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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로키/번역]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 (7/16)

토르로키 / Thorki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왕세자와 야수)"

by triedunture


원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5267873


  • 작가님께서 번역은 출처를 포함하여 자유롭게 하라고 명시하셨습니다. (https://i.imgur.com/r6PfDqx.jpg)
  • 에시르 토르x요툰 로키 정략결혼 AU입니다. 구전동화 느낌이 살짝 끼얹어진 작품으로 이야기 중간중간에 화자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 로키를 비롯한 모든 요툰 종족은 인터섹스(자웅동체)라는 설정입니다. 엠프렉 언급이 있습니다.
  • 요툰헤임에는 성별의 구분이 없고 누구나 아이를 밸 수 있기 때문에, 어머니/아버지라는 단어 대신 (주로 동물 번식에서) 누가 씨를 뿌렸고 누가 새끼를 배었는지 칭하는 단어인 dam/sire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 단어들은 원문에서 사용한 의미와 가장 비슷한 단어인 '종빈/종모'로 번역합니다.



*    *    *



7장.


당신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아쉽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그 날 밤 로키는 토르와 침대를 함께 쓰는 것에는 승낙하지 않았다.

그 대신 로키가 좁은 쇼파나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자지 않도록, 헤임달이 토르의 방으로 작은 간이 침대를 들고 왔다. 글쎄, 간이 침대라고는 했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닐 수도 있다. 아스가르드 식으로 디자인된 물건이었는지라, 침대 다리에는 소용돌이 무늬의 나무 장식이 새겨져 있었고, 벨벳 술이 달린 쿠션도 얹혀져 있었고, 사람 한 무리를 한꺼번에 질식 시킬 수 있을 만큼 큰 베개 더미도 같이 딸려왔다. 그 침대가 제대로 된 침대라고 불리지 않을 이유가 있다면 그 크기와(딱 한 사람만 누울 수 있는 너비였기 때문에), 그 높이 때문이었다. 토르의 커다란 침대틀 밑에 밀어 넣을 수 있을 정도로 바닥과 딱 붙어 있는 낮은 침대였던 것이다.

“올파더의 호기심이 그 분의 분별력을 넘어서게 되실 지 모르니, 올파더께서 다시 문을 두드리시는 일이 있으면 얼른 침대를 숨기십시오.”

헤임달이 이렇게 설명했다.

로키는 그 호화스러운 간이 침대에 딱히 불평을 제기할 생각이 없었다. 로키는 잘 때도 최대한 따뜻할 수 있도록 침대를 최대한 벽난로 가까이 끌어다 놓았다. 이제 낮은 싸늘해져 가고 있었고, 밤에는 거의 얼어붙을 것 같은 날씨였다. 물론 아스가르드의 겨울은 요툰헤임의 겨울만큼 춥지는 않았다. 하지만 로키로서는 실망스럽게도, 겨울을 제외하면 보통은 따뜻한 날씨 덕에 에시르 족들은 성을 지을 때 단열에 대해서는 크게 고려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벽난로가 있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간이 침대도 모피와 담요로 뒤덮여 있어 아주 편안한 둥지 역할을 해 주었다. 로키는 잃어버린 몇 시간을 보상하기 위해 길게 푹 수면을 취했다.

함께 감금된 첫 며칠 동안 토르는 거의 잠만 잤다. 통증이 불타듯 쑤셔 오거나, 헤임달이 따뜻한 수프, 새 붕대, 로키를 위한 새 옷, 시원한 물 같은 것을 가지고 방에 들어올 때만 토르는 잠깐씩 깨어났다. 로키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기에, 로키는 자기를 둘러싼 새로운 환경을 마음속으로 차근차근 살피기 시작했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 방에 있는 가구 중에서는 로키의 간이 침대가 그나마 가장 화려한 물건이었다. 다른 왕족의 방과 비교해 보면, 토르의 사저는 수도승이 살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침대틀이 수공예로 조각한 것이기는 했지만, 토르는 세상에서 가장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물건들만 지니고 있는 듯 했다. 좁은 쇼파. 벽난로에 쓸 실용적인 철 부지깽이 세트. 깔개 몇 개. 의자 몇 개. 로키가 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몸단장 도구들이 갖춰진 세면대. 햇빛 광선을 본뜬 단순한 무늬가 새겨진 옷장.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옷장에는 붉은 망토와, 바지, 그리고 남색 아니면 검은 색조를 띤 튜닉들이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 방 안에서 사람의 개성을 드러낼 만한 요소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그림 한 점이라든지 왕실의 가보 같은 것도, 수집품도 하나 없었다. 책조차 한 권 없었다.

가장 마지막 사항은 로키로서는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 번 토르가 고통으로 힘겨운 신음을 내뱉으며 잠에서 깨어났을 때, 로키는 주저하지 않고 토르를 나무랄 기회를 선점했다.

“이봐.”

로키는 허리에 두 손을 올려놓은 채 침대 옆에 서서 말했다.

