 조소했다.

“스커지는 제 자신에게만 충성스러운 작자야.”

토르가 이렇게 대답하더니, 스톰브레이커의 고삐를 잡아당겨 바이프로스트가 내려다보이는 그 곳에서 떠나갔다.

“이리 와. 계속 이동하도록 하지.”

로키도 말을 재촉해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로키의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현재 바이프로스트를 지키고 있는 문지기가 매수 가능한 자라면, 로키의 탈출에는 좋은 징조임이 틀림 없었다. 적당한 뇌물 하나만 있으면 다른 세계로 훌쩍 떠나 버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스커지라는 자를 꼬드기기 위해서는 뭔가 귀중한 물건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은화 열 개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로키는 오딘슨의 말 옆에 나란히 선 채, 그 수염 덥수룩한 얼굴을 슬쩍 눈길질했다.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조금 부드럽게 구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내가 알기로는 말이지, 오딘의 아들.”

로키가 사탕 발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나라에서는 부부가 서로에게 선물을 준다고 하던데.”

“그래. 애정을 표현하거나, 중요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선물을 주고 받고는 하지.”

토르가 대답했다. 토르의 얼굴 위로 몇 개의 표정이 스치고 지나가더니, 끝내는 심각한 표정이 내려앉았다.

“당신 종족들에게는 그런 관습이 없나?”

“딱히.”

로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이유를 설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 요툰인들은 전쟁 덕분에 몇 세대에 걸쳐 매우 금욕적인 삶을 살아 왔다. 사치스럽게 부를 뽐내는 것은 요툰인들 사이에서 천박하고 품위 없는 일로 여겨졌다. 요툰 땅 위에서 값비싼 물건들은 거의 모습을 드러낼 일이 없었다. 라우페이 왕마저도 나무와 뼈로 만들어진 왕관을 쓰고 다녔다.

“하지만 네 관습도 꽤 매력적인 것 같아. 그 황금이며 보석이며 진주들이며….” 

로키가 입을 열었다.

“당신 사람들의 전통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 줘.”

로키가 바라던 대로 선물을 가져다 주기로 제안하는 대신, 토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세상에 대해서 더 배우고 싶어. 내게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말이지.”

로키는 슬쩍 얼굴을 찡그렸다가, 얼른 환한 미소 뒤로 그 표정을 숨겼다.

“내 종족에 대해 배우고 싶다니 아주 훌륭한 걸. 어디 보자…. 우리가 에시르처럼 혼인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토르가 나무 사이로 스톰브레이커를 인도해 더 깊숙한 숲 속으로 들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렴풋이 알고 있어. 하지만 내 지식에는 공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 같군. 요툰인들은 아내 여럿을 두는 것인가?”

로키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을 계속 몰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남편과 아내라는 말 대신에 우리는 ‘협력자’라는 표현을 써. 한 시점에 세 명, 혹은 네 명의 협력자를 동시에 두고 있을 수도 있어. 그보다 더 많거나 적을 수도 있고. 내 숙부는 꽤 전설적인 분이셨지.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만 해도 쉰 세 명의 협력자를 두고 있었어.”

토르가 휘파람을 불었다.

“당신 숙부는 그런 하렘 같은 집단을 어떻게 감당하는 거지? 그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절하지 않아. 당신은 여전히 우리 종족을 남자와 여자의 차원으로 생각하고 있군. 내 숙부가 자기 협력자들을 감당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야. 이상적으로는, 그들 모두가 함께 일하고 자신 스스로를 감당하고 그들 자식들을 함께 감당하지. ‘협력자’라는 이름 단어 그대로야.”

“협력자…라.”

토르가 그 단어의 모양을 맛보기라도 하듯 천천히 발음했다.

“미안하군. 그저, 내가 자란 곳과는 너무 다른 문화라 그랬어. 내가 완전히 그 개념을 이해하기에는 조금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아. 하지만 뭔가를 해 나가기에는 꽤 즐거운 방식인 것 같이 들리는군. 전사들이 서로에게 의지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 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대가족인 거지.”

“그래, 그것과 비슷한 것 같군.”

로키는 향기로운 산딸기 덤불 주위를 빙 둘러 말을 몰았다. 다시 슬슬 원래 주제로 돌아 가 봐야겠다고, 로키는 생각했다.

“한 가정 내에 그렇게 사람들이 많다 보니, 선물을 주고받는 것 같은 일은 뒷전이 되고 말지. 사실은….”

하지만 오딘슨이 다시 불쑥 끼어들었다.

“한 사람 한 사람과 혼인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기 혈통이 제대로 이어지는지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 거지?”

“글쎄, 모르겠군. 에시르 족은 아무 의심의 여지 없이 자기 자식의 혈통을 자기 것이라 주장할 수 있어? 부부 관계에서 탈선이 일어나는 일도 있지 않나? 당신도 그럴 수 있지 않아?”

토르는 그 말에 짐짓 분개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손톱 만큼의 품위라도 지니고 있는 이상, 그럴 일 없어!”

로키가 혀를 쯧쯧 찼다.

“그렇다면 당신은 요툰인의 풍습은 불온하다고 여기는 것인가? 우리 종모와 종빈들이, 꽃 사이를 쏘다니는 꿀벌들처럼 이 침대에서 저 침대로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오딘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저…내게는 너무도 다른 개념일 뿐이야. 나는…혼인 의식이라는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지라.”

“그 혼인 의식이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라 해도?”

