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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로키/번역]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 (11/16)

토르로키 / Thorki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왕세자와 야수)"

by triedunture


원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5267873


  • 작가님께서 번역은 출처를 포함하여 자유롭게 하라고 명시하셨습니다. (https://i.imgur.com/r6PfDqx.jpg)
  • 에시르 토르x요툰 로키 정략결혼 AU입니다. 구전동화 느낌이 살짝 끼얹어진 작품으로 이야기 중간중간에 화자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 로키를 비롯한 모든 요툰 종족은 인터섹스(자웅동체)라는 설정입니다. 엠프렉 언급이 있습니다.
  • 요툰헤임에는 성별의 구분이 없고 누구나 아이를 밸 수 있기 때문에, 어머니/아버지라는 단어 대신 (주로 동물 번식에서) 누가 씨를 뿌렸고 누가 새끼를 배었는지 칭하는 단어인 dam/sire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 단어들은 원문에서 사용한 의미와 가장 비슷한 단어인 '종빈/종모'로 번역합니다.



*    *    *


11장.


힘없는 겨울 햇빛이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왔다. 로키는 햇빛이 파고드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잠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 때 로키가 베고 있던 베개가 로키의 뺨 밑에서 한숨을 쉬었다. 로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자기가 몸을 의지하고 있던 널찍한 우유빛 피부를 로키는 빤히 응시했다.

토르. 그제서야 기억이 되돌아왔다.

두꺼운 손가락이 아직도 로키의 머리카락에 얽혀 있었다. 로키는 고개를 들어 토르가 이미 깬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자는 동안 로키의 입에서 침이 흘러내렸는지 뺨이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로키는 황급히 뺨을 닦아 냈다.

“안녕.”

토르가 말했다. 토르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나지막했다. 로키가 침을 흘린 걸 알아챘다 할지라도,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만한 예의는 있는 모양이었다.

“좋은 아침이야.”

로키는 똑같이 예의 바르게 응답해 주었다. 로키는 다시 토르의 가슴 위로 머리를 기대며 먼 곳을 응시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는 거지? 로키는 한 번도 이런 상황에 처해본 적이 없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 될까 봐 두려웠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토르의 손가락이 로키의 새까만 머리 가닥가닥을 따라 하릴없이 춤을 추듯 쓰다듬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방 안은 조용했고, 사실 꽤 좋은 기분이었다. 로키는 얼굴 옆으로 손을 가져가 토르의 피부와 자기 피부가 대조되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하늘과 구름. 바다와 흰 모래. 눈만 다시 감으면 다시 잠에 빠져들어, 또다른 꿈에 잠겨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밤인가?”

토르가 마침내 입을 열어 물었다.

“뭐라고?”

로키가 토르의 가슴팍에다 대고 얼굴을 찌푸렸다. 간밤의 밀회가 이 야만인의 머리를 어떻게 만들어 놓은 모양이었다.

“해가 떠오르고 있잖아. 대체 왜 밤이라는 거야?”

“아직 밤이라면….”

토르가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시간도 아직 끝나지 않았을 테고…당신과 다시 한 번 사랑을 나눌 수 있을 테니.”

로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던 손길이 잠깐 그 자리에서 멈췄다.

토르의 팔 안에서 로키의 몸이 뻣뻣해졌다. 아침 햇살 아래에서 나누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생각이었다.

“토르, 우린 그러면 안….”

로키가 얼마나 그러길 원하든 상관 없었다.

“미안해. 내가 주제넘은 소리를 했군.”

토르가 빠르게 로키의 몸에서 떨어지더니 눈 깜짝할 새에 저 멀리까지 물러났다. 토르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 앉았고, 로키는 이불과 시트 한가운데 홀로 남아 제정신을 되찾으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토르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손으로 얼굴과 수염 위를 쓸어 내렸다.

“이런 이른 시간에는 머리 속이 엉망이라 말이지. 내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로키는 토르의 맨 등을 바라보며 뭔가 대답할 말을 절박하게 찾아 헤맸다. 침묵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혀 위에서 수월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모욕으로.

“네 머리 속은 하루 종일 엉망이잖아.”

