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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로키/번역]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 (9/16)

토르로키 / Thorki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왕세자와 야수)"

by triedunture


원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5267873


  • 작가님께서 번역은 출처를 포함하여 자유롭게 하라고 명시하셨습니다. (https://i.imgur.com/r6PfDqx.jpg)
  • 에시르 토르x요툰 로키 정략결혼 AU입니다. 구전동화 느낌이 살짝 끼얹어진 작품으로 이야기 중간중간에 화자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 로키를 비롯한 모든 요툰 종족은 인터섹스(자웅동체)라는 설정입니다. 엠프렉 언급이 있습니다.
  • 요툰헤임에는 성별의 구분이 없고 누구나 아이를 밸 수 있기 때문에, 어머니/아버지라는 단어 대신 (주로 동물 번식에서) 누가 씨를 뿌렸고 누가 새끼를 배었는지 칭하는 단어인 dam/sire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 단어들은 원문에서 사용한 의미와 가장 비슷한 단어인 '종빈/종모'로 번역합니다.



*    *    *



9장.


로키는 토르의 몸 위에서 이불을 홱 걷어냈다.

“일어나, 오딘슨.”

로키가 말했다.

“경축할 날이야!”

야수 같은 왕자는 로키의 들뜬 기분에 딱히 공감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 대신 왕자는 끙 소리를 내며 황금색 머리를 베개 밑에 쑤셔 넣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베개에 꽉 막힌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유의 소리지. 오늘 우리는 다시 자유를 맛보게 된다고.”

로키가 대답했다. 로키는 토르의 세면대 위에 걸려 있는 거울에다가 자기 모습을 잠깐 비추어 보았다. 검은색 머리카락이 곱게 구불거리며 흘러내리고 있었고, 시원한 푸른색 피부에는 건강한 윤기가 흘렀다. 이만하면 로키를 자기 공범자로 삼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로키는 토르의 베개를 움켜쥔 후, 다시 베개를 잡아채려는 토르의 노력을 거뜬히 무시하며 그걸 바닥에다 던져 버렸다.

“헤임달이 지금 무렵이면 네가 완전히 다 치유될 거라 했었지. 일주일이 훨씬 넘었고….”

“12일이야.”

토르가 툴툴거렸다. 토르는 매트리스 더 깊숙이 머리를 박아 넣으며 팔로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우리가 네 부재를 설명하기 위해 꾸며냈던 이야기도 이제 그 할 일을 다 했어. 밖에 나가 보고 싶지 않아? 신선한 공기가 마시고 싶지 않아?”

로키는 꼼짝 않는 에시르 몸뚱아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 있어. 정원 산책하러 나가자.”

로키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빈틈없이 계획을 짜 놓았다. 이제 더 이상 같이 방 안에 칩거할 필요는 없어졌으니, 로키는 토르 곁에 붙어 있을 다른 방법을 궁리해 내야만 했다. 오딘슨의 활동반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오딘슨의 계획에서의 자기 위치 또한 위태로워 질 것이 틀림 없었다. 하지만 로키는 간절히 그 계획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물론, 상대가 동조해 주지 않으면 그러기도 힘들었다.

“정원에 나가기에는 너무 추운 날씨야.”

토르가 흐릿한 눈으로 로키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얼어 죽을 걸.”

로키는 성의 없이 창 밖으로 잠깐 눈길을 주었다.

“그래, 바닥에 눈이 쌓여 있긴 하지만, 꽁꽁 옷을 싸매 입으면 되지. 이것 봐. 널 위해서 털 달린 망토도 준비해 놓았어.”

로키는 서랍 위에 접혀 있는 붉은 망토를 집어 의기양양하게 위로 들어올려 보였다. 심지어 색이 딱 맞는 장갑 한 쌍도 있었다.

토르는 한참 동안 로키가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키는 자기가 나쁜 놈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오딘슨이 한숨을 푹 내쉬며 반쯤 벗은 몸으로 침대에서 빠져 나왔다.

“그래, 당신이 그래야 기쁘겠다면….”

“응, 그래야 기쁠 걸.”

로키가 장담했다.

“이제 그 붕대를 좀 풀어 볼까?”

로키는 망토를 침대 위로 휙 던져 놓은 후, 토르의 가슴과 몸통에서 리넨 붕대를 풀어 주기 시작했다. 토르는 몸을 살짝 돌린 채 인형처럼 얌전하게 팔을 치켜들고 있었다. 인형처럼 생기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칭찬을 좀 건네면 저 언짢은 기분을 달래 줄 수 있으려나?

“아주 잘 나았네.”

로키가 손에 붕대를 모아 쥐며 말했다.

“헤임달이 상처 간호를 무척 잘 해준 것 같아. 자국도 안 남았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를 것 같아.”

그 말은 사실이었다. 토르의 팔뚝 창백한 살갗 위에는 반달 모양의 빨간색 흠집 딱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당신 말이 맞아.”

토르가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동의를 표했다.

“전혀 모르겠지.”

로키의 가슴 속 깊이 염려의 감정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괜찮은 거 맞아?”

로키가 물었다. 물론, 금방 쓰러져 죽어 버릴 사람과 자신이 동맹을 맺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다.

“괜찮아.”

대답이 들려왔다. 토르는 창문 바깥을 내다 보았다. 밑으로 늘어뜨려진 머리카락이 토르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냥 아직도 상처가 조금 쑤실 뿐이야.”

로키는 얼굴을 찌푸렸다가, 다시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네게 필요한 건, 깨끗한 새 옷이야. 이리 와. 빨리 그 바지는 벗어. 대체 얼마 동안 그 바지 안에서 재워져 있었던 거야?”

토르가 살짝 몸을 움찔하며 로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 내 상태가 말이 아닐 것이 틀림 없겠지.”

토르는 이렇게 말하더니, 열심히 바지 끈을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로키도 다시 옷장 쪽으로 몸을 돌려 적당한 의복을 뒤져 찾기 시작했다. 물론 토르의 사생활을 배려해 주기 위해서기도 했고.

“이게 좋겠군. 부드럽고 따뜻할 것 같아.”

로키는 어깨 너머로 새 옷을 던졌다. 토르가 옷을 입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로키는 좀 더 그럴듯한 옷을 찾아 계속 옷장을 뒤졌다.

“여기 있는 것 이외의 색깔은 아예 안 키우나 보네. 왜 녹색은 하나도 없어? 보라색은? 보라색을 입으면 아주 왕족다워 보일 것 같은데.”

“내겐 이 색깔이 어울려.”

토르가 대답했다. 가죽 벨트가 삐걱대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다른 색깔은 필요 없어.”

“그냥 내 의견일 뿐이야.”