로키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토르가 그 말에 조용해지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저 내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 뿐이야. 내게 당신에게 결속되어 있는 동안 만큼은, 나는 절대 다른 사람의 침실에 들지 않을 거야. 우리 혼인이 우리의 선택이 아니었다 해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하는 것은 그 불쌍한 사람에게도, 당신에게도 모욕이 되겠지. 그리고 난 이미 지금까지 충분히 당신에게 모욕을 행사했어. 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생각이야.”

로키는 그 선언에 너무 놀란 나머지, 가던 길에서 벨을 멈춰 세운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벨이 콧김을 내뿜으며 땅을 찼다. 오딘슨이 정말로 두 사람의 혼인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정숙을 유지하겠다고 맹세한 것인가? 로키가 알고 있는, 그들 종족의 비도덕적이고 야만적인 습성과는 너무도 달랐다. 존재하지도 않는 로키의 평판을 이 야수가 신경 쓴다는 생각만 해도!

토르 역시 몇 걸음 앞에서 멈춰 서더니, 안장 위에서 몸을 틀었다. 그의 창백한 눈이 의아함을 담고 있었다.

“문제라도, 왕세자?”

로키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말을 앞으로 몰기 시작했다. 자신의 진짜 과제에 집중해야만 했다. 이 곳에서 도망치고 싶다면, 자기를 쫓아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추월할 수 있는지 배워야 했다.

“언제쯤이면 구보로 달리는 것보다 더 빨리 달리는 방법을 알려줄까 하고 궁금해하고 있었어.”

토르가 씩 미소를 지었다.

“그 점은 곧장 바로잡아 주도록 하지.”

그래서 다음 몇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나무숲 너머에 있는 초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오딘슨은 로키에게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로키는 곧이어 그 가르침을 실천에 옮겼다. 땅을 박차고 달려가는 말발굽 밑에서 흙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잡혀온 이후로 어깨 너머까지 길게 기른 로키의 검은색 머리카락을 바람이 탁탁 때려 왔다. 로키의 두 눈이 젖어 들기 시작했고,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도주하는 기분이었다.

자유의 기분이었다.

“기분이 어때?”

토르가 로키와 나란히 말을 몰며 휘갈겨 오는 바람 너머로 소리쳤다. 두 사람은 들판을 가로질러 벨의 나이 많은 다리가 허락하는 데까지 빠르게 말을 달렸다.

“끝내줘!”

로키가 대답했다. 미소가 로키의 입술을 스치고 지나갔다. 근 며칠 중 매우 드물게 있는 일이었다. 머리 속을 치고 들어오는 깨달음에 로키는 하늘을 향해 함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머지않아, 머지않아, 나는 자유의 몸이 될 거야. 로키는 생각했다.

로키가 머리를 돌려 오딘슨 쪽을 보았더라면, 오딘슨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 또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표정을 경이감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누가 알겠는가? 검은 옷차림을 차려 입은 푸른색 형체를 한 채, 손목과 목덜미의 고리가 드러나 보이는 부분으로부터 황금빛을 반짝이며 웃음 띠고 있는 로키의 모습이, 그저 오딘슨의 눈에 흥미로워 보인 것일 수도 있다.

두 사람은 또다른 벼랑 가장자리까지 말을 몰고 간 후 그 곳에서 잠시 쉬며 숨을 골랐다. 둘은 산 밑의 아름다운 풍경을 응시하며 시간을 보냈다. 푸른 색 절벽으로부터 폭포가 흘러 떨어지고 있었고, 그 곳에 드리운 안개가 공기 중으로 무지개를 던져 보내고 있었다. 모든 사물에서 생명의 냄새와 젖은 냄새가 났다. 로키는 그 냄새가 좋았다.

로키가 요툰인들 중에서는 가장 특권 계급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요툰헤임의 땅이 황량하고 가차 없기는 하지만, 요툰헤임도 한 때는 로키 같은 왕족이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로키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면, 별 생각 없이 그걸 손에 넣는 일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왜 좋아하는지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는 별로 없었다.

“또 말을 타러 나오고 싶어.”

로키가 말했다. 또 말을 타러 나오는 것이 오딘슨과의 동행을 수반한다는 점을 뒤늦게야 깨달은 로키는 제 스스로도 살짝 놀랐다.

토르 역시 얼떨떨한 것처럼 보였다. 폭포를 보다가 이 쪽을 향한 그의 두 눈이 커져 있었다. 그러더니 토르는 다시 평정을 되찾은 듯 자신 있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이지, 왕세자. 이 좋은 날씨가 계속되는 동안 만큼은 날을 즐기자고. 곧 겨울이 닥쳐올 거고 그 때는 말 타는 것도 그렇게 즐겁지 않을 거야.”

“그래?”

로키는 시기를 가늠해 보았다. 마구라든지 말에 대해서 조금 더 배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최선의 도피로 또한 찾아야 했다. 계절이 너무 험해지기 전에 모두 완수해야 할 일들이었다.

“그럼 할 수 있을 때 계획을 짜야겠군. 다른 일이 없다면, 내일은 어때?”

“내일도 더할 나위 없이 좋지.”

토르가 미소를 지었다. 멍청하고, 희망에 찬 바보 같으니.

로키는 그 멍청한 야수에게 연민을 느낄 뻔 했다. 거의.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따라 말을 몰고 내려왔고 성으로 돌아갔다.

그 날 저녁 목욕을 하기 위해 옷을 벗던 중, 로키는 가죽 바지가 끈적끈적한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리 사이에 손을 가져가 보자, 손가락에 붉은 색 피가 묻어 나왔다.

“헤임달?”

로키가 숨 막힌 목소리로 불렀다.

증기가 올라오는 욕조에 소금과 향유를 채워 넣고 있던 헤임달이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네, 왕세자님.”

“나…나 다친 것 같아.”

헤임달이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로키는 손을 들어 보였다.