토르가 작은 웃음을 뱉었다. 토르의 그 두 눈과 마찬가지로, 억지로 짜 낸, 거짓의 웃음이었다. 로키는 그 눈을 바라보고 싶었다. 저 넓은 등의 모습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로키는 토르의 어깨를 따라 점 찍혀 있는 갈색 주근깨를 쓸어 보려 손을 뻗었다. 주근깨. 에시르 책에서 배운 말이었다. 왕자와 결혼한 어떤 건강한 농장 여인의 코 위에 주근깨가 뒤덮여 있다는 묘사가 있었다. 하지만 로키는 마음을 고쳐 먹고 다시 손을 뒤로 뺐다.

로키가 과연 무슨 말을 꺼낼 수 있을까? 로키의 마음, 심장, 그 모든 것이 온통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문이 덜컥 열렸다.

로키는 침대 위에서 펄쩍 뛰어 올랐다가, 이불을 움켜쥐고 황급히 가슴 위로 끌어 올렸다. 아스가르드의 전사적 본능에서인지 토르가 번개처럼 재빨리 움직여 로키를 자기 몸으로 가려 왔다. 하지만 문가에 서 있는 것은 그저 텅 빈 눈을 한 헤임달일 뿐이었다. 헤임달은 아침 식사가 놓인 접시를 들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왕자님.”

신하가 방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헤임달!”

토르가 숨 막힌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고선 토르가 로키의 긴장한 눈을 마주하며 무언의 질문을 던졌다. 로키는 맹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로키는 두 사람의 이번 밀회를 그 누구에게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토르의 가장 신뢰하는 오른팔에게라도 마찬가지였다.

“음….”

토르가 헤임달에게 건넬 말을 찾아 헤맸다.

“이런 이른 시간에 웬일인가?”

“언제나와 똑같은 시간입니다, 왕자님.”

헤임달이 조용히 책망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헤임달이 창문 쪽으로 미끄러져 가더니 커튼을 열어 제꼈다.

로키는 반갑지 않은 불빛에 몸을 움찔했다. 헤임달이 맹인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릴 까봐 두려운 것은 사실이었다. 로키는 문 옆 고리에 매달려 있는 자기 로브를 간절히 응시했다. 이 나이 많은 신하 몰래 방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로키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헤임달이 그 겉옷 걸이 쪽으로 다가갔다.

“오늘 입으실 겨울 외투를 솔질해 드릴까요?”

헤임달이 그 문제의 의복 쪽으로 손을 뻗으며 물었다.

로키는 비명을 겨우 삼켰다. 헤임달의 손이 로키의 실크 로브에 닿을 것이고, 두 사람의 간밤의 회동 또한 발각될 것이다! 로키는 토르의 몸에 딱 달라 붙은 채 토르의 팔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안 돼!”

토르가 거의 고함을 지르다시피 했다. 헤임달이 동작을 멈춘 것을 확인하고 난 후, 토르는 조금 더 침착한 목소리로 일렀다.

“아니. 괜찮네, 헤임달. 어제 내가 직접 솔질을 열심히 해 놓았지.”

“그러셨습니까?”

헤임달이 눈썹 하나를 치켜 올려 보이더니, 다시 식사가 놓여 있는 곳으로 돌아가 접시를 이리저리 뒤적이기 시작했다.

“잘 됐군요.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신지요, 왕자님?”

“아니, 없네. 가서 다른 일을 보도록 하게. 다른 곳에서 말이야.”

토르가 말했다.

“그러면 이만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헤임달이 문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토르와 로키는 동시에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헤임달이 문고리를 붙잡은 채, 지금에야 막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왕세자님의 아침 식사도 여기로 가져다 드리도록 할까요? 아니면 왕세자님의 방으로 가져다 드리는 편이 나으실런지요?”

로키는 당혹감에 차 얼어 붙었다. 그 옆에서 토르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헤임달? 로키는 여기 없….”

“두 분 다 무슨 경주마처럼 숨을 몰아 쉬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 귀는 아직 둘 다 멀쩡해서 말이지요.”

헤임달이 말했다.

로키는 토르의 등에 이마를 툭 기대며 씨익대는 소리를 냈다.

“망할.”

로키가 이렇게 내뱉었다. 그 말이 로키의 모든 감정을 망라하고 있었다.

헤임달이 미소를 짓더니 침대 위의 한 쌍을 향해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러면 여기로 가져와 드리도록 하지요. 그리고 갈아입을 옷도 갖다 드리도록 할까요? 두 분 다 편안히 있으시길.”

그 말을 남긴 후 그 자식은 방에서 거의 날아가듯 나가 버렸다.

“헤임달이 알아.”