“대체 네 책들은 어디 놔 두는 거야?”

“내…뭐라고…?”

토르가 툴툴대며 상처가 너무 쑤시지 않도록 등을 대고 누울 수 있는 자세를 찾기 위해 고투하기 시작했다. 토르는 이마 위에 번들번들하게 맺혀 있는 땀방울을 손바닥으로 닦아 냈다.

“네 책 말이야! 시집? 소설집? 곰팡이의 번식에 관한 학술서? 네가 자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지루함을 타파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내겐 책이 없어.”

토르의 두 눈은 여전히 잠이 덜 깬 채 멍했다.

“책이 대체 왜 없다는 거야?”

로키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다.

“글자 못 읽어?”

“당연히 읽을 줄 알지.”

토르가 로키를 노려 보았지만, 병상에 누워 있는 그 애처로운 모습 덕에 딱히 위협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이 곳에서 책은 그렇게 가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약간…경박한 물품으로 여겨지지.”

로키는 숨을 헉 들이키며 손으로 심장 있는 쪽을 움켜 쥐었다. 잔인한 농담이 틀림 없었다! 아무리 토르네 종족 같은 야만인들이라고 할지라도, 어떻게 다른 것도 아닌 책을 경시한다는 거지?

“그러면 가르침은 어떻게 전하는 거야? 이야기는 어떻게 들려 주고? 여가 시간은 어떻게 보내고?”

로키가 재촉하듯 물었다.

토르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우리 아스가르드인들은 직접 행동하는 쪽을 선호해. 지식은 뭔가를 직접 해 봄으로써 얻을 수 있지. 견습생은 장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달돼. 대련장에서나 시합을 통해 여가 시간을 보내고. 마음이 정말로 내킨다거나, 너무 나이가 들어 다른 일을 할 기운이 없는 귀부인이라면 책을 읽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전사들이 자기 공간에 책을 가져다 놓는 건 매우 이상한 일로 받아들여질 거야. 왕자도 마찬가지고 말이지.”

“지금 책을 읽는 일이 남자답지 못하다고 받아들여진다는 헛소리를 하려는 거야?”

로키가 충격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믿을 수가 없군!”

로키는 방을 왔다갔다 하며 서성이기 시작했다.

“내가 만일 지금 이 순간 요툰헤임의 왕좌에 앉아 있었다면, 이 일만으로 아스가르드에 새로운 전쟁을 선포했을 거야!”

토르가 한숨을 내쉬더니 베개 위에서 몸을 뒤척였다.

“너무 과하게 반응하는 것 아니야?”

“아니거든!”

로키는 그 과한 반응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모습으로 자기 침대 위에 몸을 풀썩 집어 던졌다.

“난 지금 심각해. 용인할 수 없는 일이라고.”

로키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말하고는, 다시 몸을 뒤집어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그럼 난 대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뭘 해야 하지?”

“그냥…이야기라도 나누는 게 어때?”

토르가 제안했다.

로키가 고개를 들어 오딘슨을 노려 보았다.

“이야기라고?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거야?”

“나도 모르지.”

토르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눈을 돌렸다.

“당신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나는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로키가 투덜거렸다. 로키는 천장을 응시하며 머리 뒤로 손을 받치고, 두 사람에게 놓여 있는 선택지를 숙고하기 시작했다.

“책이 있다면, 네게 읽어 줄 수 있을 텐데. 내 조모 중 한 분께서 내가 어린 시절 아플 때마다 책을 읽어 주고는 하셨지.”

그 기억은 로키가 자기 가족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행복한 기억 중 하나였다. 라비크는 매우 선량한 노인이었고, 다른 몇몇 이들처럼 조그만 왕세자를 아주 애지중지해 주었다. 로키는 그 분이 너무도 그리웠다. 가끔 로키가 책을 읽을 때면, 그 책의 단어 하나하나가 라비크의 벨벳 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토르가 그 말에는 조용한 공감의 소리를 내 보였다.

“나 또한 어린 시절 병에 걸렸을 때면, 어머니께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바니르인들의 잠자리 동화를 들려 주셨지. 뭐, 괴물에 맞서 싸우는 기사, 그런 이야기 말이야.”

토르는 옆구리를 움켜쥔 채 몸을 움직이며 얼굴을 찡그렸다.

“당신 사람들의 동화를 내게 들려줄 생각은 없어? 요툰헤임의 동화 말이야.”

몸져누운 왕자를 즐겁게 해 주는 궁정 광대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한 불평이 가장 먼저 머리속에 떠올랐지만, 로키는 따분함으로 좀이 쑤시는 상태였다. 그리고 로키는 사실 자기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있는 것을 꽤나 좋아했다.

“알았어.”

로키는 이야기를 좀 더 잘 들려주기 위해 일어나 토르의 침대 발치 쪽에 걸터 앉았다.