“피가 나.”

“그러십니까?”

헤임달의 구름 낀 눈이 마침내 그 쪽을 향했다.

“어디에서요?”

로키는 수치심을 짓누르며 헤임달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말을 너무 힘껏 탔나 봐.”

두려움을 띤 로키의 어조가 살짝 높아졌다.

“어딘가 찔려서 상처가 났나 봐. 눈치도 못 챘어. 쑤시고 아픈 건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했지.”

“그건…왕세자님께선…. 아,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요.”

헤임달이 안심시키듯 입을 열었다가, 적절한 단어를 찾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이 어린 숙녀들이 처음 말 타는 걸 배우기 시작할 때 흔히 있는 일입니다. 레이디 시프에게 말 타는 법을 가르쳐 드릴 때도 그런 일이 있었지요. 안장이 격렬하게 들썩이는 통에, 음막이 찢어지신 것 같군요.”

로키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게 다야? 이런 망할. 죽기라도 하는 줄 알았잖아!”

아스가르드의 의술로 통용되는 그 어떤 것도 로키는 직접 마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괜찮으실 겁니다, 왕세자님. 다른 불편한 점이 있으신 것이 아니시라면, 그냥 잠깐 쓰라리고 말 겁니다. 이리 오시죠. 목욕을 하시면 좀 도움이 될 것 같군요.”

헤임달이 이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로키가 욕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도왔다.

뜨거운 물이 로키의 지친 몸을 감싸 왔다. 쑤시는 몸에 물이 닿는 감각에 로키는 숨을 흡 들이켰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막이 찢어진 것이 차라리 잘 된 일일 수도 있다. 이제 적어도 오딘이 에시르 산파들에게 로키를 진찰해 보라고 시킨다 해도, 로키의 몸이 그들에게 거짓말을 드러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오딘슨에게 이 일을 보고해 줄 생각이야?”

로키가 물 위에 시선을 둔 채 헤임달에게 물었다.

헤임달이 콧방귀를 꼈다.

“그럴 리가요. 왕자님께서는 이런 사적인 일을 아실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헤임달이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왕세자님께서 왕자님의 말들 중 하나에 처녀성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재밌어 하실지도 모르겠군요.”

로키는 헤임달 쪽으로 목욕물을 튀겼다. 헤임달이 소리 높여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소리 절대 하지 마! 맹세해!”

“맹세하지요. 맹세하겠습니다.”

헤임달이 여전히 웃음 띤 채 대답했다.

다음 날 수업에서 로키는 중요한 가르침 몇 가지를 더 배웠다. 로키는 자기 자존심이 걸린 문제인 척 하면서, 도움의 손길 없이 혼자 벨 위에 올라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오딘슨은 마구간 구석에 쌓여 있는 나무토막들이 그 목적으로 있는 것임을 알려 주었다. 로키는 말의 굴레와 안장에 순수하게 관심 있는 척을 했고, 당연히도 토르는 기꺼이 그 마구들을 벨에게 제대로 채우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 말에 관한 문제가 해결됐다고 해도, 여전히 성문을 통과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교묘한 질문들을 몇 가지 던진 덕분에 로키는 성문이 꽤 여러 군데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토르는 주로 특정 한 곳의 성문으로 다니는 것을 선호한다고 했는데, 다른 문들보다 훨씬 사람이 덜 붐빈다는 이유였다. 그 동쪽 대문은 납품물을 가지고 온 상인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밤낮으로 내내 열려 있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오딘슨이 그 모든 이야기를 줄줄 털어놓는 동안, 로키는 그 정보를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머지않아 있을 탈출을 위한 정보들이었다. 너무 자신의 문제에 마음이 쏠려 있었던 덕분에, 로키는 정오가 될 때까지 오딘슨의 안장 옆에 묶여 있는 꾸러미들을 눈치채지 못했다. 토르가 그늘진 부드러운 잔디밭 한가운데 스톰브레이커를 멈춰 세웠다.

“여기서 내릴까?”

“왜 내려?”

로키가 벨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식사를 하러.”

토르가 말에서 내려오더니 안장에 달린 주머니를 풀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두꺼운 담요와 조그만 음식 바구니가 담겨 있었다.

“바깥에서 점심을 먹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자신의 주적이자 감금자인 오딘슨과 소풍을 즐긴다는 것이 터무니없게 느껴졌지만, 로키는 억지로 웃으며 말에서 내렸다. 이 에시르 왕자가 자신의 계획을 의심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정말 좋은 생각인걸.”

로키는 또 양고기나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넌더리가 밀려오는 것을 감추려 애썼다. 음식은 분명히 식어 있을 것이 틀림 없었다.

토르가 바구니 뚜껑을 열었을 때, 그 속에 요툰인의 입맛에 맞는 진미들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로키가 얼마나 놀랐을지를 상상해 보라. 설탕을 뿌린 과일, 향기로운 녹색 잎이 얹혀 있는 하얀 생선 조각, 꿀에 적셔 견과를 얹은 케이크, 그리고 로키가 어린 시절 가장 좋아하던, 소금으로 간을 하고 기름을 뿌린 후 아삭한 봄양파 조각으로 마무리한 물냉이도 있었다.

붉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는 로키를 오딘슨이 초조하게 바라보며 설명을 더했다.

“요리사들에게 요툰 식 요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어. 요리사 중 한명이 전쟁 당시에 요툰에 전쟁 포로로 잡혀갔었는데, 그 때 그 곳의 요리 방법을 접했다고 하더군. 재료 몇 가지는 아스가르드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이라, 아주 똑같지는 않을지도 몰라. 그래도….”