로키가 신음을 내뱉었다. 로키는 침대에서 빠져 나온 후 실크 로브를 집어 들었다. 한 순간도 더 발가벗고 있을 수가 없었다.

“헤임달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을 거야.”

토르가 이리저리 얽혀 있는 시트 더미 한가운데 앉더니, 이렇게 말했다.

“비밀을 지키는 데는 뛰어난 사람이거든.”

“헤임달이 비밀을 누설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야.”

로키는 부드러운 로브 소매에 팔을 홱 집어 넣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헤임달이 알고 있다는 게 부끄러운 거야. 이제 헤임달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지…? 으으…속이 안 좋아질 것 같아.”

로키는 로브 끈을 허리에 꽉 죈 후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렸다. 이 야수 같은 에시르와 잠자리를 한 것에 모자라, 자신을 만져 달라고 애원을 했고, 그 자의 체액에 뒤덮여 버리고 말았다. 토르가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봤다는 사실도 이미 충분히 괴로운데, 이제 헤임달까지? 헤임달은 토르의 두 번째 아버지나 마찬가지인 사람이었다! 늪지에 빠져 버린 사냥꾼처럼, 수치심이 로키를 삼켜 버리려 위협하고 있었다.

로키는 아직 졸음이 드리워 있는 눈 위에 손가락을 대고 누르며 깊게 숨을 들이 마셨다. 다시 손을 뗐을 때, 토르가 아까의 모습 그대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토르의 얼굴에 근심 어린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토르의 눈이 로키의 시선을 피해 벽난로 안의 다 탄 장작 쪽으로 향했다.

“어젯밤 생각만 해도 속이 안 좋아진다니 미안하게 됐군.”

토르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충분히 즐겼을 거라 생각했는데.”

로키의 가슴을 드러내고 있던 로브가 벌어져 열리려 해, 로키는 황급히 손을 가져가 목덜미까지 옷깃을 감싸 쥐었다.

“어젯밤은 꼭 필요한 기분 전환이었을 뿐이야.”

자신의 체면 뿐 아니라, 토르의 체면을 위해서 해 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 말고도 더 중요한 일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잖아.”

“그렇지. 그걸 잊어버리다니 바보 같긴.”

토르가 매섭게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로키는 그 목소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도 참 아홉 왕국에서 제일 가는 바보가 따로 없군 그래.”

토르가 침대에서 빠져 나오더니 벗은 몸으로 옷장 쪽으로 향했다. 토르는 옷을 찾아 거칠게 옷장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로키는 예의 있게 행동하려 그 벌거벗은 모습으로부터 시선을 피해 주었다.

“네가 바보 같다고 한 적 없어.”

로키가 말했다.

“내가 말하려 했던 건 그저….”

“당신이 뭘 말하려 했는지는 상관 없어.”

토르가 옷을 입으며 대답했다.

“원한다면 여기 있는 아침 식사를 들도록 해. 나는 떠날 테니.”

토르의 퉁명스런 어조에 로키의 목 뒤 털이 온통 곤두서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가서 뭘 하려고 하는 건지 물어봤자 대답 안 해줄 거지?”

로키 역시 비슷한 어조로 쏘아 붙였다.

“정확히 짐작했군.”

옷 끈을 둘러매고, 가죽 바지를 끌어올려 입더니, 토르는 아침 식사 접시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문 쪽으로 향했다.

“좋은 하루 되길, 왕세자.”

문이 너무 시끄럽게 쾅 하고 닫히는 바람에, 로키는 펄쩍 뛸 뻔 했다.

저 멍청이가 이젠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일까? 대체 무슨 권리로? 로키는 어제 분명히 일렀다. 딱 하룻밤의 잠자리가 될 것이고, 다음 번은 없을 거라고. 토르는 대체 뭘 기대한 거지? 로키더러 옥상에 올라가서 어젯밤 일에 대해 고함고함이라도 치기를 바라는 건가? 머리가 돌아버리지 않고서야.

로키는 차디차게 식어 있는 벽난로 옆의 쇼파에 앉은 후, 텅 빈 벽난로 속 구렁을 빤히 응시했다. 동지애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로키는 싸늘한 손가락을 입술 쪽으로 가져 갔다.

로키는 분명히 하룻밤 만이라고 말했다. 그 이외에 더 로키가 제공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다고?