“할 수만 있다면 대신 책을 보여 주었을 텐데. 책에 있는 삽화들이 또 묘미를 더해 주거든. 하지만 상관 없지. ‘지저분한 르볼프테르’ 이야기를 알아?”

토르가 잠깐 골똘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모르는 것 같군.”

그래서 로키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미 짐작 했겠지만, 그 이야기는 매우 지저분한 요툰인 젊은이, ‘지저분한 르볼프테르‘에 관한 이야기였다. 르볼프테르는 요툰인 전사들이 그래야 하는 것처럼 머리를 두피까지 밀지도 않았고, 그리고….

“잠깐만.”

토르가 끼어들었다.

“너도 머리를 안 밀었잖아.”

로키가 아스가르드에 처음 도착했을 때 턱선 정도까지 늘어뜨려져 있던 검은색 머리카락은, 이제 어깨에 닿을 만큼 길어 있었다.

“그래. 왜냐하면 난 전사가 아니기 때문이지. 적어도 아직은.”

로키가 숨을 턱 내쉬며 말했다. 이야기를 들려 주는 중에 딴 길로 새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그 동안 전장에 한 번도 출전해 보지 못했다는 사실과 미래 요툰헤임의 왕으로서의 권리를 부정당한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었는지를 굳이 설명해 주고 싶지 않았다. 로키는 머리카락 한 가닥을 귀 뒤로 넘겼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그렇지. 르볼프테르는 머리를 밀지도 않았고, 손톱을 손질하지도 않았다. 머지않아 르볼프테르의 손톱과 발톱은 독수리의 발톱처럼 자라났다. 르볼프테르가 길을 지나갈 때면 다른 요툰인들이 그를 향해 킥킥 웃어 댔고, 몸단장에 좀 신경을 쓰라고도 일러 주었다. 하지만 르볼프테르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르볼프테르를 협력자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르볼프테르의 손톱이 너무 길게 자라나 길을 가는 중에 가축들이 그 손톱에 궤뚫릴 정도였다. 그래서 르볼프테르의 발치에는 썩어가는 돼지 시체와 소 시체가 몇 주 동안이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불결한 기운이 그를 온통 둘러쌌다. 마침내 르볼프테르의 머리카락도 너무 길게 자라나 그의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나긴 손톱 때문에 르볼프테르는 자기 얼굴을 베지 않고서는 머리를 뒤로 넘길 수가 없었다. 마침내 르볼프테르는 길을 가던 중 앞에 있던 돌을 보지 못해 걸려 넘어졌고,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와중에 무기 같은 자기 손톱에 갈기갈기 찢겨 죽고 말았다. 이야기는 르볼프테르가 길 한가운데에 악취를 풍기는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르볼프테르의 몸을 피해서 지나가는 여행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르볼프테르의 지저분한 습관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이었는지에 대해 탄식을 표했다.

“그게 바로 요툰인들이 몸을 단정하게 가꾸는 이유지.”

로키가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토르가 한참 동안 침묵한 채 로키를 빤히 쳐다보았다. 토르의 창백한 얼굴이 녹색빛에 가까운 색을 띠고 있었다.

“대체 무슨 놈의 동화가 그 모양이야?”

토르가 마침내 이렇게 외쳤다.

“그런 이야기를 어린아이들에게 들려 준다는 말이야?”

“그럼, 그러고 말고.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잖아.”

로키가 눈을 깜빡거렸다.

“너무 무시무시한 이야기잖아!”

로키가 손가락 하나를 척 들어 보였다.

“하지만 효과는 뛰어나지. 너도 보면 알겠지만, 나는 내 손톱을 늘 말끔히 정돈해서 다닌다고.”

토르가 믿을 수 없다는 탄식을 뱉었다.

“그래. 당신에 대해서도 많은 걸 설명해 주는 교훈인 것 같군.”

로키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게 대체 무슨 뜻이야?”

“아무 것도. 그저…. 당신은 당신 외모에 관해 꽤 신경을 쓰는 편이니까.”

토르가 대답했다.

로키가 조소를 터뜨렸다. 저걸 모욕의 의미랍시고 하는 소리인가?

“그래, 당신과 비교하면 그런 편이지.”

“그건 대체 무슨 뜻이야?” 토르가 물었다.

“글쎄다, 넌 네 머리카락을 죄다 매듭을 지어 놓고 있잖아.”

로키는 토르의 머리 쪽을 향해 자기 잘 다듬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매듭이라니? 내 땋은 머리를 이야기하는 건가?”

토르가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올려 땋아 내린 황금색 머리카락을 만졌다가, 다친 팔을 들어올린 것 때문에 또 통증이 닥쳐 오는지 숨을 흡 하고 들이켰다.

“아스가르드인들은 보통 이렇게 머리를 땋아. 머리를 깔끔하고 걸리적거리지 않게 해 주지.”

“그래? 내 눈에는 엉망진창인 것처럼 보이는 걸.”

“아.”