토르가 열심히 안장 가방에서 와인을 담은 가죽부대를 꺼내기 시작했다.

“입맛에 조금이라도 맞았으면 좋겠군.”

로키는 마침내 할 말을 찾았다.

“맛있어 보이는걸.”

로키는 바닥에 펼쳐진 담요 위에 다리를 꼬아 앉은 후 열망 어린 눈으로 음식을 응시했다. 이 야수가 로키로부터 얼빠진 칭찬 같은 것을 기대할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 로키는 말을 덧붙였다.

“고마워. 나 때문에 그런 고생을 할 필요는 없었는데.”

“내가 고생한 일은 없어. 요리사들이 힘든 일은 다 했지.”

토르가 가방으로부터 식기구 두 묶음을 꺼내 왔다.

“그리고 음식 맛이 탐탁치 않거든, 부디 그 사람들에게 불가능한 임무를 지워 준 날 원망해 주었으면 좋겠군.”

토르는 로키에게 나무로 만든 포크와 나이프를 건넸다. 로키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을 띤 채 그것을 받아 들었다.

“내가 예전에 쓰던 것과 무척 비슷한 걸.”

로키가 경탄하듯 말했다.

“그렇지. 아까 말했던 그 요리사가, 상류 계급의 요툰인들은 주로 나무로 만든 수저로 식사를 한다고 알려 주더군. 주방에서 크기가 적당한 나무 도구들을 찾을 수가 없어서, 내가 직접 깎아서 만들었어.”

토르는 담요 위에 자기 식기까지 마저 놓은 후, 가까운 나무에 말 고삐를 매달기 시작했다.

“어서 먹어 봐!”

하지만 로키는 먹는 대신, 손에 붙잡은 조그만 수공예 식기구를 뜯어 보았다. 오딘슨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자, 조그만 결함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포크날은 고르지 않았고, 나이프 손잡이는 일직선에서 약간 엇나가 있었다. 요툰인들 사이에서 목각 기술은 아주 고급 예술으로 칭송되곤 했다. 기나긴 겨울철을 조금이나마 쓸모 있는 활동으로 채워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로키의 손에 쥐여 있는 이 조그만 도구들은 로키의 기준을 통과할 만한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식기구들을, 그 기특한 시도를 보자, 왠지 따스한 감정이 느껴졌다. 로키는 그 식기구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모든 어설픈 결함들을 하나하나 머리 속에 기억해 보려 했다.

“내가 뭔가 실수한 부분이 있나?”

토르가 돌아오더니 로키가 음식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토르는 에시르 방식대로 기도하듯 두 무릎을 꿇고 자리에 앉았다.

로키가 황급히 나무 포크와 나이프에서 눈을 들었다.

“아니야, 그저….”

로키는 움직이지 않고 있던 이유를 생각해 내려 애썼다.

“그저…같이 음식을 맛봐야 할 것 같아서. 그게 예의일 테니까.”

“그래, 그렇지.”

토르가 자기 포크를 생선 조각에 꽂아 넣더니 어색하게 입으로 가져갔다.

로키도 조심스럽게 한 입을 베어 물었다. 로키의 고향에서 먹던 생선과 완전히 같은 맛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비슷했다. 그리고 적어도 양고기는 아니었으니, 크나큰 발전임에는 틀림 없었다. 간도 적절히 되어 있었고, 너무 많이 익히지도 않았다. 꽤나 괜찮은 식사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와중에 토르의 포크에 꽂힌 생선 조각이 불안하게 떨리더니 담요 위로 떨어졌다. 토르가 얼굴을 찌푸렸다.

“미안하군.”

토르가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포크로 생선 조각을 찍어 보려 시도했다. 그 생선은 더 잘게 부스러지고 말았다.

“이런 방식으로 식사를 해 본 적이 별로 없어서.”

로키는 입을 가리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았다.

“그럼 왜 포크를 사용하는 거야? 그냥 평소처럼 손으로 먹으면 되잖아.”

로키는 케이크를 한 포크 가득 떠서 입에 밀어 넣었다. 아, 그렇지. 혀 위에서 꿀이 사르르 퍼져 나갔다.

“당신 사람들의 음식을 제대로 된 방법으로 먹어 보고 싶었어. 그럼 당신 마음도 조금 더 편해질 지도 모르니.”

실패한 음식을 담요에서 쓸어내 버린 후, 토르는 생선 대신 과일 조각을 포크에 꽂았다. 토르가 과일을 입 가까이 가져가다가 다시 슬며시 내려 놓았다.

“혹시 그런 어설픈 시도를 하는 것도 모욕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군. 사과하지, 왕세자. 내가 뭘 하든 당신에게는….

“맙소사, 조바심 내는 건 그쯤 해 둬.”

로키가 눈알을 굴렸다.

“네 연약한 감정을 걱정할 필요 없이 식사를 즐길 수 있게 해 주면 안 돼?”

오딘슨이 로키를 빤히 쳐다보더니, 마침내 과일 조각을 입에 집어 넣었다.

“그렇지. 미안하군. 내 걱정을 상대해 달라고 물어보는 것은 그만두도록 하지.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아니니까.”

“아니고 말고.”

저급한 식사 동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로키는 식사를 즐기려 노력했다. 이 더러운 에시르 왕자가 상류층 서리 거인들처럼 식사를 하려 노력하고 있다니! 로키는 이 야만인에 대한 자신의 속내를 확인하기 위해, 음식 씹는 것을 멈추고 눈을 들어 토르의 모습을 제대로 눈여겨보았다.