헤임달이 식사와 로키의 검은색 옷을 가지고 돌아 왔다. 오직 한 명의 심장 박동 소리, 한 명의 거친 숨 소리, 그리고 로키가 쇼파에서 일어서려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을 때 황금 고리가 낸 짤랑거리는 소리를 들은 헤임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누가 왕자님을 불러 내신 건가요?”

헤임달이 물었다.

“아니.”

로키는 헤임달의 손에서 옷을 뺏어 들었다. 로키는 어젯밤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토르와 관련된 그 어떤 이야기도 나누고 싶지 않다는 어조를 확실히 해 보였다.

“왕자는 그냥 떠났어.”

“떠나다니요? 어디로요?”

“내가 어떻게 알겠어? 내가 무슨 사육사도 아니고.”

로키의 그 대답에 즉시 헤임달의 입이 꾹 닫혔고, 로키는 평화로운 상태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목욕을 준비해 달라고 이야기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시종들이 뜨거운 물이 든 양동이를 들고 터벅터벅 걸어 들어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본다는 생각이 내키지가 않았다. 자신의 살갗에 배여 있는 토르의 체향과, 다리 사이에 불편하게 끈적대는 감각을 그저 무시하고 지내야 할 것이다. 로키는 아침 식사 역시 차게 식어 버리도록 놓아 두었다. 궁중 요리사들이 오늘 두 사람 다 식욕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라고 하라. 로키에게는 고민해야 할 다른 더 시급한 문제들이 있었다.

로키는 성 복도를 따라 활보하기 시작했다. 새로이 얻은 자유를 마음껏 즐기고 싶었지만, 자신에게서 모든 즐거움이 박탈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옆을 지나치는 아스가르드인들의 속삭임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로키를 따랐다. 하지만 로키는 그들에게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로키에게 필요한 것은 그 자들의 환대가 아니라, 양초였다.

당신이 마술에 한 번이라도 손을 대 본 적이 있다면, 마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이 시전하는 마법 주문은 그 어떤 것이든 새 양초에 불을 붙이는 행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양초 상업가들이 틀림 없이 그 관습을 과장해 떠벌렸을 테지만, 그것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양초가 그 색깔에 따라 행운을 가져오기도 하고, 미래를 읽어 주기도 하고, 출산의 고통을 덜어주기도 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 주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뭐, 그 모든 마법이 다 실패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마법사에게 괜찮은 양초 불 하나 정도는 남아 있을 테니까.

로키는 자신이 시행해야 하는 소환술에 주황색 양초가 필요할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주황색은 정의의 색깔이었고, 왕비에게는 정의가 간절히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 필요한 물건을 적어 놓은 마음 속 목록은 매우 기나길었다. 약초 몇 개, 거울 조각 하나, 프리가의 개인적인 물품 하나, 그리고 그 이외에 로키의 목표를 향해 기운을 모아 줄 다른 잡동사니 이것 저것. 양초를 구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좋을 것이다. 아주 쉬운 임무일 거라고, 로키는 생각했다. 양초를 보관하는 선반을 찾아 하나 슬쩍 집어 오기만 하면 될 것이다.

로키는 시종의 위치를 상징하는 하얀색 모자를 뒤집어쓴 소녀 한 명을 몰래 따라갔다. 복도를 따라 종종걸음을 걷는 그 시종의 팔에는 작은 초가 한 더미 안겨 있었다. 대회당에 있는 다 탄 양초를 교체하러 가는 길임이 틀림 없었다.

불편한 감정이 로키를 스치고 지나갔다. 요툰헤임의 왕족은 에시르처럼 시종을 두지 않았다. 왕에게 자기 뒷처리를 해 줄 하인 대대가 필요하다는 것은 검소한 요툰인의 감성을 거스르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요툰스타드에 그런 일상적인 일을 도맡아 하는 낮은 계급의 요툰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사람들의 지위는 몇 달 이상을 가지 않았다.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요툰인들은 그런 단조로운 일들을 서로서로 교대로 돌아 가면서 맡았다. 반면 이 곳 아스가르드에서는 헤임달을 제외한 모든 시종들이 각자 정해져 있는 위치에서 태어나고 생을 마친다는 것을, 로키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하지만 로키에게는 그런 계급 체계의 차이에 대해 숙고할 시간이 없었다. 그 양초들이 어디 보관되어 있는지 알아야 했다.

“저기….”