토르가 다 차려 입고 나자 로키는 몸을 일으켜 그 쪽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 풀 죽은 얼굴에도 불구하고 (정말이지, 저 표정은 어떻게 좀 손을 봐 줘야 할 텐데), 토르는 건장하고 튼튼해 보였다. 로키의 시선이 토르에게 필요 이상으로 오래 머물렀다.

“다시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모습을 보니 좋네.”

로키가 눈을 돌리며 말했다.

“고마워.”

토르가 마른침을 삼키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병상을 떠날 수 있게 돼서 나도 기쁘군. 정말이야. 고민할 거리가 많았는데, 뭔가를 열심히 생각하는 건 내 특기가 아니라서 말이지. 산책을 하면 머리도 좀 식힐 수 있을 것 같군.”

토르가 손을 뻗어 문 옆에 걸려 있는 로키의 털망토를 집더니 위로 들어 올렸다.

“아, 그건 내 거야.”

토르가 그걸 자기 망토로 착각한 줄 알고, 로키가 말했다.

“나도 알아.”

토르가 망토를 흔들어 보였다.

“네가 이걸 입도록….”

다시 한번 토르가 망토를 흔들었다.

“아, 내가 입는 걸 도와주려는 거야?”

요툰헤임에서는 적당한 나이에 이르고 능력을 갖추게 되면, 망토를 입는 것이나, 테이블 아래에서 의자를 빼내는 것, 문을 여는 것은 죄다 각자 알아서 하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다른 사람 대신 해 주는 것은 지나친 온정주의로 받아들여졌기에 요툰인들은 꺼려 했다. 하지만 로키는 무례하게 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순순히 몸을 굽혀 따뜻한 망토 안으로 몸을 넣었고, 토르가 어깨 위로 망토를 둘러 주는 동안 가만히 있었다. 기다란 검은색 머리카락을 목깃에서 잡아 빼낼 때 머리 가닥이 토르의 뺨을 살짝 치는 바람에, 로키는 사과의 말을 건넸다.

“이런 전통에는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로키가 말했다.

“여기서는 신사라면 마땅히 해 주어야 하는 일로 여겨지지. 음….”

토르가 이렇게 대답하더니, 잠깐 망설였다.

“여인들을 위해서 말이야. 당신에게는 무례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나로선 그렇게 하는게 가장 예의 바른 일이어서 그랬어.”

“그게 왜 무례한 일이라 생각해?

로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스가르드인들에게도 자기네들 규칙이 있는 법이지. 자, 여기.”

로키가 토르의 붉은 털망토를 집어 든 후 그걸 토르의 널찍한 어깨에 둘러 주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아?”

물론 로키는 아스가르드에서 남성과 여성이 나누어져 있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자가 뭔가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고, 여자가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을. 그런 관습에 내재되어 있는 소유욕의 개념을 깨닫지 못했다. 자기 파트너에게 반지나 새로운 이름으로 표식을 부여하는 문화가 없는 종족에게는 그런 관념은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다. 로키는 그저 에시르 족들이 너무나 허약해 빠진 나머지, 서로를 그렇게 도와주는 것이 예의 바른 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토르가 그런 관습에 자신을 포함시켜준 것이 아주 배려심 깊다고, 로키는 생각했다. 그래서 로키는 똑같은 방식으로 그 배려심을 돌려 주었고, 그 답례의 표현이 잘 받아들여졌기 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토르가 놀라서 꼼짝도 않고 서 있었지만, 로키는 토르가 그저 기운이 없어서 그럴 것이라 여겼다. 로키는 토르의 흐트러진 노란색 망토 뒤로 얌전히 흘러 내리도록 정돈해 주었다. 그런 후 로키는 능숙한 손길로 머리카락 몇 가닥을 앞으로 빼내, 토르의 턱선이 더 두드러져 보이도록 만들어 주었다.

“다 됐어.”

로키는 토르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목숨을 거두는 한이 있더라도 이 냉혹한 야수의 비위를 잘 맞춰 주어야만 했다.

“머리 내린 게 훨씬 나아 보여. 이제 갈까?”

토르는 로키가 내민 손을 맞잡은 후, 고맙다는 말을 조용히 속삭였다.

토르가 예상했던 대로 정원은 몹시 추웠다. 나무와 바닥 위에 반짝이는 눈더미가 잔뜩 쌓여 있었다. 헐벗은 나뭇가지들이 유리 같은 얼음에 싸인 채 꽁꽁 얼어 있었고, 그 안에 갇혀 있는 붉은색 산딸기가 보석처럼 빛났다. 로키는 온통 순백을 띤 정원의 광경을 감탄스레 바라보았다. 둘은 팔짱을 낀 채 아무도 없는 산책로를 걸었다. 눈더미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만이 남았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곤충들이 우는 소리도 없었다. 정원 전체가 동화에 나올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말 조용하네.”

로키가 입을 열자 숨결이 안개가 되어 나왔다.

“이 곳에 우리만 나와 있을 줄은 몰랐어.”

사실 로키는 가신들 몇 명이나 근위병들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자신이 새로이 마음을 먹어 남편에게 얼마나 상냥하게 대해 주는지 봐 줄 목격자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속임수를 잘 이행하는지를 토르에게 증명해 보여 주고 싶기도 했고.

“밖으로 나올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우리 뿐이었던 것 같군. 그래도 사람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야.”

토르가 이렇게 말하며, 정원 쪽을 향하는 성의 창문 쪽으로 고갯짓을 해 보였다. 아치형 색유리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인영들이 두 사람이 있는 곳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좋아. 관중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군.

“소문이 빠르게 퍼지겠지?”

로키가 그 쪽에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다시 사교계로 귀환했다는 사실을 다들 곧 알게 되겠지. 네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말씀을 드릴지 생각해 봤어?”

이것 또한, 토르의 행동 반경에서 자신의 위치를 견고히 하기 위한 로키의 계획 중 일부였다. 오딘슨은 본인과 로키의 운명이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다는 사실에 기뻐해야만 할 것이다. 로키는 유용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래야만 했다. 로키의 목숨이 거기에 달려 있었다.

토르는 뭔가 지독한 게 목구멍에 걸려 있기라도 한 듯 목을 가다듬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내 아버지를 만족시켜 줄 말이 뭐가 있을지 모르겠군. 한 가지만 제외하고….”

“바로 그거야.”

로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이를 뱄다고 말씀드리자.”

토르의 입술 사이로 놀란 탄식이 새어 나가 수증기 구름을 만들었다. 토르가 얼어붙은 길 위에서 발을 멈춰 섰다. 토르의 팔을 팔짱 끼고 있던 로키도 그 옆에 섰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몇 달 후에 당신 배가 부풀어 오르지 않으면 대체 어떻게 하려고?”

“몇 가지 선택지가 있지.”