오딘슨의 짐승 같은 면모를 찾으려 하고 있다 보니, 그제서야 로키는 오늘 이 자가 이상하게도 꽤나 괜찮은 차림을 하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딘슨의 가죽 승마복은 말끔하게 닦고 광택을 내 번드르르하게 어두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신고 있는 부츠 역시 말끔하게 광이 났다. 망토는 늘 입던 것 같은 붉은색이었지만, 이전에 걸치고 있던 해진 천쪼가리가 아닌 새 것처럼 보였다. 망토는 한쪽 어깨에 보기 좋게 주름 잡혀 얹혀져 있었다. 그 짐승의 노란색 머리카락마저 평소와는 다르게 가다듬어져 있었다. 머리 한 쪽 다발이 뒤로 매끄럽게 묶여 있었고 나머지 머리카락들은 얼굴 쪽으로 느슨히 흘러내렸다.

오늘 승마를 위해 멋지게 치장하고 나온 것처럼 보이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 생각에 로키는 목이 막힐 뻔 했다. 이 야만인이 좋은 인상을 보이려 노력할 이유가 뭐가 있다고? 오딘슨은 이미 오래 전에 그 기회를 잃었다.

로키는 오딘슨이 해초 더미를 포크 위에 똑바로 올려놓으려 애쓰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돌대가리 같으니라고. 입에 넣는 것보다 바닥에 흘리는 것이 더 많을 것 같았다. 가장 맛있는 음식을 버리는 꼴이란!

“여기, 이렇게 해 봐.”

로키는 자기 포크를 검은색과 녹색의 해초 더미 속으로 밀어 넣은 후, 포크를 한 쪽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포크 주위로 물냉이가 보기 좋게 뭉쳐졌다. 로키는 포크를 들어 올려 얼마나 쉬운 일인지 오딘슨에게 보여 주었다.

“정말로 영리한 걸.”

토르가 이렇게 말하더니, 로키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했다.

로키는 샐러드를 입 안에 밀어 넣었고, 기운을 북돋아 오는 듯한 그 맛에 잠시 기분이 좋아졌다. 로키는 입 안에 있는 걸 삼킨 후 대답했다.

“내가 발명한 방법도 아닌데 뭐.”

“나도 알아.”

토르가 입에 샐러드를 가득 문 채 대답했다가, 손을 들고 입을 가려 때늦은 예의를 선보이며 말을 더했다.

“누가 생각해낸 것이든 간에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을 것 같군.”

입을 가린 손 너머로 토르의 미소가 엿보였다.

로키는 속 터지는 한숨을 푹 내쉰 후 샐러드를 더 먹었다. 토르는 가죽 부대에서 와인을 쭉 들이키더니, 팔로 입을 닦고 가죽 부대를 로키에게 건넸다. 로키는 오딘슨이 이미 입을 댄 음료에 자기 입술을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 망설였지만, 좋은 와인을 맛보는 것이 그 지각 없는 행동을 충분히 보상해 줄 것이라 판단했다. 두 사람은 가죽 부대를 몇 번이고 왔다 갔다 건네며 와인을 마셨다. 부드럽고 그늘진 협곡의 잔디밭 위에서, 둘은 편안한 침묵 중에 먹고 마시며 한 시간 가량의 시간을 보냈다.

이런 평온한 환경이라면, 귀중한 물건 하나를 요청해 보기에도 적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키에게는 여전히 바이프로스트의 문지기에게 치러 줄 요금이 필요했다. 로키는 와인을 더 마신 후 가죽 부대를 토르에게 건네 주며, 두 사람의 손가락이 잠깐 스치도록 놓아 두었다.

“생각을 해 봤는데.”

로키가 말을 꺼냈다.

“내게 선물 같은 걸 하나 전해 주는 건 어떨까? 네가 네 반려에게 정말로 푹 빠져 있다는 걸 네 아버지와 가신들에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물건으로 말이야. 당신 종족의 풍습이 그러하니까.”

토르가 가죽 부대를 입에 가져가는 대신, 그 거짓 푸른색이 녹아 든 두 눈으로 가죽 부대 너머를 빤히 응시했다.

“선물이라고?”

토르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우리 속임수를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지.”

로키가 대답했다.

토르는 그저 자기 손에 들린 가죽 부대를 향해,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담요 쪽으로, 음식이 몇 점밖에 남지 않은 빈 바구니 쪽으로 눈을 끔뻑거릴 뿐이었다. 마침내 토르의 시선이 케이크 그릇 안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나무 식기구 쪽을 향했다.

“이것이 당신을 위한 선물이었는데. 그다지….”

수염 밑으로 토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나…?”

“아….”

로키는 화들짝 놀랐다. 오늘 이 모든 일을 선물이라 생각하고 준비한 거라고? 로키를 위한 선물이라고?

“아니, 내 말은…식사는 정말 좋았어. 그리고 이것도….”

로키는 그렇게 말하며 나무 포크를 집어 들었다.

“이것도 정말 고마워. 진심이야. 하지만….”

“요툰에 대해서 좀 안다는 교사들에게 죄다 물어 봤는데….”

토르가 계속해서 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요툰인들은 황금이나 은을 보면 비웃는다고 말해 주더군. 루비 보석 같은 걸 선물해 주는 건 뺨을 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도 말이야. 그래서 당신이 좋아할 만한 걸 줘야겠다고 생각했어. 당신 사람들의 관습에 맞춰서 말이야….”

토르는 바람 빠진 가죽 부대를 담요 위에 놓더니, 두 손을 주먹 쥔 채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내가 실수를 범했다면 부디….”

“아니야.”

로키가 불쑥 말했다.

“오늘 하루는…나쁘지 않았어. 나는 그저…뭔가 과시할 수 있을 만한 물건을 받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로키는 말을 멈췄다. 자기가 왜 토르의 자존심을 달래 주려 애쓰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일은 현실적인 문제였다.