토르의 입장에서 변호해 주자면, 토르는 늑대와 맞서 싸웠던 것 이후로 여전히 부스스한 상태였다. 머리카락은 평소보다 더 헝클어져 있었고, 땋은 머리로부터 머리털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사방으로 뻗쳐 나가고 있었다. 토르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정돈해 보려 손을 들어 올렸지만, 아무 소용 없는 일이었다. 토르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지르며 손으로 옆구리를 움켜 쥐었다.

로키가 눈썹을 찌푸린 채 그 쪽으로 다가갔다.

“왜 그래?”

토르가 그 생고생에 숨을 헐떡이는 동안, 그 기묘한 푸른 눈에 눈물이 차 올랐다.

“유감스럽게도 내 모습을 조금 더 단정하게 꾸밀 수는 없을 것 같군. 내 가슴보다 높이 팔을 올릴 수가 없어.”

“멍청이 같으니라고.”

로키가 으르렁대며 토르의 손목을 붙잡아 다시 침대 위로 꼼짝 못하게 고정시켰다.

“그 새둥지 같은 머리는 지금 당장은 잊어버려. 몸이 치유되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렇게 이상해 보여?”

토르가 조용히 물었다. 푹 숙인 채 다리 쪽을 향하고 있는 토르의 시선이 위로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로키의 마음이 살짝 누그러졌다. 두 사람의 입장이 반대였다면 (그 위험한 숲 속에서 거의 그렇게 될 뻔 했다), 로키는 자기가 그런 형편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그에 대해 할 수 있는게 없다는 것에도 치가 떨릴 것이다.

“다음 번에 헤임달이 올 때 머리를 좀 만져 달라고 하면 어때.”

로키가 제안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토르가 이렇게 대답했지만, 그 표정은 여전히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로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머리 땋을 줄 모른단 말이야. 알았으면 도와 줬을 텐데.”

“머리를 새로 땋아 줄 필요는 없어.”

토르가 재빨리 말했다.

“오랫동안 침대에 갇혀 있어야 하는 상황이니 오히려 그냥 풀어 놓는 편이 낫겠지. 단지, 이런 상태로는 머리 빗질조차 못 해서 말이야.”

대 놓고 물어보지는 않았음에도, 토르의 두 눈에는 로키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가슴 저미는 간청이 담겨 있었다. 얼음 고양이들조차 이 에시르 놈에게 상대가 못 될 것 같았다.

로키는 눈알을 굴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빗은 어디 있어? 세면대에?”

로키는 빗을 찾으러 그 쪽으로 갔다.

“그래, 거기 면도칼 옆에.”

토르의 표정이 환해졌다.

“고마워. 그렇게 해 주겠다니 정말로 관대하군.”

“공적인 이익을 위한 일이라고 여겨.”

로키는 내뱉었다. 물론 토르나 토르의 머리가 수 일 동안은 공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낼 일이 없다는 사실은 둘 다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로키가 토르의 머리를 빗어 주는 동안 토르가 편하게 앉아 있을 방법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음에도, 두 사람은 최선을 다했다. 토르는 앞으로 몸을 숙인 채, 무릎에 팔을 두르고 그 위에 턱을 올려 놓았다. 토르를 그 자세로 앉혀 주는 데까지도 꽤나 오래 걸렸다. 토르는 그러는 내내 조그만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었지만, 로키가 그냥 관두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물어보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마침내 로키는 침대 위 토르의 뒤쪽으로 끼어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토르의 머리카락을 매만져 본 로키는, 자기가 예상했던 대로 토르의 머리가 거친 것이 아니라 꽤 부드럽고 곱다는 사실에 살짝 놀랐다. 로키는 땋은 머리 각각에 묶여 있는 가죽 머리끈을 풀어 내린 후, 땋인 머리 가닥가닥을 하나씩 풀어 주었다. 로키의 손에 가죽 머리끈이 한 뭉텅 모이기 시작했다. 로키의 날랜 손놀림에 토르가 기분 좋은 작은 한숨을 내쉬는 것을 제외하면, 둘은 조용히 침묵한 채 앉아 있었다.

“손길이 부드러운 걸.”

마지막 땋은 머리가 풀려나간 후 토르가 말했다.

“그 잘 가다듬은 손톱 덕분인가 봐.”

토르가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로키가, 뒤에서 미소를 지었다.

“조용히 좀 해.”

로키는 침대 시트 위에 놓여 있는 빗을 집어 들어서 토르의 얽힌 머리를 빗어 주기 시작했다.

토르가 눈을 감았고 로키는 속으로 조용히 흥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까의 그 조모의 기억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라비크는 로키가 침대에 들기 전 백 번의 빗질을 해 줘 로키의 머리카락이 흑단처럼 광이 나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 시절은 평화로운 나날이었고, 지금 이 순간 또한 그랬다. 조용한 방 안에 앉아, 토르의 머리를 매만져 주며, 잔뜩 엉킨 머리카락이 곱게 풀려날 때까지 머리를 빗어 주는 것.