로키가 그 시종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그 소녀가 꽥 소리를 내더니 들고 있던 양초들을 거의 떨어뜨릴 뻔 했다. 상류 계급의 사람이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에 너무나 놀란 듯 했다. 자신을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챈 시종의 놀라움이 더더욱 커졌다. 커다랗게 휘둥그레진 소녀의 두 눈이 로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가, 로키의 눈썹 쪽에 새겨져 있는 혈통 표식을 훑었다.

“네, 왕세자님?”

시종이 새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로키는 소녀를 조금 진정시키려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 방에 놓아 둘 새 양초를 어디서 찾을 수 있나 해서.”

로키가 말했다.

시종 소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바로 어제 양초를 교체해 놓았어요, 왕세자님. 혹시 양초가 벌써…? 세상에, 안 돼. 제가 잊어버린 건 아니겠죠?”

“내 방에 양초를 갖다 놓는 사람이 너니?”

로키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 일은 모두 헤임달의 업무인 줄로만 알았다. 로키가 방을 비웠을 때나, 로키가 잠에 들어 있는 사이에, 로키가 필요로 하던 물건들이 모두 다 방 안에 대령되어 있었다.

“네, 왕세자님. 제가 왕세자님의 방을 정돈하는 일을 맡고 있어요.”

“방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걸.”

소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그런 식이에요, 왕세자님. 왕세자님께서 제 존재를 알아차리시면 안 되지요. 헤임달 님께서 늘 저를 일을 하도록 방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

이 불쌍한 소녀에게 자신이 무례하게 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로키가 혀를 쯧 찼다.

“네 이름이 뭐니?”

“제 이름이요?”

소녀가 멈칫했다.

“왜 제 이름을 알고 싶어 하시는 거죠?”

“음, 그래야 두 사람이 대화를 할 때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있으니까.”

로키가 참을성 있게 대답했다.

“사람들은 날 ‘조그만 자’ 로키라고 불러. 내가 먼저 말해주는 쪽이 도움이 된다면 말이지.”

소녀가 잠깐 주저했다. 팔에 안긴 양초들이 들썩거렸다.

“빌이에요.”

마침내 소녀가 이렇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왕세자님. 제가 무슨 문제에라도 처한 줄 알았어요.”

“문제 같은 건 없어, 빌.”

로키가 약속하듯 말했다.

“그저 내…방 안의 가구와 어울리는 양초를 찾는 것을 도와줄 수 있을까 해서 부른 거야. 양초가 어디 보관되어 있는지 내게 알려줄 수 있니?”

빌이 애처롭게 텅 빈 복도를 둘러 보았다.

“부탁이에요. 제가 갖다 드리도록 할게요. 왕세자님 같은 왕실의 분께서 직접 벽장을 뒤지시도록 만들었다가는 채찍질을 당할 수도 있어요.”

“채찍질이라니?”

로키의 입이 멍하니 벌어져 열렸다.

“농담하는 거지?”

빌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기색이었다.

“왕세자님, 제발….”

빌의 눈이 저 멀리서 황금색 빛을 발하고 있는 대회당 문 쪽으로 흘긋 향했다.

“이미 너무 오래 꾸물거렸어요.”

로키는 충격에 빠진 채 주먹 쥔 손을 허리에다 올려 놓았다. 성내 시종들의 취급에 대해서 토르와 한 번 대화를 나눠 보아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오늘 아침 일을 생각해 보았을 때, 토르가 황송하게도 자신에게 말을 걸어 준다면 말이다. 로키는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하군, 빌. 가서 할 일을 하도록 해. 오늘 중으로 내 방에 주황색 양초 하나만 가져다 준다면 정말 고마울 거야. 주황색이 없다면 노란색이라도 괜찮아.”

“그렇게 할게요, 왕세자님. 감사합니다.”

빌은 양초를 팔에 가득 안은 채 약식으로나마 허리를 꾸벅 숙여 절을 한 후, 황금 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로키는 빌이 떠나는 모습을 무거운 마음으로 지켜 보았다. 이 성벽 안에 죄수로 있는 사람이 자기 혼자 뿐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로키는 서재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이제 목록에서 양초는 지워졌으니, 주문 시전에 도움이 될 만한 프리가의 개인적인 소지품을 찾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책 더미 사이에 왕비가 손수 쓴 일기장이 숨겨져 있을지도 몰랐다.

로키는 그 생각을 하며 모퉁이를 돌다가, 하마터면 헬라와 부딪힐 뻔 했다.

“아, 왕자비로군.”