“당신네 사람들은 이 선물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이 음식과, 식기구, 그리고 말 타는 것…. 이런 것들이 내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지. 네가 설명해 준대도 마찬가지일 거야. 내게 뭔가를 공개적으로 선사해야 해. 그 치들의 기준에서 매우 명확한 물건으로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새로운 반려에게 흥미를 잃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걸. 그렇게 되면 안 되잖아. 그렇지?”

오딘슨이 눈썹을 찌푸렸다.

“안 되겠지.”

그러더니 오딘슨이 남쪽으로 고개를 돌려 먼 곳을 응시했다.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어떤 소리를 쫓는듯 했다.

“말을 슬슬 준비해야겠군. 폭풍우가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어.”

로키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비 올 기색이라고는 없는 걸.”

로키는 이 야수가 그저 자기 곁을 얼른 떠나려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냄새가 느껴지지 않아?”

토르가 남쪽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하지만 로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맑은 하늘과 숲 속 나무들 뿐이었다.

“저기, 바람 위로 말이야.”

로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 야만인이 이만 떠나야겠다고 생각한다면, 떠나 주는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로키는 음식 바구니와 나무 식기를 집어 든 후 토르가 안장 주머니에 다시 짐을 챙겨 넣는 것을 도왔다. 정리를 끝낼 무렵, 검은색 소나기구름이 태양을 가려오기 시작했다. 저만치에서 들쭉날쭉한 번개가 번쩍였다.

“놀랍군.”

로키가 폭풍의 차가운 바람 사이로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알기도 전에 날씨를 감지해 낼 수 있나 보네.”

“마법은 아니야. 그게 당신이 생각하는 거라면 말이지.”

토르가 스톰브레이커에게 묶인 짐을 끈으로 단단히 죄었다.

“수 년 간 폭풍을 내 곁에 가까이 두고 지냈던 덕이야. 그럴 의향과 시간만 있다면 누구든 충분히 배울 수 있는 일이지.”

토르가 하늘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짐작컨대, 저 폭풍우보다 더 빨리 말을 달릴 수는 없을 것 같군. 비를 피할 곳을 찾아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뭐라고?”

로키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조그만 빗줄기일 뿐이잖아. 늘 그렇게 골칫거리가 생길 기색이 보이자 마자 일단 숨으려 드는 거야?”

그 때, 번개 줄기가 하늘을 둘로 갈라 오며 태양을 부끄럽게 할 정도의 불빛을 쏟아 냈다. 로키는 우렁찬 천둥 소리에 펄쩍 뛰었다.

토르는 웃음을 참으려 애를 쓰는 것처럼 보였다.

“흠뻑 젖은 채로 성에 돌아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로키는 벨의 튼튼한 옆구리에 손을 올려 놓으며 대답했다.

“글쎄, 이 나이 많은 말을 감기 들어 고생하게 만들 수는 없지. 비를 피할 곳을 찾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토르는 이 지역을 잘 아는 것 같았고, 두 말을 이끌고 나지막한 동굴로 향했다. 사실 동굴이라기보다는 바위 몇 개가 위에 살짝 걸쳐져 있는 지대에 지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비에 젖지는 않게 해 줄 것 같았고 바람도 막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로키는 등을 기대고 앉을 수 있는 가장 납작한 바위를 찾았다. 바위 위에 자리를 잡은 채, 로키는 토르가 말 두 마리를 단단히 붙들고 말들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며 진정시키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빗줄기가 갑자기 허공에 드리운 돛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로키는 풀밭 위에 웅덩이가 생겨 옆의 웅덩이와 한 데 합쳐지더니 곧이어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 내려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번개는 어마어마했다. 얼음같이 하얀 번개 불꽃이 구름 중간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며 우레 같은 천둥 소리의 도래를 알렸다. 물론 로키도 눈보라와 눈폭풍우에는 익숙했지만, 비는 뭔가 또다른 이국적인 느낌이었다. 빗줄기의 그 변덕스러운 천성과 잔혹한 아름다움을 로키는 멍하니 감상했다.

토르 역시 스톰브레이커의 등에 팔 하나를 기댄 채 빗줄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번 계절에 마지막으로 보는 비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군.”

토르가 입을 열었다.

“이제 추워지고 있어. 느껴져? 며칠만 지나면, 아니 어쩌면 당장 오늘밤부터라도 눈이 오는 것을 볼 수 있겠어.”

“그렇게나 빨리?”

로키가 물었다. 토르의 말대로 폭풍우와 함께 싸늘한 기운이 닥쳐오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른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숨결이 입술 앞에서 옅은 안개가 되어 나오고 있었다. 계획을 조금 더 서둘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계절이 빠르게 바뀌는 것이 가능한 줄은 몰랐군.”

토르가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손을 올려 붉은 망토를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왕세자. 잠깐 실례해도 괜찮다면, 잠시 당신을 여기 두고 나가 보아야 할 것 같군.”

토르가 말했다.

“나가 봐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 

로키가 물었다.

오딘슨은 설명을 덧붙이는 대신, 망토를 접어 말등 위에 올려 놓더니 가죽 튜닉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튜닉이 벗겨져 나가는 모습에 로키는 황급히 눈을 돌렸다. 저 끔찍한 작자가 대체 뭘 하는 거지? 자신의 눈 앞에서 저렇게 옷을 훌렁 벗다니! 저런 천박한 행위는 요툰헤임에서는 절대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곳은 요툰헤임이 아니었다. 이 곳은 비에 흠뻑 젖어든 아스가르드였고, 오딘슨은 허리 위로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로 조그만 동굴을 빠져 나가 폭풍우 한 가운데로 향하기 시작했다.