로키가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답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불행한 사고가 있었다고 꾸밀 수도 있지. 나는 꽤 빼어난 연기자거든. 혹은, 요툰인은 배가 솟아오르기까지 일곱 달, 혹은 여덟 달 정도 걸린다고 말해 놓는다면 시간을 더 벌 수 있을 거야. 그게 아니면, 그 일이 문제가 되기도 전에 재빨리 네 누이를 쫓아내고, 이 거짓 촌극 같은 혼인에서 해방되어 버리는 거야. 난 마지막 선택지가 가장 마음에 들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로키가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였다.

토르의 거짓 봄날 같은 눈이 하얀색 바닥을 훑고 지나갔다.

“마지막 선택지에는 시간이 충분치 않아.”

토르가 말했다. 괴로운 표정으로 찌푸려진 토르의 얼굴은, 에시르 기준을 감안 하고서라도 훨씬 덜 잘생겨 보였다.

로키는 창문에 드리워 있는 얼굴들을 다시 한번 흘깃 올려다 보았다. 관중들은 여전히 두 사람에 몰입해 있었다. 로키는 토르의 팔을 잡아 끌고 구불길을 따라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얼음이 맺힌 커다란 울타리 뒤쪽에서 멈춰 섰다. 우리가 눈 위에서 몰래 입맞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라지.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나누는 편이 더 나았다. 로키는 야수 같은 남편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섰다. 두 사람의 차가운 숨결이 섞여 들었고, 얼음 같은 바람에 둘의 털망토가 흩날렸다. 로키는 정원의 얼어붙은 침묵을 뚫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최근 들어 왜 기분이 언짢은 지는 잘 알고 있어.”

로키가 말했다.

“아무래도 책임감 때문에 압박이 심하겠지. 그 짐을 네 혼자 지려 하는 건 옳지 못해. 내가 도와 줄게.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알려 줘.”

토르가 입을 열더니, 다시 꾹 다물었다. 자기 팔을 붙잡은 로키의 손 위로 토르의 손이 얹혀 왔다.

“아무 것도 할 필요 없어.”

토르가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이 계획은 나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 당신이 아이를 배었다고 말해 우리 거짓말을 더 깊숙이 이끌고 가면, 당신을 위험한 위치에 놓는 일 밖에 되지 않을 거야.”

“나는 이미 위험한 위치에 있잖아. 조금 더 위험해진다고 문제 될 건 없어.”

로키가 지적했다.

“이게 무슨 게임 같아 보여? 네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라고! 그런 식으로 가볍게 말 하지 마!”

토르가 으르렁거렸다. 두 눈에 갑작스러운 사나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로키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얼굴에 충격 어린 질책의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매우 드문 일이었기는 했지만, 가끔씩 토르에게서는 한 때 도시 하나를 파괴하고 말았던 그 날과 똑같은 분노가 언뜻 모습을 드러내고는 했다. 그런 강렬한 감정을 숨기기란 어려웠다. 그 사실을 로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해.”

토르가 빠르게,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로키의 손을 붙잡은 토르의 손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장갑 낀 손가락이 로키의 몸 위 혈통의 표식을 훑었다.

“그저…내 지금 위치와, 이 평화 조약과, 헬라….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위태로운 상황이야. 이런 일에 당신이 연류될 필요는 없어.”

로키는 붉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딘슨은 로키를 완벽히 신뢰해야만 했다. 요툰헤임의 왕세자는 절대 이 야수의 술책에 자신의 운명이 좌지우지 되도록 놓아 두지 않을 것이다.

로키는 매력적인 모습으로 보이기를 노력하며, 부드럽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인내심을 가져. 로키는 스스로에게 일렀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그 말은 입 안에서 쓰디쓰게 느껴졌다.

“아, 그러고 보니 말인데….

로키는 토르의 손에서 자기 손을 빼낸 후 망토 위를 더듬어 찾는 척을 해 보였다. 로키는 벨트에 있는 조그만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어 소박한 모양의 금속 열쇠를 끄집어 냈다. 로키의 방 문을 여는 열쇠였다.

“이걸 돌려 주려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

로키의 입장에서는 약간의 도박 같은 수였다. 하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오딘슨이 다시 돌려 달라는 말을 꺼낼 테니, 그 전에 자발적으로 먼저 내놓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둘 중 어느 쪽이든 로키가 다시 방에 감금되게 될 것은 매한가지였다. 자진해서 열쇠를 돌려 준다면 자신의 동료로서의 가치를 보여 주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조금이나마 호의를 얻기 위한 의사 표현이었다.

토르의 입술이 벌어져 열렸다. 토르가 로키의 감각 없는 손가락에서 열쇠를 집어 가더니,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 놓았다.

“그 날 밤에….”

토르가 입을 열었다. 숨결이 기묘한 모양으로 흩어져 나왔다.

“네가 도망친 날 밤에…우리가 껴안았을 때훔쳤던 거였군.”

“그래.”

로키가 한 쪽 눈썹을 찌푸렸다. 명백하기 짝이 없는 결론일 텐데, 오딘슨이 왜 그 사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토르가 속삭였다.

“그렇지 않고선 당신이…그랬을 리가….”

토르가 머리를 흔들자,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좌우로 흩날렸다.

“너무 자책하지는 마.”

로키가 오딘슨의 망토 입은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했다.

“내 재빠른 손길의 희생자가 된 것이 네가 처음은 아니니까.”

로키가 웃어 보였지만, 토르는 그 미소를 돌려 주지 않았다.

대신 토르는 그 열쇠를 다시 로키의 손 안으로 밀어 넣었다. 토르의 두 눈에 떠오른 표정이 불가해했다.

“고맙군. 하지만 이건 당신이 가지고 있도록 해.”

로키가 열쇠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토르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그리고는 다시 열쇠를 응시했다. 이 야수가 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자물쇠를 바꾸려고?”

로키가 물었다.

“아니.”

토르가 열쇠가 얹힌 손바닥 위로 로키의 손가락을 말아 쥐어 주었다. 차갑고 딱딱한 금속이 살갗을 찔러 왔다.

“내가 할 수 있을 때 그나마 줄 수 있는 자유라도 주려 하는 거야.”

로키가 터뜨린 웃음이 공기 중에 수증기가 되어 퍼져 나갔다. 로키는 토르가 농담을 마저 이어 나가기를 기다렸지만, 토르는 그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로키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내가 내키는 대로 오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현명한 일인 것 같아?”

“나도 모르겠군.”

토르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게 옳은 일이라 생각해. 물론 당신은 또 탈출하려 하겠지만, 그런다고 당신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군. 그리고 어차피 겨울철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탈출 시도를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들어서. 적어도 내 희망 사항은 그래.”

로키는 잠깐 골똘히 생각했다. 오딘슨이 이 정도의 신뢰를 보이는 것은 좋은 징조임이 틀림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로키는 이게 혹시 무슨 시험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럼 내가 원하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거야? 물론 성벽 안에 한해서.”