로키의 의견으로는, 토르는 머리를 풀어 늘어뜨린 쪽이 훨씬 나아 보였다.

“이대로 잠들어 버릴 것 같아.”

어느 시점에 토르가 정적을 깨고 중얼거렸다.

“음.”

로키는 토르의 귀 뒤의 구불구불한 머리 가닥 사이로 빗을 쓸어 내렸고, 빗이 지나간 자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져 주었다.

“헤임달이 기뻐하겠군. 방에 들어와서 우리가 침대 위에 기절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면 말이야. 넌 아파서 잠들어 버렸고, 나는 따분함을 참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고…. 그나저나 헤임달은 왜 그렇게 우리더러 침대를 같이 쓰라고 고집하는 거야?”

“그 점은 미안하게 됐군.”

토르가 몸을 꿈틀대며 말했다.

“내 잘못도 있을 거야. 헤임달에게 그 요툰 문화에 익숙한 교사 이야기를 해 주었거든. 왜, 요툰인들이 황금 선물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 알려줬던 그 교사 말이야. 그 사람이 또 해 줬던 이야기가, 요툰인들은 늘 한데 무리로 뭉쳐서 잔다고 하더군. 헤임달이 그 이야기를 잘 새겨 듣고는 당신을 좀 더 편하게 만들어 주려 했었나 봐.”

“그랬어?”

로키가 너무 힘을 줘 토르의 머리카락 안으로 빗을 밀어 넣는 바람에 토르가 움찔했지만, 로키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래. 하지만 당신이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어…. 나와는 절대….”

토르가 고개를 돌려 황금색 머리카락 사이로 로키를 흘깃 응시했다.

“당신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

“정말로?”

로키는 머리 빗던 손을 멈추고 헤드보드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대부분의 요툰인들이 어릴 때부터 무리를 지어 자는 것은 사실이야. 형제들과 함께 등을 맞대고 잠을 자는 거지. 당신이나 당신의 그 교사나 요툰인의 그 관습이 어떻게 해서 시작된 일인지 생각해 본 적 있어?”

토르가 어깨 한 쪽을 으쓱했다가, 통증이 밀려오는지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안전 때문에?”

토르가 팔을 문지르며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랬다가 깨달음을 얻은 듯 그의 두 눈이 먼 곳을 응시했다.

“야간 습격이 있을지 모를 때를 대비해서….”

“그래. 아스가르드 군대가 즐겨 쓰던 전략이지.”

로키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어린아이들은 보통 가장 어린 막내를 중간에 두고 둘러싼 채 잠을 자지. 첫 화살이 날아올 때 그 애를 보호할 수 있도록 말이야.”

“미안해…” 

토르가 입을 열었다.

“물론 나는 한 번도 형제들 곁에서 자 본적이 없어.”

로키는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너무 작았거든. 형제들이 자는 중에 언제고 돌아눕다가 날 깔아뭉개 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나는 너무 특별하고 연약한 존재라서 늘 따로 떨어져 지내야만 했지.”

그 말이 충분히 스며들 수 있도록 로키는 잠깐 멈췄다.

“날 지켜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것은 덫이었다. 로키는 다음 공격을 기다렸다. 하지만 내가 널 그 늑대들에게서 지켜 줬잖아! 또 로키는 신랄하게 받아 칠 말도 준비했다. 로키는 오딘슨의 얼굴에다 대고 웃음을 터뜨릴 것이고, 그 상처에 손가락을 쑤셔 박을 것이다. 그래, 그런 식으로 모든 걸 면제받으려 할 생각이냐고, 그 바보에게 로키는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로키는 자신이 토르에게 빚진 것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 목숨을 빚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애초에 로키가 그렇게 위험한 탈출 시도를 해야 했던 게 누구 잘못인데?

토르가 고개를 돌려 로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움직임이 엄청나게 고통스러워 보였음에도, 토르는 한 손으로 갈비뼈를 움켜쥔 채 로키의 시선을 마주했다.

“당신이 얼마나 강한지를 내가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런 이야기를 해 주는 건가? 당신이 자기 스스로를 충분히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른다고 생각해서?”

로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려던 말이 혀 위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두 눈에 차오르기 시작한 눈물을, 토르는 손등으로 훔쳐내 버렸다.

“어린 아이가 그런 생각을 품는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야. 외롭고 무리에서 동떨어진 느낌을 받는 것도 모자라, 보호조차 받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누군가는 당신을 도와 주어야 했을 텐데,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로키, 그 상처를 내가 떠안아 줄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당신이 짊어져야 했던 짐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유감스럽다는 말 밖에 해 줄 수 없을 것 같군.”

토르가 분홍색으로 물든 눈을 문질렀다.

“당신이 겪어야 했던 그 모든 일이 너무도 유감스러워.”