“미쳤어?”

로키가 뒤에서 소리쳐 불렀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토르는 솟아 오르는 물줄기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노란색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 어두운 빛깔을 띠었고, 우유빛의 피부는 번들번들해져 있었다. 몇 미터 더 걸어간 후 멈춰 서더니, 토르는 거기 그냥 서 있었다. 로키는 잠깐 그가 숲 속의 무언가를 살피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머지않아 토르는 맹렬한 폭풍우를 향해 고개를 들어올린 후 비를 기꺼이 맞아들이기 시작했다. 성스러운 의식이라도 치르듯 토르의 두 눈은 감겨 있었다. 로키는 그를 방해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토르가 그저 그 곳에 서 있는 동안 로키는 그저 지켜 보고만 있었다.

그 의식은 날씨가 가장 최악에 달한 시간 동안만 지속되었다. 마침내 거센 바람을 마주한 폭풍우가 북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고, 다시 태양이 떠올랐다. 토르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숲 또한 물에 흠뻑 젖은 채 고요하기만 했다.

하늘 쪽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인 후, 토르가 다시 동굴 아래의 쉼터로 돌아왔다. 토르는 망토를 집어 들어 젖은 얼굴을 닦아냈다.

“미안하군. 분명 이상해 보였겠지. 하지만 다음 봄이 올 때까지 빗줄기를 느낄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토르가 말했다.

로키는 그를 찬찬히 뜯어 보았다.

“폭풍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더 이상 폭풍을 통제할 수 없잖아. 당신의 존재와 상관 없이 폭풍우가 내려치고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마음 아프지 않아?”

토르가 다시 옷을 꿰어 입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 능력을 잃었을 때에는 그랬지. 하지만 내가 더 이상 폭풍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야, 진정으로 그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이전에는 그러지 않았지. 하지만 천둥을 빌리는 것은 그저 내게 허락된 특권이었을 뿐이었어. 나는 언젠가는 그 특권을 되찾기를 기도하고 있고, 그 날이 온다면, 앞으로는 결코 그것이 내 마땅한 권리라는 착각은 하지 않을 거야.”

토르가 망토를 어깨 위에 올려 놓던 손길을 멈추고 물었다.

“춥지는 않나? 원하면 이걸 주도록 하지.”

공기가 차갑기는 했지만 로키는 춥지 않았다.

“고맙군. 하지만 괜찮아. 성으로 돌아 가자고.”

그래서 그들은 성으로 돌아갔다. 말을 타는 동안 로키에게는 생각할 거리들이 많았다. 도피 계획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감금자에게서 발견한 새로운 일면이 있었던 것이다. 비를 사랑하는 야수라니.

그날 저녁 헤임달이 로키의 방을 찾았을 때, 로키는 막 침대에 들 옷차림으로 갈아 입으려던 참이었다.

“왕세자께서 올파더의 연회장에 참석하기를 왕자님께서 요청하셨습니다. 오늘 성의 가신들 몇 명이 왕실의 가족과 식사를 들 예정입니다. 그 분들 앞에서 토르 왕자님이 선사해 주실 선물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마침내 내 선물을 대령하는군. 로키가 생각했다.

“길을 안내해 주게.” 

로키가 말했다.

그날 밤 올파더의 식사 테이블은 아름답게 차려 입은 가신들과 왕실 고문들로 잔뜩 채워져 있었다. 그들 모두 자신네들 왕의 관심을 얻으려 열심히 애쓰고 있었다. 헬라 역시 그 곳에 있었지만, 헬라는 자기 와인 술잔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헬라는 로키가 들어오는 쪽으로 눈길조차 주지도 않았다. 반면 토르는 곧장 로키 쪽으로 손을 흔들며 자기 옆자리로 오라고 불렀다.

로키가 다가오는 동안 오딘슨이 몸을 일으켜 그 자리에 서 있더니, 테이블 위로 주먹을 쿵 쳐 보였다. 대화소리가 곧바로 잦아들었고, 사람들의 시선이 에시르 왕자 쪽으로 집중되었다.

“왕실의 반려이자 제 총애하는 비를 위해서, 제 충절을 상징하는 물건을 선사하고자 합니다.”

오딘슨이 이렇게 말하더니, 망토 안쪽에서 은색 끈이 달린 조그마한 벨벳 주머니를 꺼내 로키의 손 위에 올려 놓았다.

로키는 예의 바르게 선물을 열어 보았다. 순금으로 만들어진 뒷발로 일어선 말의 형상이었고, 말의 안장 부분은 사파이어로, 두 눈은 루비로 장식되어 있었다. 번쩍거리는 빛을 내는 천박하기 그지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 말의 형상이 자신의 자유를 위해 톡톡이 값을 치러 줄 것이라는 생각에, 거짓 기쁨을 흉내내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너무 아름다워.”

로키가 토르에게 말했다.

“정말 고마워.”

“반려에게 선물을 선사해 주는 것은 무척이나 좋은 관습이지.”

오딘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행복한 반려는 네게 많은 아들들을 선사해 줄 것이 틀림 없다.”

“아들들을 위해!”

테이블 한 쪽에 앉아 있던 가신들이 외쳤다. 그들은 들고 있던 잔을 들어올려, 올파더의 손주들을 위해 엎치락덮치락하며 과장스럽기 짝이 없는 건배를 해 대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운 중에 토르가 로키 쪽으로 가까이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뻔해 보일까?”

“충분하고 말고.”

로키가 역시 속삭여 대답했다.

오딘슨이 미소를 지었다.