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사저 쪽으로 가는 것은 권고하고 싶지 않지만, 그것만 아니라면…그래. 어디든 자유롭게 다녀도 좋아.”

좋아, 꽤 편리할 것 같았다. 혼자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왕비를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로키는 눈썹을 슬쩍 치켜 올리며, 조금 더 모험을 해 보았다.

“만일 내 방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고 싶지 않다면, 그것 또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인 거야?”

토르의 번듯한 부츠가 눈을 밟아 으드득 소리를 냈다.

“그래. 물론 헤임달은 자기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자기 열쇠를 가지고 드나들겠지. 하지만 내가 당신 방에 들어오는 걸 막고 싶다면…”

그 말이 시디시게 느껴지기라도 하는 듯, 토르의 턱이 들썩였다.

“나도 억지로 들어가려 하지는 않을 거야.”

로키는 그 털이 덥수룩한 얼굴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네가 들어오는 걸 내가 왜 막으려 하겠어?”

로키가 물었다. 그 질문에는 찰나의 솔직함이 담겨 있었다. 토르가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생각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됐든, 그 모험 이야기도 마저 읽어 줘야 하는 걸.”

로키의 그 말에 토르가 막 대답을 하려던 참에, 눈을 밟는 발걸음 소리가 귀에 들려 왔다. 로키는 몸을 돌려 올파더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흰족제비 털로 만든 겉옷을 걸치고 있는 왕은 평소보다도 훨씬 몸집이 커 보였다. 왕의 옆을 늘상 따라다니는 수행단들도 함께 하고 있었다. 로키는 주머니에 다시 열쇠를 집어넣은 후, 토르의 긴장한 팔에 손을 가져갔다. 두 사람은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에게 밀착한 채 걸음을 뗐다.

“내 아들아!”

오딘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불렀다.

“마침내 나타났구나! 그간 힘 쓴 것 때문인지, 활기가 넘쳐 보이는구나.”

마치 나비를 핀으로 고정시키듯, 오딘의 시선이 로키에게 와 붙박혔다.

“그리고 ‘조그만 자’ 로키, 자네는 어떻게 지내는가?”

왕이 로키에게 직접 말을 꺼낸 게 이번이 처음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로키는 놀란 마음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고민할 다른 일들이 더 많았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올파더시여.”

로키가 이렇게 대답한 후, 배 위에 고운 손을 올려 놓아 보였다. 로키는 입가에 고요한 미소를 띄웠다.

“왕자를 너무 오랫동안 갇혀 지내게 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로키의 옆에서 토르가 숨을 들이 삼켰다. 로키는 그를 향해 매서운 눈길을 쏘아 보냈다. 그래, 로키는 자기 계획을 조금 서둘러 진행하고 있었고, 오딘슨이 그에 순순히 따라 주기만을 바랐다.

오딘이 로키의 납작한 배를 빤히 바라봤다가, 다시 로키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필요한 일이었으니 그럴 필요 없다. 그래서 그 결과는? 혹시…?”

로키는 자기 배를 두드려 보였다.

“오늘 아침 새벽녘에 욕지기가 일더군요. 그 이유가 무엇일지는 의심의 여지조차 없습니다. 남편이 신선한 공기를 쐬면 도움이 될 것 같으니 산책을 나가자고 제안했고요.”

로키는 멍청한 헌신 어린 표정처럼 보이기를 기도하며 토르를 올려다 보았다.

“제 건강을 이렇게나 생각해 주다니 정말 다정하기도 하지요.”

기쁨으로 압도된 오딘의 얼굴이 환한 태양처럼 빛을 발했다. 오딘이 푸르디푸른 하늘에다 대고 함성을 지르더니, 자기를 둘러싼 수행원들을 감싸 안으며 열렬히 악수를 나누기 시작했다.

“곧 내 손주를 보겠구나! 운명의 여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오딘이 이렇게 소리를 쳐 대더니, 토르 쪽으로 휙 몸을 돌렸다. 오딘이 두 팔로 토르를 붙잡아 오는 바람에, 토르를 붙잡고 있던 로키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올파더가 토르를 꽉 죄어 안는 동안 토르는 널판지처럼 뻣뻣하게 서 있었다.

“아들일까? 내가 물론 아들을 보고 싶다고 하기는 했지만, 딸이래도 상관 없다.”

“딸도 아들도 아닐지도 모릅니다.”

토르가 중얼거렸다.

“로키 같은 모습을 한 아름다운 아이를 얻을지도 모르지요.”

토르의 두 눈이 로키를 잠깐 마주했다가, 다시 떠나갔다.

그 말에 로키는 몸을 살짝 똑바로 세웠다. 턱이 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저 야만인은 끼어들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토르가 지적한 것이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지만, 이 속임수에 로키의 단일 성별 문제를 굳이 끼워 넣지 않더라도 이미 상황은 충분히 위태로웠다.

“아!”

오딘이 살짝 뒤로 물러서더니 토르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생각은 못했구나. 그래, 물론이지. 그래도 괜찮다.”

오딘이 자기 동행들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옹호를 청하는 손짓을 해 보였다.

“그렇지 않은가? 내 혈통의 어떤 아이라도 소중히 해 주어야지!”

중얼거리는 소리와 끄덕거림, 중얼거리는 소리와 끄덕거림이 이어졌다.

“축복 받은 아이로군요!”

누군가 이렇게 소리를 쳤다. 수행원들이 앞으로 몰려 나오더니 토르의 손을 붙잡아 흔들고, 로키에게는 어색하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로키는 그 모든 관심을 우아하게 받아들였지만, 토르는 여전히 나무 판자처럼 뻣뻣하게 서 있었다.

“긴장 좀 풀어.”

로키가 행운을 비는 말들 사이로 슬쩍 속삭였다.

“잘 된 일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토르가 대답했다. 토르의 얼굴이 침대 시트 같은 창백한 색을 띠고 있었다.

“이리 오렴, 이리 오거라.”

올파더가 토르의 몸을 성 쪽으로 밀며 말했다.

“내 궁중에서 너무 오랜 기간 떨어져 지내지 않았느냐. 우리 나랏일과 관련해 네가 들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다. 어서 가서 자문가들에게 보고를 듣거라.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도 이 좋은 소식을 직접 전해 주고.”

로키는 토르의 뒤를 따르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지만, 오딘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토르는 자기 할 일을 하게 놓아 두려무나.”

오딘이 말했다.

“자네가 정원을 마저 산책하는 데 동행하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토르와 로키의 사이에 무언의 대화와, 눈을 커다랗게 뜬 간청하는 시선이 오갔다.

“아버지….”

토르가 입을 열었다.

“우리끼리 알아서 잘 시간을 보내도록 하마.”

오딘이 로키의 얼어붙은 손을 두드렸다.