묘하게도 어린 로키가 외로운 침대 위에서 너무나 듣고 싶어 했던 말들이 토르의 말에서 메아리쳐 왔다. 로키는 눈을 감고 그 기억을 밀어내려 애썼다. 이 야만적인 짐승이 자신을 너무도 철저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마술에 가까울 정도였다. 갑자기 자신이 유리로 만들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로키는 눈을 다시 뜬 후 토르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발 울지 좀 마.”

로키는 손을 뻗어 토르의 떨리는 어깨를 움켜 쥐었다. 말로 된 무기 없이는, 로키에게 남아 있는 것은 농담으로 만든 방패 뿐이었다.

“엄청 못생겨 보인다고. 지금 코에서 흘러내리는 그거 콧물이야?”

토르가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다가, 후회스럽게 신음을 뱉으며 베개 위로 풀썩 쓰러졌다. 로키는 그의 어깨를 붙잡은 채 마저 침대에 눕혀 주었다.

“내 비극적인 어린 시절에 눈물을 보이는 건 작작 해 둬. 이제 좀 쉬어.”

토르가 자기 어깨에 얹힌 로키의 손에 자기 손을 가져갔다.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

“불편함을 겪고 있는 쪽은 내가 아니지. 자, 여기 네 베개.”

로키는 베개를 제자리로 끌어당긴 후 툭툭 쳐서 베개를 부풀려 주었다.

“고마워.”

토르가 속삭였다. 토르는 젖은 뺨 위에 달라붙어 있는 노란색 머리를 쓸어냈다.

“머리를 빗어 준 것도 그렇고, 다른 모든 일도, 다 고맙군.”

“그래, 그래, 알았어. 이제 잠이나 자. 좋은 밤 되길.”

로키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토르 역시 눈을 감으며 로키에게 좋은 꿈 꾸라는 둥의 소리를 중얼거렸다. 로키는 잠시간 자리를 지키고 선 채 토르가 잠에 빠져 드는 것을 지켜 보았다. 혹시 모르니까, 하고 로키는 스스로에게 일렀다. 이 야수는 여전히 상처에서 회복 중이었고, 자는 동안 다친 이에게는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일 분만 더. 로키는 속으로 생각했다. 다른 곳에 자리 잡을 데가 없어 로키는 토르 옆에 잠시 몸을 눕혔다.

일 분이 오 분이 되고, 오 분이 십 분이 되었다. 그리고 토르의 고른 숨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해, 로키의 두 눈이 깜빡이며 닫혔다. 로키가 다시 화들짝 일어났을 때 방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벽난로 안의 장작이 이미 모두 다 타올라 있었다. 대체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지? 한 시간? 아니면 그보다 더? 그 동안 토르는 몸을 돌려 로키 쪽을 마주하고 있었다. 잠에 빠진 몸이 느슨하게 늘어져 있었고 머리카락은 베개 위로 잔뜩 흩어져 있었다.

어째서인지, 둘 몸 사이에 두 사람의 손이 꽉 붙들려 있었다. 한데 둥지 틀고 모여 있는 형제들 처럼. 기도를 올리는 어린아이들처럼.

로키는 두 눈이 눈물로 따끔따끔해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딘슨 옆에서 이렇게 잠이 들다니, 어떻게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지? 어둠 속에서 오딘슨이 자신에게 먼저 손을 뻗은 것이 틀림 없다. 로키라면 꿈결 속에서도 절대,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로키는 토르의 두껍고 각진 손으로부터 자기 손가락을 빼낸 후, 침대에서 빠져 나왔다. 토르가 불만스럽게 숨을 푹 내쉬더니, 다시 고요히 잠에 빠져들었다.

로키는 자기 간이 침대로 돌아와 제대로 몸을 눕혀 누웠다. 털담요 아래 홀로 안전하게. 마음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고, 로키는 스스로에게 단단히 일렀다. 중요한 일에 집중해야 한다. 탈출하는 것은 지금 당장의 선택지가 아니다. 하지만 그 이외에도 탐색해 보아야 할 다른 일들이 많았다. 멍청한 에시르의 곤경에 신경 쏠려 있는 대신, 훨씬 더 일찍부터 탐색해야 했던 여러가지 일들.

로키는 단호한 마음을 품고 잠에 빠져 들었다. 왕세자는 모처럼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로키는 꿈에서 만날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자네가 과연 누구일지 생각을 해 보고 있었어.”

유령 같은 왕비가 말했다. 로키는 꿈 속의 얼음 벼랑에 서 있는 왕비 옆에 가 섰다. 두 사람은 얼음 지대의 차디찬 아름다움을 내려다 보았다. 두 사람의 가운 깃이 바람에 물결치며 휘날렸다.

“자네 같은 크기의 서리 거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자네는 라우페이의 아들, 요툰헤임의 왕세자이지. 그렇지 않나?”

“맞습니다.”

로키가 대답했다. 부인해 봤자 소용 없었다.

“사람들은 저를 ‘조그만 자’ 로키라고 부릅니다. 당신은 아스가르드의 왕비 프리가이시지요.”