로키가 헬라의 모습을 올려다 보는 동안, 헬라가 입을 열었다. 헬라의 입술에 히죽거리는 미소가 떠올랐다.

“왜 혼자서 외롭게 성을 방황하고 있는 것이지? 내 동생이 자기 반려를 수행해 줄 예의도 보이지 않은 것인가?”

“왕자는 오늘 아침 다른 할 일이 있었습니다.”

로키가 대답했다. 본능이 도망치라고, 숨으라고, 이 미친 여자에게서 멀리 떨어지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로키는 결연하게 몸을 떨지 않으려 애썼다. 검은색과 녹색의 첨탑 같은 높은 부츠를 신은 헬라의 몸이 로키 위로 우뚝 높이 솟아 있었다. 로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입 안이 모래처럼 꺼끌했다.

“저는 몸에 피를 좀 통하게 해 주려 잠깐 산책을 나온 것 뿐입니다.”

헬라의 날카로운 눈빛이 로키의 몸을 따라 내려 가더니 로키의 배 쪽에 머물렀다.

“아, 그렇지. 이런 연약한 상태에서는 몸 관리를 잘 해야지.”

헬라의 미소가 칼날처럼 더 매서워졌다.

“이리 오게. 나와 함께 걷지. 자네와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군, 작은 거인. 자네의 혼인 의식 이후로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낼 기회가 별로 없었으니.”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헬라는 두 사람이 일생의 숙적이 아닌, 소꿉친구라도 되는 양 굴고 있었다. 로키는 그 제안을 거절할 변명을 생각해 내려 열심히 궁리를 했다. 로키의 시선이 탈출로를 찾아 헤매며 복도 쪽을 이리저리 오갔다. 하지만 복도에는 두 사람 밖에 없었다. 대체 토르는 어디 있는 거지? 로키가 토르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왔지만, 토르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문제라도 있나?”

로키가 주저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헬라가 물었다. 헬라가 안심시키기라도 하듯 한 손을 내밀어 보였다. 손가락 끝의 날카로운 손톱이 보석과 값비싼 금속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헬라가 번뜩이는 이를 드러냈다.

“물지 않으니 걱정 마.”

다른 선택지가 도무지 없었기에, 로키는 결국 죽음의 여신 곁으로 다가섰다. 두 사람은 함께 인적 없는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모든 성내 가신들과 시종들이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다들 일부러 이 사령관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로키는 생각했다. 혹은 공기에서 피 냄새를 맡았는지도 모른다.

“아스가르드에 대한 인상은 어떤가?”

두 사람이 걷는 중 헬라가 물었다. 헬라는 두 손을 뒤로 가져가 포갰다. 전장을 내다보는 사령관의 모습이었다.

“아름다운 곳이지요.”

로키는 거짓말을 했다.

“저도 여기서 아주 편안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헬라가 콧방귀를 꼈다.

“그럴 리가. 아주 추잡하기 짝이 없는 곳인걸.”

로키는 미심쩍게 헬라 쪽을 바라보았지만, 대답을건네지는 않았다. 함정임이 틀림 없었다.

헬라가 재밌다는 듯 눈썹을 휘며 그 시선을 마주했다.

“왜? 사실이지 않는가. 자네가 아무리 그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해도, 이쯤 하면 이 나라가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는 이미 알아차렸을 텐데.”

헬라가 조소를 흘렸다.

“남자들이 모든 것을 통치하지. 아스가르드의 여자들이 시들어가는 동안 아들들은 떠받들어지고. 자네는 운이 좋은 편이야.”

헬라가 뾰족한 손가락 하나로 로키를 가리켜 보였다.

“요툰인들은 자네 인구의 절반을 번창시키기 위해 다른 인구 절반을 끌어내리지 않으니 말이야. 그 점은 자네 종족에서 늘 존경해 왔던 바였지.”

“놀랐다는 말씀밖에 드리지 못할 것 같군요, 사령관님.”

로키가 말을 꺼냈다. 분노가 로키를 용감하게 만들고 있었다.

“요툰헤임을 그렇게 높이 사지는 않으신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음, 그렇지. 더 우월한 종족, 잔인한 거인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는 자랑스러운 에시르.”

헬라가 느릿느릿 말했다.

“아이들에게 들려 주기에는 좋은 밤 동화지. 내가 그 장단에 맞춰 주냐고? 물론이지. 필요할 때는.”