“안 그래도 왕실의 반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알아 나가고 싶었다. 이제 자네도 우리 가족의 일부이니까 말이다.”

그 마지막 말을, 오딘은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미소를 지으며 건넸다.

로키는 토르를 향해 겨우겨우 웃음을 끌어내 보였다.

“어서 가 봐. 폐하와 나는 마저 신선한 공기를 즐기도록 할 테니. 나중에 보도록 해.”

여전히 토르는 주저하고 있었지만, 로키가 경고하듯 눈을 부라리고 노려보는 것에 마지못해 자리를 떠났다. 왕의 수행원들이 오딘슨을 둘러싼 채 성으로 함께 향했고, 로키는 아스가르드의 왕, 로키의 시부와 홀로 남았다. 로키는 왕의 손길을 견뎌 내며 이를 꽉 악물었다. 이 자의 명령으로 요툰인 몇 명이 목숨을 잃었던가? 몇 년 전의 전쟁 동안 자신을 붙들고 있는 바로 이 손에 몇 명의 사람이 살해당했던가? 로키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과, 그리고 토르의 운명을 위해, 로키는 모범수처럼 얌전히 오딘과 팔짱을 낀 채 겨울 울타리 사이를 걸었다.

“성이 정말로 아름다워요.”

그 다른 어떤 정중한 대화거리도 떠오르지 않아 로키는 이렇게 말했다.

“요툰스타드의 성만큼 아름다운가?”

오딘이 물었다.

희미한 분노가 로키의 눈에 잠시 깜빡 떠올랐지만, 로키는 곧장 그 감정을 사탕 같이 달콤하고, 목구멍에 끈적끈적하게 달라 붙을 만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두 장소가 서로 너무도 다르기에, 각각의 특색 있는 아름다움을 자랑할 수 것이겠지요. 그렇지 않나요?”

얼어붙은 미로 정원 사이로 오딘의 웃음이 울려 퍼졌다.

“라우페이 말이 맞았군. 자네는 아주 천성적인 외교관이구나, 작은 거인.”

그 말이 칭찬인지 모욕인지 알 수 없었지만, 로키는 현명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오딘은 눈 덮인 나무에 그늘진 길로 걸음을 이끌었다.

“내 아들과 자네의 혼인이 자네가 꿈 꿔왔던 결합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네. 내 아들도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테지만, 불평은 하지 않았지. 토르는 지난 몇 년간 겸손하는 법을 배웠다네. 그 날 이후로….”

오딘의 시선이 공기를 가로질러 조용히 날갯짓을 하는 새 쪽으로 향했다. 오딘이 자기가 하던 말을 잊어 버린 게 틀림없다고 로키가 생각할 찰나에, 오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좌우지간에, 이런 모습을 보니 좋구나. 자네가 처음 이 곳에 도착했던 날에는 너무도 침울해 보였는데.”

로키는 뺨 안쪽을 꽉 깨물었다. 도착했다니! 로키가 무슨 유람선에 올라탄 후 자발적으로 아스가르드 땅 위에 발을 내려 놓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로키는 무슨 대답이든 건네야 했다.

“그렇지요. 아이를 가지게 되어 정말로 기뻐요.”

로키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대답했다.

“이런 일이 제게는 가능치 않으리라 생각했던 적도 있습니다.”

“아, 그렇지.”

오딘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네의 몸 크기 문제가 있으니.”

두 사람은 구부러진 길을 돌아, 얇은 얼음 덮개가 씌워져 있는 연못을 따라 걸었다. 로키는 두 사람이 프리가의 동상이 있는 작은 공터를 피해서 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다시 오딘이 입을 열었을 때, 두 사람은 나이 많고 여윈 나무 가까이에 도달해 있었다.

“날 바보 같다고 생각하겠지. 손주 하나에 이렇게 반응하는 모습이 말이다.”

로키가 항의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오딘이 손을 내저으며 말을 막았다.

“아니다, 내가 바보라는 것은 사실이니까. 지금까지 나는 너무도 많은 실수를 저질렀지. 이 아이가 그 모든 일을 지워 없애 주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시대가 끝나기 전 조금이나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 뿐이구나.”

오딘의 젖은 눈이 먼 곳을 향하며 깜빡였다.

자기 배에서 자라고 있지도 않은 것을 이 늙은이가 이토록 원한다는 사실에, 로키는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진실을 알게 된다면 오딘은 아마 죽도록 괴로워할 것이다. 그래서 뭐? 폭군이 죽어 소멸하든 말든 상관 없다고, 로키는 생각했다. 아스가르드의 모든 것이 뒤흔들리든 말든 로키의 알 바는 아니었다. 무사히 목숨을 부지한 채 이 곳에서 도망칠 수만 있다면 로키에게는 애도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왕이 요란하게 코를 훌쩍 하더니, 자기 팔꿈치에 둘러 있는 로키의 손을 만졌다.

“내 아들이 적어도 한 가지는 제대로 한 것 같구나.”

오딘이 비틀린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내가 그간 내 아들에게 회의감을 품고 있었다는 점은 시인 해야겠구나. 날 꽤나 자주 실망시켰거든.”

오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올파더가 가장 총애하는 자식의 위치가 헬라에서부터 토르로 옮겨 오려면, 그 불량한 아들에 대한 올파더의 시각을 바꾸어 놓아야만 했다. 로키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요툰헤임의 왕세자가 오딘슨의 명예를 변호하는 말을 하리라고는.

“아드님도 사실 그렇게 가망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로키가 입을 열었다.

“그 동안 자기 삶에서 겪었던 사건사고와 비통에도 불구하고, 아드님은 스스로가 꽤 총명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고…

(벽감 안 쪽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 그리고 토르의 속임수에 거의 속을 뻔 했던 로키.)

“…사려 깊고…”

(부드러운 잔디밭 위에서 누렸던 생선과 꿀 케이크 식사.)

“…현명하고…”

(자기가 사랑해 마지 않는 빗줄기 아래 서 있는 야수.)

“…다정하고…”

(로키의 손 안에 들린 책과, 로키의 곁에 밀착해 있는 토르의 따스한 몸.)

“…온화한 모습도 보여 주었지요.”

(로키의 어깨 위에 망토를 둘러 주던 커다란 손.)

“아드님은 분명히 좋은 아버지가 될 겁니다.”

(번쩍 들려 조랑말 위에 올라 타던 작은 어린아이.)

“그리고 좋은 협력자가 될 것임에도 틀림 없고요.”

(로키가 그 쪽이 더 낫다고 말해 주었던 순간부터, 늘 뒤로 길게 늘어뜨려져 있던 노란색 머리카락….)

로키가 생각을 멈춘 것과 동시에 로키의 두 발도 멈춰 섰다.

불가능한 일이다. 저 모든 말이…거짓이 아니었을까?

대체 난 뭐가 문제인 거지?