“이런 물건이 당신 취향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 승마 수업을 생각나게 해 줄 수는 있겠지.”

로키는 눈을 깜빡였다. 토르는 정말로 이 저속한 물건 교환식마저도 로키를 구워삶을 기회로 탈바꿈 시켜 놓으려는 셈인가?

“그래. 그렇겠지.”

로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로키는 새침한 체 하려 애쓰며 시선을 아래 쪽으로 향했다.

“이제 방으로 돌아가도 될까, 오딘슨?”

로키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나도 당신과 함께 이만 떠나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군. 아버지?”

토르가 요청하듯 오딘 쪽을 쳐다보았다.

왕이 손짓으로 두 사람을 물렸다.

“그래. 가 보거라. 선물을 즐겨야지. 네 두 사람 다 말이다.”

로키는 역겨움이 밀려 올라오는 것을 겨우 참아 눌렀다. 토르가 로키의 팔꿈치를 붙잡아 길을 인도했다. 테이블 끝에 앉아있는 헬라 쪽을 지나칠 때, 헬라가 로키를 향해 재는 듯한 눈길을 던져 보였다.

헬라가 의심하고 있나? 헬라가 아는 걸까?

로키의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 나올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겨울이 도래하고 있었고 헬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로키는 지금 행동해야 했다. 지금 당장. 오늘 밤 당장. 도망치기에 이것보다 더 적절한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말, 성문, 빠져나갈 길, 뇌물, 그리고 대장장이에게 줄 은화까지. 로키는 그저 한밤중에 방을 떠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로키의 방. 닫자마자 잠겨 버리는 문으로 가로막혀 있는 방.

로키는 오딘슨 쪽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이제 거의 로키의 방에 이르렀다. 로키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재빠르게. 로키의 마음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이번에는 무슨 거짓말을 꾸며내야 할까?

로키는 방문 앞에 이른 후 토르가 문을 열쇠로 따는 모습을 응시했다. 토르가 벨트에 매달려 있는 주머니에 열쇠를 다시 집어 넣는 것을, 로키는 신중하게 눈여겨 보았다.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오고 방 문이 닫히고 난 후, 로키는 이번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용기를 끌어 모았다. 로키는 오딘슨 쪽으로 몸을 돌린 후, 그를 강하게 끌어 안아 두 사람의 몸을 밀착시켰다.

“무슨….”

오딘슨이 얼어붙었다.

“왕세자, 괜찮은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로키가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이 감금 생활은 정말로 고문 같았어. 하지만 지난 며칠 동안 당신과 보낸 시간은…무척 즐거운 시간이었어.”

최고의 거짓말에는 한 줄기 진실 역시 깃들어 있는 법이다. 로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겠지.”

“아니, 아니, 결코 그렇지 않아.”

오딘슨의 두꺼운 팔이 위로 올라오더니 로키를 마주 감싸 안았다.

“충분히 이해해. 내가 했던 그 모든 말과 행동을 생각해 보면…우리 왕국이 당신에게 행한 일을 생각해 보면…. 당신 곁에 내 동행을 허락해 주는 것마저 너그럽게 느껴지는군.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 건 내 쪽이야.”

로키는 토르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 후, 웃음을 지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로키의 손가락 안에는, 친밀함을 핑계삼아 토르의 주머니에서 훔쳐낸 열쇠가 쥐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비긴 걸로 하지.”

로키가 이렇게 대답하고는, 토르의 어깨 너머를 향해 고갯짓을 해 보였다.

“실내복으로 갈아 입는 동안 잠깐 뒤돌아 있어 줄 수 있어?”

“물론이지!”

토르가 얼른 몸을 돌려 방구석을 마주했다.

로키는 그 기회를 타 베갯잇으로 조그만 꾸러미를 만들기 시작했다. 은화와, 금으로 만든 말의 형상, 그리고 열쇠까지. 로키는 잠시 망설였다가, 그 꾸러미에 토르가 손수 조각해 준 나무 식기구 또한 추가했다. 그리고 로키는 곧장 떠날 수 있기 위해 다시 승마복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토르가 벽에다 대고 입을 열었다.

“내일도 날씨가 사납다면, 내일은 나와 동행해 성 내부를 구경하는 것은 어떨까? 당신이 흥미로워 할 만한 방들이 몇 개 있거든.”

“좋은 생각인 것 같네.”

하지만 로키는 꾸러미를 침대 시트 밑에 숨기느라 바빠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목 아래까지 단단히 이불을 둘러싼 후, 로키는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다 됐어. 그럼 이만 좋은 밤 되길.”

로키는 언제나처럼 토르 쪽으로 베개를 던져 주었다.

토르가 몸을 돌리더니 바닥에서 베개를 주워 들었다.

“그래, 내일 보도록 하지.”

토르가 양초를 불어 끄더니 돌바닥 위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로키는 오딘슨의 조용한 코고는 소리가 방 안을 채울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난 후 로키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자기 물건들을 모아 들었다. 아직 불씨가 남은 벽난로 속 장작이 방 안으로 따스한 불빛을 비추이고 있었고, 그 불빛 아래 입술을 살짝 벌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채 잠에 들어 있는 토르의 얼굴이 보였다. 로키는 그 모습을 쳐다보느라 잠깐 시간을 낭비했다. 물론, 토르가 깊게 잠들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떠나기 전에 베개로 질식시켜 버리는 것이 좋을 텐데. 로키는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조금 더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그만 자’ 로키는 잠들어 있는 오딘슨을 살해하지 않았다. 로키는 그저 오랜 찰나 동안 그를 바라 보았을 뿐이고, 열쇠로 잠긴 문을 연 후 깊숙한 밤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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