헬라가 로키를 향해 고갯짓을 해 보였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에게는 꽤나 많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로키는 지뢰밭 위에서 발을 내딛듯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글쎄다, 자네 상황을 한번 봐. 자네는 라우페이의 첫째 자식이야. 얼음 왕좌의 후예가 될 정당한 권리를 부여 받은 사람이지. 하지만 네 신체 때문에….”

헬라가 머리를 한 쪽으로 기울이며 말 끝을 흐렸다.

“자네는 지금 여기 있게 되었지. 내 동생의 자식이랍시고 하는 걸 밴 채 말이지….”

로키의 숨이 턱 막혀 왔다. 헬라가 두 사람의 계략을 미심쩍어 하고 있었다.

“이 아이는 토르의 아이입니다.”

로키가 겨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다른 그 누구와도 잠자리를 가진 적 없어요.”

(거짓말에 함께 담긴 일말의 진실이었다.)

헬라가 웃음을 터뜨리자 갑주를 찬 어깨가 마구 들썩였다.

“그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도록 하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자네나 나나 다른 사람이 쥐락펴락 하려 들면 우리 생득권을 거부당해 버리고 말 위치에 있다는 거네.”

헬라의 부츠가 돌바닥 위에 닿을 때마다 전장의 징 같은 소리를 냈다.

“자네가 자네 종족 치고는 작은 몸을 가진 불운을 안고 태어났다면, 나는 여자로 태어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지.”

로키의 목 뒤의 털이 쭈뼛 일어섰다.

“그게 무슨 뜻이죠?”

로키가 물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잖는가.”

헬라가 콧방귀를 꼈다.

“사람들은 내 동생을 오딘슨이라고 부르지. 하지만 오딘도티르에 대해서는 그 누구 하나 생각을 기울이는 자가 있는가? 물론 없지. 그래서 나는 내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야만 했네.”

헬라가 모퉁이를 돌며 로키에게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로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전쟁 중에 태어났지. 파멸과 죽음의 한가운데서 말이야.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통달하는 법을 배웠어. 나는 그 어떤 다른 전사들보다 사나워져야만 했지. 다른 자들이 날 위해 만들어 놓은 운명을 피할 수 있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어.”

두 사람은 횃불 두 개 사이의 어두운 그림자 안에 멈추어 섰다. 로키는 두 사람이 어디까지 배회해 왔는지 궁금해져 주위를 둘러 보았다. 너무도 텅 빈 곳이었다. 태피스트리도, 초상화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성 안 어느 복도의 어느 장소라고 해도 모를 것 같았다. 세상과 세상 사이의 공간 같았다. 로키는 몸을 떨었다.

“모두들 내가 완벽하게, 바보같이 히죽대는 소녀가 되길 바랐지. 하지만 난 일찍부터 혼인과 아이 낳는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어.”

헬라의 혈색 나쁜 눈이 로키를 관통해 왔다.

“내가 남자였더라면 나는 전장에서의 활약에 대해 칭송 받았겠지. 내 명령에도 그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날 미쳤다고 불러.”

헬라의 뾰족한 손톱이 팔 위를 따라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로키는 헉 숨을 들이켰다.

“우리는 그 자들보다는 현명하지.”

헬라가 속삭였다.

“그 작자들이 우리를 내키는 대로 부르라고 해. 괴물이라고. 허약하다고. 애송이. 살육자. 미친 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언제나 과소평가 당하지. 하지만 우리가 마침내 공격을 가할 때가 되면, 그 사실은 달콤하게만 느껴지게 될 걸.”

헬라의 웃음에서는 피의 냄새가 났다.

“우리라니요?”

로키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헬라가 로키의 어깨를 움켜 쥐었다. 헬라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손길 또한 너무도 강력했다. 얼마 있지 않아 어깨에 멍이 들고 말 것이라고, 로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승리자의 편에 서고 싶지 않나, 작은 거인?”

헬라가 말했다.

“나와 함께 서지. 우리 길을 막아 선 그 모든 것들을 다 불태워 버리도록 하자고. 옛 방식은 모조리 무너질 거네. 우리는 새로운 아스가르드와, 새로운 요툰헤임을 건설할 거야. 우리는 우리에게 거부되었던 왕좌를 차지할 거고, 우리에게 그른 짓을 한 자들의 시체가 우리 발치에 쌓이게 될 거야.”

헬라가 몸을 가까이 기울여 왔다. 헬라의 숨결은 불길처럼 뜨거웠다.