오딘이 터뜨리는 웃음 소리에, 로키는 그 상념에서 빠져 나왔다.

“토르가 자네 같은 이에게서 그런 찬양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어쩌면 토르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지도자의 자리에 더 잘 어울릴 지도 모르겠구나.”

정신 똑바로 차려. 로키는 스스로에게 일렀다. 로키는 왕에게 최대한 매력적인 웃음을 던졌다.

“그렇고 말고요. 남편은 왕좌가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마치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만 같지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이제 나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구나.”

오딘이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다시 산책로를 따라 왔던 길을 돌아 가기 시작했다.

“토르가 처음 태어났을 때는 말이다. 나도 토르가 내 후예가 될 것이라 확신을 하고 있었지. 하지만 미드가르드에서의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오딘이 얼굴을 찡그렸다.

“토르도 제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끔찍한 실수였지요. 큰 교훈도 얻었을 테고요.”

마치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올파더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러고 난 후 헬라가 매우 강력하게 성장하기 시작했지. 헬라에게는 조금 더 철저한 훈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너무도 피곤하구나. 전쟁이 나를 늙은이로 만들어 놓고 말았고, 나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만큼 내 자식들을 잘 다스리지 못 하고 있어. 내 사랑하는 아내 없이는 더더욱이 힘든 일이고.”

로키의 가슴 속에서 조그만 희망이 번뜩였다. 꿈 속에서 프리가를 만난 것은 몇 번 뿐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만으로도 로키는 왕비가 위대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초췌한 왕에게 헬라를 몰아내야 한다는 점을 설득시킬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왕비일 것이다.

로키가 다시 입을 열자 숨결이 공기 중에 맴돌았다.

“지금 왕비님께서 여기 계셨다면, 폐하께서 무슨 일을 하셔야 할지 알려 주셨겠지요. 왕비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을 지 폐하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나요?”

오딘의 발걸음이 흔들렸다.

“왕비는….”

“왕비님께서는, 폐하께서 옳은 일을 하지 못할 만큼 늙지는 않았다고 하셨을 겁니다.”

로키가 몰아붙였다.

왕이 가슴에다 손 하나를 가져 갔다. 가쁜 호흡으로 가슴이 아래위로 들썩이고 있었다.

“옳은 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기만 한 일은 아니다.”

왕이 쌕쌕대는 소리를 냈다.

“헬라는 분명히…헬라는….”

“올파더시여?”

로키는 발을 멈춘 후 오딘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오딘의 얼굴이 시뻘개져 부어오르고 있었다. 주름으로 쭈글쭈글한 눈썹으로부터 땀방울이 배어 나왔다. 로키는 놀라 눈썹을 치켜세웠다.

“폐하, 괜찮으신가요?”

“내 아들에게 말해 주거라….”

오딘이 숨을 헐떡이더니, 눈바닥 위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토르에게…”

그러더니 오딘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흰족제비를 두른 거대한 형체가 바닥 위에 보기 좋게 축 늘어졌다.

“토르에게 뭘 말해 주라는 거죠?”

로키는 무릎을 꿇고 왕의 넓은 어깨를 흔들었다. 왕이 다시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왕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내려갔다를 반복했지만, 왕은 깨어나지 않았다.

“올파더!”

로키의 시선이 빈 정원을 향했다.

“여기 누가 좀 도와 줘요!”

로키가 고함을 질렀다.

“폐하께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보이지 않는 통로에서부터 근위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쓰러진 군주를 향해 몰아 닥치는 병사들의 뿔 달린 투구가 겨울 태양 아래서 빛을 발했다. 병사들이 오딘을 데리고 성 안으로 돌아갔고, 로키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그 뒤를 따랐다. 중대한 짐을 짊어진 채 병사들은 복도를 따라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고, 가신들과 시종들 곁을 휙 스쳐 지나갔다. 로키는 그들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다.

“오딘슬립이야.”

그 사람들이 속삭였다.

“또 오딘슬립에 빠져 드셨어.”

그들은 왕의 사저로 보이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로키는 토르가 그 장소를 피하라고 했던 말을 희미하게 기억해 냈다. 하지만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로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의 문장이 새겨진 채 단단히 빗장 걸려 있는 위풍당당한 황금 대문이 눈에 들어오자, 로키는 그냥 돌아가야 할지를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왕이 무엇 때문에 아픈 것인지를 알고 싶었던 로키는 계속 따라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근위병들은 로키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방으로 올파더를 모시고 갔다. 에시르 산 선박 같은 모양을 한 거대한 침대가 방 내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오딘의 잠자는 형체가 고운 여우 털가죽에 감싸진 채 그 곳에 고이 놓여졌다. 경비병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동안 로키는 문가 쪽에서 맴돌고 있었다. 뒤이어 방으로 쏟아져 들어온 자문가들나 다른 궁중 가신들 또한 로키가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마침내 토르가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오기 전까지 아무도 로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로키.”

토르가 로키의 두 팔을 움켜쥐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도무지 모르겠어.”

로키가 불쑥 내뱉었다. 이상하게도 이 털로 덮인 얼굴을 보니 안도감이 밀려왔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를 이제는 누군가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뿐인데, 바로 다음 순간 폐하께서 쓰러지셨어. 도무지 깨어나지를 않으셔. 혹시 폐하께서….”

“아버지는 괜찮으실 거야.”

토르가 안심시키듯 일렀다.

“몇 세기마다 한 번씩 아버지께 들이 닥치는 잠이야. 아버지께서 행사하셔야 하는 위대한 능력의 결과이지. 아버지는 휴식하실 거고, 다시 새로이 힘을 되찾은 후 깨어 나실 거야.”

“아.”

로키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왜인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올파더는 로키의 적이었고 죽는 편이 로키에게는 더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토르는 엄청난 고통에 잠겨들 것이다. 특히 어머니가 그렇게 되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 생각은 하지 말자.

“괜찮으실 거란 말이지.”

로키가 그 말을 시험해 보기라도 하듯 입을 열었다.

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토르의 손이 위로 올라와 로키의 두근대며 박동하는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엄지손가락이 턱 각진 부분을 쓸어 내렸다.

“미안하군. 오딘슬립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얼마나 두려운 광경일지 잘 알아. 나도 처음 아버지께서 잠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는 어린 아이였는데, 그 후로 몇 주 동안이나 악몽을 꿨지.”

로키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이 야수 같은 왕자를 대하던 예전 자신의 싸늘한 태도를 더듬어 찾으려 애썼다. 로키는 작게 코를 훌쩍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토르의 손길에서 빠져 나왔다.

“두렵지는 않았어.”

로키가 속삭였다.

“내가 왕을 독살한 거라고 누군가 추궁할 까봐 걱정했을 뿐이야.”