“왜 나를 찾는 것이지, 작은 마법사?”

프리가가 물었다.

“왜 나를 이 장소에 데리고 온 것인가?”

로키가 얼굴을 찌푸리며 프리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절 찾은 것이 왕비님 쪽이라고 생각했는데요.”

프리가가 천천히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수수께끼가 더 미궁에 빠져 드는군. 자네나 나 어느 한 쪽이 이 만남을 주선한 것이 아니라면, 다른 무언가가 우리를 이 자리로 이끌고 있는 것이 틀림 없어.”

“저희 두 사람 다 마법 기술을 공유하고 있지요.”

로키가 먼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왕비님께서도 마법에 아주 정통하시다고. 토르가 이야기해 주더군요.”

그 즉시 프리가의 차분한 가면이 산산이 부스러졌다.

“내 아들을 아는가?”

프리가의 얼음같이 차가운 손이 로키의 손을 꽉 쥐었다.

“내 아들이 어떤지 말해 주게. 토르는 잘 지내고 있는가? 안전한가?”

로키는 왕비의 두 눈을 응시했다. 오딘슨의 것처럼 거짓 봄날의 푸른색을 띠고 있는 눈이었다. 그 두 눈이 흥분으로 휘둥그레져 있었다. 물론, 그 표정 또한 꾸며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로키는 혀 위에 맛 보이는 무엇인가 진실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유령이 로키의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고 한다면, 아마 살아 있는 자들의 세상을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이 틀림 없었다.

“토르는 최근에 입은 상처 때문에 침대에 누워 지내야 하는 상태입니다.”

로키가 말했다.

“잠을 자며, 치유하고 있지요. 그것만 제외하면 아주 멀쩡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왕비가 무거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왕비가 로키를 불신의 씨가 담긴 시선으로 응시했다.

“내 아들은 어떻게 아는 거지? 아무리 자네 같이 작은 서리거인이라 해도, 아스가르드에서는 환영받지 못할 텐데. 내가 떠난 이후로 상황이 많이 바뀌었나?”

“예상도 못 하실 겁니다.”

로키가 중얼거렸다. 로키는 그 외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 유령이 선의를 품고 있는지 악의를 품고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편히 잠들지 못한 영혼이 갑자기 공격성을 발휘해 오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었기에, 로키는 왕비에게 한동안은 비밀을 지키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 결정을 내렸다. 자기 외아들이 요툰인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왕비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고 로키가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혼인 의식 때 헬라가 했던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는지라,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자네는 마법을 쓸 수 있고, 내 아들 또한 아는 사이라는 거지.”

프리가가 말했다. 프리가가 생각에 잠긴 동안 프리가의 손이 로키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우연일 리가 없어. 자네가 내게 자유를 가져다 줄 수단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말해 주게. 날 자유롭게 해 줄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나?”

불쌍한 영혼 같으니. 로키는 생각했다. 영원히 어두운 그림자로서 땅 위를 다시 걷고 싶어 하는군. 로키는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왕비님. 하지만 지금 제 마법이 속박되어 있는 상태라서 말이지요.”

로키는 손을 들어올려 꿈 속에서마저 자기 손목을 죄고 있는 황금 고리를 보여 주었다.

프리가가 놀라 숨을 헉 들이켰다. 프리가의 손길이 수갑 위를 쓸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이지? 대체 누가 이런 잔혹한 짓을….”

프리가가 말을 멈췄다. 프리가의 창백한 입술이 벌어져 열렸고, 눈처럼 차디찬 속삭임이 흘러 나왔다.

“헬라.”

로키의 시선이 하얀색 바닥 위로 떨구어졌다.

“그렇습니다.”

“헬라가 그런 짓을 했다면, 자네가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이 틀림 없군.”

프리가가 다급히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네 마법의 살아있는 숨결을 느낄 수 있어. 온전한 마법의 힘 없이도 자네는 날 도와 줄 수 있을 거야.”

프리가의 시선이 로키의 얼굴 위를 훑었다. 아, 오딘슨이 그 간청하는 표정을 어디서 배웠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부탁이네. 내 아들의 친구로서….”

“너무 앞서 나가지는 말도록 하지요.”

로키가 프리가의 어깨를 부드럽게 붙잡으며 일렀다.

“이런 무력한 상태로 제가 어떻게 왕비님을 도와드릴 수 있다는 거죠?”

“마력을 발휘할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네. 주문이 아니더라도, 꿈 바깥에서 자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소환술이라도 말이야! 그렇게 한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고, 나도 자네가 갑자기 잠에서 깨 버릴까 봐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되겠지. 이전 두 번의 만남에서는 자네가 너무 빨리 사라져 버리더군.”

로키는 불쾌함을 숨길 수가 없어, 눈썹을 날카롭게 치켜 들었다.

“절더러 무슨 사기꾼 마술사처럼 뼛조각을 던지고 찻잔 안을 들여다 봐 주기를 바라시는 건가요?”

그런 일은 아무 마력도 보유하고 있지 않는 필멸자들의 영역이었다. 로키처럼 강력한 능력을 지닌 존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왕비님, 왕비님의 상황은 정말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진심이에요. 하지만….”

“부탁이네!”

왕비가 이렇게 외치며, 강한 손으로 로키의 뒤통수를 붙잡고 가까이 끌어 당겼다.

“다시 한 번만 토르를 내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네. 토르에게는 내 도움이 필요해. 헬라는 위험한 존재야. 자네도 그 사실은 알겠지.”

“알다 마다요. 하지만 죽은 자는 죽은 자의 땅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죄송하지만 유령을 불러내는 일에 관여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유령이라니?”

프리가가 로키를 빤히 응시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로키는 그 소식을 어떻게 사려 깊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심했다.

“왕비님, 왕비님은 수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드님께서도 애도하셨지요. 아드님께서는 왕비님에 대한 아주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부디 아드님의 산 존재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유령이 되어 나타난 왕비님의 모습을 보면 토르는 그 무엇보다 고통스러워 할 겁니다.”

“괴롭힌다고…?”

왕비가 위풍당당하게 우뚝 발을 디디고 섰다. 그 두 눈에서 강한 기운이 뚜렷이 엿보였다.

“내 말 잘 듣게, 작은 거인.”

프리가가 몸을 숙이며 입을 열자, 숨결이 공기 중으로 하얀 김이 되어 나왔다.

“나는 죽지 않았네. 그 수 년 동안 나는 세계와 세계 사이의 공간에 갇혀 있었어. 누구 소행인지는 자네도 잘 알겠지. 그 사람이 자네에게도 쇠고랑을 채워 놓았으니.”

로키의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헬라의 배반 행위가 그렇게나 깊숙한 곳까지 관여해 있었다는 말인가?

바람을 따라 로키를 부르는 목소리가 실려 왔다. 로키는 그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토르의 낮고 깊은 목소리였다.

“로키, 일어나!”

토르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꿈일 뿐이야!”

“내 아들이 널 부르는구나. 내 아들….”

프리가가 말했다. 두 눈에 흘러내리지 못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저는 떠나야 합니다.”

로키가 재빨리 말했다. 깨어나고 있는 세상이 마음 속 한구석을 잡아 당기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도와 주겠는가? 제발, 자네가 내 유일한 희망이네.”

왕비가 애원했다.

로키는 망설였다. 지금 당장은 자신의 위치도 너무 위태로웠고, 그런 약속을 해도 될지 알 수 없었다.

“저는….”

거칠고 두꺼운 손가락이 로키의 뺨을 감싸 왔다.

“로키.”

토르의 두려움에 찬 소리가 고집스럽게 불렀다.

“제발 일어나!”

로키는 그 즉시 잠에서 깨어났다. 로키는 헉 숨을 들이 삼키며, 땀범벅이 된 채 헐떡이며 일어나 앉았다. 토르가 허공에 손을 멈춘 채 로키의 간이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토르의 가슴과 몸통 맨 살을 가리고 있는 하얀 붕대가 어두운 방 안에서 또렷하게 드러나 보였다.

“악몽을 꾸었나 봐.”

토르가 말했다.

“몸부림을 치고 있더군. 아파하고 있는 걸까봐 걱정했어.”

“내가 자는 동안에 내 몸에 손 대지 마.”

로키가 내뱉었다.

“네게는 그럴 권리 없어.”

“미안해. 그저….”

토르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내 말을 듣지 못하는 것 같아서. 당신을 깨울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어.”

로키는 새까만 머리 가닥을 눈에서 걷어낸 후 토르를 뜯어 보았다.

“그러면 아까는? 아까 전 일에 대한 변명은 뭔데?”

“아까 전?”

토르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아까라면 언제?”

“됐어.”

로키는 빠르게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 일을 들쑤시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 야수는 정말로 자기 경솔한 행동을 기억 못하는 걸지도 몰랐다.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침대 밖으로 나오면 안 되잖아.”

로키는 겨우 이렇게 말했다.

“나도 알아. 돌아가도록 하지.”

하지만 토르는 로키의 곁에 계속 꾸물거리고 있었다.

“그게…. 정말 괜찮은 거야?”

“그래. 괜찮아.”

로키가 툭 쏘아붙였다.

“그냥 꿈이었을 뿐이야. 가서 잠이나 자.”

고개를 끄덕해 보이더니 토르는 다시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로키는 토르의 모습을 지켜보며 베개 위에 머리를 눕혔다. 폐가 혹사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꿈 속에서 프리가가 말해준 것을 토르에게 어떻게 이야기해 주어야 하지? 헬라가 왕비에게 그런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그 아무 증거도 없었다. 로키는 왕비가 정말로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증명할 수 없었다.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토르에게 희망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밤이 낮으로 바뀔 때까지 로키는 그 자리에 누운 채 생각만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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