토르의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띄워졌다. 하지만 행여나 로키가 두려워 했더래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토르가 말해 줄 수도 있기 전, 키 커다란 인영이 방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헬라였다. 헬라는 검은색과 녹색으로 된 전신 갑주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머리에 쓴 가시 돋친 투구가 벽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수 천 개의 까마귀 깃털로 짜여진 망토가 어깨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방 안의 모든 시선이 헬라를 향했고, 말소리도 뚝 끊겼다.

“아버지께서 또 잠에 드셨군.”

헬라가 선언했다.

“아버지의 홀은 어디 있지? 내게 가져 오거라.”

자문가들이 허둥대며 그 명령에 따르는 동안, 로키가 토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게 무슨 뜻이야?”

토르의 턱이 단단히 죄어 들었다.

“아버지의 홀은 통치자의 상징이거든. 아버지께서 주무시는 동안 아버지를 대신해 누군가는 왕좌를 지켜야만 하니까.”

로키는 숨을 헉 들이켰다. 헬라가 왕좌에 앉는다고? 안 돼, 안 된다.

“헬라를 막을 수 없어? 뭐라도 해 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토르가 빠르게 속삭였다.

“내 능력은 여전히 속박되어 있는 상태야. 내 능력 없이는 임시로라도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 맡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 그리고 지금 당장은 헬라가 아버지의 가장 총애하는 자식이라는 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고.”

무력함이 진흙탕처럼 로키를 감싸왔다. 비쩍 마른 자문가 한 명이 황금 지팡이를 손에 든 채 다가오는 모습을 로키는 지켜 보았다. 헬라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홀을 집어 들었다. 헬라가 턱을 번쩍 치켜든 채 무시무시한 눈으로 방 안을 둘러 보며 모인 사람들의 모습을 시선에 담았다.

“부디 올파더의 휴식이 짧고 편안한 시간이 되기를.”

헬라가 말했다.

“올파더가 깨어날 때까지 이 여왕이 자네들을 지킬 것이다.”

군중들로부터 동의한다는 의미의 큰 외침이 들려 왔다. 죽음의 여신이 토르에게로 눈을 돌렸다.

“이런 평화의 시대에는 말이다….”

헬라가 입가를 비스듬히 끌어 올리며 말했다.

“아버지가 깨어나실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헬라는 까마귀 깃털로 된 망토를 휘날리며 방에서 나가 버렸다.

방이 재빨리 비워지기 시작했다. 경비병 몇 명만 오딘의 침대를 지키기 위해 남았다. 토르도 역시 로키의 팔을 붙잡고 방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사저에서 시간을 오래 끌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군.”

토르가 말했다.

“어디 가는 거야?”

로키가 물었다.

“헤임달과 이야기를 나눠야 해. 이 새로운 국면 때문에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겠어.”

에시르 왕자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기척 없는 복도로 들어섰는지라 그 곳에는 두 사람 뿐이었다.

“헬라는 이런 기회를 그냥 넘겨 버릴 사람이 아니야. 헬라가 홀을 쥐고 있는 순간 순간마다, 우리는 위험에 빠져들게 될 거야.”

“그럼 얼른 헤임달을 찾으러 가자고. 시종들이 지내는 곳은 어느 쪽이지?”

토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나 혼자 갈 거야. 당신은 방에 가서 문을 잠그고 있어. 혹은 서재로 가든가. 거기서는 아무도 당신을 찾지 못 할 거야.”

“난 방에 가서 문을 잠그고 있고 싶지 않아!”

로키가 소리를 질렀다.

“난 돕고 싶다고.”

토르가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키….”

“왜 날 계속 네 계획에서 배제시키려 하는 거야? 나도 너와 머리를 맞대고 일해야 하는 입장이라고!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을 안전하게 해 주려는 거야.”

토르가 악다문 이 사이로 내뱉었다.

“그 노력은 실패한 거라고 여겨!”

로키가 두 사람이 걸어온 쪽 복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네 누이가 아스가르드의 왕좌에 앉아 있어. 네 아버지는 깊숙이 잠에 들어 있고. 네 어머니는….”

“죽었지! 그리고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당신 또한 그렇게 될 거야!”

토르가 고함을 쳤다.

로키는 혀를 질끈 씹었다. 그래, 이 야만인이 절대 자기 말을 믿어줄 리가 없었다. 증거 없이는 프리가의 유령 같은 전언을 절대 곧이곧대로 들어줄 리가 없다. 혈관을 타고 싸늘한 기운이 밀려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 사람이 다시 등장했군.”

로키가 중얼거렸다.

“포악하기 그지 없는 감금자가 말이야. 언제쯤 다시 만나게 될지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토르의 열기 어린 시선 사이로 절망스러운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부탁이야.”

토르가 넝마처럼 너덜너덜하게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줘. 방으로 돌아 가.”

“내 감금자가 시키시는 대로 해야지.”

로키는 발을 돌려 토르의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 해질녘에 목욕을 하겠다고 헤임달에게 전해 줘.”

로키는 어깨 너머로 쏘아 붙였다.

모퉁이길에 도달해 몸을 돌릴 때 까지 로키는 오만한 자세로 걸었다. 그런 후 로키는 벽에 몸을 축 기대 세우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생각을 해야만 했다.

그래, 서재로 가야겠군.

불행히도 서재에 있는 책 수집품들조차 로키에게 큰 위안을 전해 주지는 못했다. 혼자 있으니 서재 안이 너무 휑뎅그렁하게 느껴졌다. 환하게 불이 밝혀진 횃불마저도 로키의 고독함을 덜어주지 못했다. 책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프리가를 깨어 있는 세상으로 불러올 수 있을 만한 가르침을 찾기를 바랐지만, 로키가 읽은 모든 책에는 똑같은 이야기만 쓰여 있었다. 마력이 필요했다. 아주 엄청난 양의 마력이. 로키가 한숨을 쉬며 다른 책을 집어 드는 중에도, 여전히 황금 고리들이 로키의 손목에서 쨍그랑 소리를 내고 있었다. 로키는 프리가가 제안했던 차선책을 떠올렸다. 빈약한 마술을 통해 세계와 세계 사이로 통로를 마련해서, 두 사람이 원할 때마다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하자던 그 이야기. 하지만 별자리표를 확인해 본 바로는 그 방법에도 역시 행운은 따르지 않았다. 아스가르드의 두 개 달이 모두 보름을 맞으려면 아직 삼 주의 시간이 남았다. 그 전에는 성공할 가망이 없었다.

로키는 숨을 내뿜으며 책을 탁 닫았다. 삼 주의 시간 동안 헬라가 무슨 해악을 저지를 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기다리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적어도 그 시간 동안 필요한 도구들을 준비할 수는 있을 것이다. 로키는 필요한 목록을 완벽히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을 때까지 책을 샅샅이 뒤졌다. 어떤 것들은 구하기 쉬워 보였고, 어떤 것들은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뭐, 시간이라면 충분히 있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글쎄, 이제 로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이 맞선 위험을 잠시나마 잊어 보려 노력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리고, 왕에게 토르의 장점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 놨던 그 사건을 좀 잊어버리고 싶기도 했고.

모든 왕국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겠지만, 책임을 잊어버리고 싶을 때 읽으면 가장 좋은 이야기는 약간 자극적이고 외설적인 창작물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 (물론 저질스런 사람들)은 그런 창작물이 뇌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라 여긴다. 로키 또한 그러한 사람들 중 하나였는데, 요툰스타드에 있는 로키의 개인 서재에는 혼자서만 즐겨야 하는 그런 문학들이 몇 십 권은 꽂혀 있었다. 다른 방법으로 해소할 수 없었던 무언가 때문에, 그 책들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프리가의 서재는 모든 주제를 다양하게 망라하고 있었고, 그러한 주제에 있어서도 야박하지 않았다. 에시르 종족들의 감수성에 들어맞는 다양한 종류의 행위를 다룬 작품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로키는 (삽화가 있는 것도 있었다!) 내심 기뻤다. 상스러운 언어와 상스러운 삽화들에 흥미가 돋우어져, 로키는 책 한 더미를 가지고 방으로 돌아온 후 열쇠로 문을 잠궜다.

다시 자기 방 안에 홀로 남겨진 기분은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그 동안 토르와 허리 밑으로 몸이 붙어 있는 것처럼 함께 지내서 그런지, 토르와 떨어져 있는 느낌이 이상했다. 로키는 작은 방 안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방을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들어 보려 노력했다. 로키는 털망토를 문 옆에 걸어 놓은 후 실내화도 문 발치에 놓았고, 가지고 온 외설적인 작품들은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로키는 벨트 주머니에서 조그만 황금 말을 꺼낸 후, 창문으로부터 새어 들어온 희미한 빛이 비추이는 사이드 테이블 위에 그 물건을 놓았다.

그 장식물을 쥔 로키의 손가락이 잠깐 씰룩했다. 루비와 사파이어 보석이 햇빛을 받아 반짝 빛을 냈다.

정말이지 못생긴 물건이야. 로키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 물건은 로키의 것이었다.

헤임달과 몇 명 다른 시종들이 욕조를 가지고 방에 들어왔다. 로키는 목욕을 했다. 로키는 일부러 헤임달에게 토르 이야기도, 오딘슬립에 대해 토르와 나눈 대화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묻지 않았다. 헬라에 관한 논의에 자신은 환영 받지 못하는 것이 틀림 없었으니 말이다.

조금 후 깨끗한 가운을 걸치고 어깨 위로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로키는 침대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새로 가져온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에시르들의 취향을 위한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들은 꽤 로키의 관심을 끌었다. 건장한 전사들에게 번쩍 들려 가는 여인들, 나무를 등진 채 넓은 어깨를 한 사냥꾼들에게 범해지는 여인들, 푸른 눈을 한 왕자의 성기를 빨아 주는 여인들….

“쓰레기 같군.”

로키는 매 단어 단어를 읽을 때마다 비웃음을 내뱉었다.

그 혐오스러운 감정에 흥분감이 조금씩 섞여 들어올 때까지, 로키는 책을 한 권 씩 탐독했다. 이야기에서 등장한 음탕한 영웅을 작가가 갈색 머리카락으로 묘사할 때마다 로키는 충격에 빠졌다. 당연히 황금색 머리카락이어야 할 텐데…? 왜냐하면…. 글쎄. 왜인지는 잊어 버리라. 그 쪽이 이 인물에게는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게 로키의 의견이었다.

그래. 키가 커다랗고 몸이 건장한, 노란색 머리카락을 한 나무꾼. 장작더미 곁에 도끼를 기대 놓은 채, 자유로운 손으로 여인의 치마를 머리 위까지 들어 올리는 그런 남자.

로키의 손이 이불 밑 다리 사이로 향했다.

조금 후, 손가락은 애액으로 젖어 있고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로키는 책을 옆으로 밀어 놓았다. 로키의 흐릿한 시선이 머리맡에서 깜빡이는 양초를 빤히 응시했다. 얼마나 외롭고 비참했으면, 이런 아스가르드 쓰레기에 몰두해 버린 걸까? 그리고 그 책들을 읽으며, 다른 사람도 아닌 토르를 상상하다니.

그 야수가 로키의 마음 속을 유령처럼 따라다니는 것은, 그저 그 동안 두 사람에게 강제되었던 가까움 때문일 것이라고, 로키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 의미도 없었다. 지치고 지루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만들어 낸 상상물에 지나지 않았다.

로키는 이렇게 스스로를 안심시킨 채 잠에 빠져 들었다. 하지만 로키는 털이 수북한 뺨이 자신의 살갗을 쓸고 지나가는 꿈을, 거친 손이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고 찍어 누르는 꿈을 꾸었다. 로키는 가짜 봄날에 녹아내린 얼음 색깔을 한 눈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로키는 앞뒤가 없는 쾌락의 꿈을 꾸었다.

그리고 로키는 또다른 꿈을 꾸었다. 이번 꿈이 가장 불쾌했다. 로키는 해초로 만든 침대 위에서 우유빛 피부의 연인 옆에 느긋이 늘어져 있는 꿈을 꾸었다. 조그만 발소리가 두 사람 주위로 온통 울려 퍼지고 있었다. 꿈 속에서 로키는 고개를 들어 그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 건지 확인해 보았다. 꿀케이크 모양을 한 문가에 조그만 요툰인 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가 통통한 파란색 팔로 문틀을 붙든 채 로키를 등지고 서 있어서, 로키는 그 아이의 어두운 머리 뒤통수밖에 볼 수 없었다.

“길을 잃었니?”

로키가 조그만 아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꿈 속의 아이가 그 때 몸을 돌려 웃어 보였다. 아이의 두 눈이 으스스한 푸른 색을 띠고 있었다.

로키는 해초 침대 위에서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우유빛의 창백한 팔이 로키 쪽으로 뻗어 왔다. 로키는 몸을 돌려 팔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았다. 토르가 그 아이와 똑같은 푸른색 눈으로 로키의 눈을 마주했다. 토르가 로키의 이름을 불렀다. 혀 위에서 달콤하게….

로키는 숨을 헉 하고 들이키며 잠에서 깨어났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후, 로키는 땀에 젖은 검은색 머리카락을 이마에서 걷어 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꿈일 뿐이다. 터무니 없는 꿈. 로키는 숨을 몰아 쉬었다. 현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가 다시 듣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 거지?

로키는 가슴에 대고 무릎을 끌어 안았다.

“이거 좋지 않은 걸.”

로키가 방 안의 어둠에다 대고 말했다.

대답은 없었다. 정말로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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