“자네의 충성을 내게 맹세하기만 한다면, 그 속박구들을 당장 풀어 주도록 하지.”

애초에 내게 이 속박구를 채워 놓은 사람은 당신인 걸. 로키가 맹렬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로키의 머리속은 곧 헬라가 내 놓은 약속에 사로잡혔다.

당신은 로키가 처음 아스가르드에 도착했던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포로로 잡혀온 것에 로키가 분노로가득 차 있었을 때의 모습을 말이다. 로키가 자신의 적인 에시르에게, 자신을 버린 종모에게 얼마나 맹렬히 복수를 결심했는지를. 로키는 너무도 많은 사람에게 혹사를 받아 왔고, 그리고 이제 그 분노가 영예롭게 빛나는 실현 가능성을 마주하고 있었다.

당신마저도 그 유혹에 빠져들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로키는 헬라가 친선을 제안해 오는 이유를, 헬라의 권력 추구에 있어 자신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극을 관망하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엄포를 놓기는 했지만, 헬라도 자신의 계획이 대담한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지나치게 대담했다. 헬라 같은 폭군은 절대 패배를 용납하지 못했고, 그래서 로키가 알 수 없는 변수로 작용하기 전에, 헬라의 신중한 계획에 훼방을 놓을 수 있기 전에, 로키를 자기 통제 하에 두려 했던 것이다. 로키는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존재였다. 앞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 모두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로키는 그 너머 미래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로키는 나무와 뼈로 만들어진 왕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몇 세대에 걸친 살육의 현장으로부터 자기 국민들을 구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저 로키가 이미 증오하고 있는 것을 파괴해 버릴 수 있도록 돕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다면….

“토르는….”

로키가 숨을 내뿜었다. 로키의 시선이 헬라의 열기어린 눈을 마주했다.

“토르는 어떻게 되는 거죠?”

헬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황금 머리는 왜 걱정해 주는 거지?”

헬라가 물었다.

“자네는 토르에게 아무 것도 빚진 게 없어. 우리의 새로운 세계에 그 애를 위한 자리는 없을 거다.”

로키는 입을 열었지만, 그 입에서는 아무 말도 튀어 나오지 않았다. 로키는 오늘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벌써 너무 오래 전 일인 것만 같았다!) 토르의 침대 위로 흘러 들어오던 햇빛. 토르의 손길. 토르의 목소리. 그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는 정중함. 토르에게는 늘 그를 위해 마련된 자리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로키는 깨달았다. 로키의 심장 속에 발을 붙여 버린 자리였다.

자신의 감정이 얼굴에 너무 대놓고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로키는, 재빨리 다시 그 위로 가면을 뒤집어쓰려 노력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로키는 자기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로키가 자기 감정을 감추려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헬라의 입술 사이로 으르렁대는 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헬라가 말했다. 로키의 어깨를 움켜쥔 헬라의 손이 더 세게 죄어 왔다.

“뭐가 그렇다는 거죠?”

로키는 몸을 움찔하며 단조로운 어투로 대답했다.

“저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미 결정 내렸잖아. 자네 꼴을 좀 봐. 자네가 평생토록 원해왔던 기회를 옆으로 내던져 버리려 하고 있군. 무엇 때문에? 그 놈 때문에?”

헬라가 혐오스럽다는 듯 코를 찡그렸다.

“그 애가 자네 같은 것에 신경이라도 쓸 것 같나?”

로키의 가슴 속에서 심장이 요동쳤다. 아니, 헬라의 생각이 틀렸다고, 로키는 스스로에게 일렀다. 헬라는 아침 햇살 아래의 토르의 얼굴을 본 적도 없었고, 토르의 목소리에 담긴 애정을 들어 보지도 못했다. 토르가 자신을 절대 사랑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누가 그러겠는가?), 토르는 지금까지 쭉 로키를 애정으로 대해 왔다. 로키가 일생동안 만난 사람 중 그보다 더 나은 평가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로키는 그것을 배신할 수 없었다. 토르를 배신할 수 없었다.

로키는 헬라의 공격에 대항해 가면을 단단히 붙들고 있기로 마음 먹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로키는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헬라가 아무 감흥이 없다는 듯 눈알을 위로 굴렸다.

“보잘것 없는 거인 같으니라고.”

헬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멍청한 감정 없이도 살아가는 방법을 오래 전에 배웠다. 왜 자네는 그러지 못하는 거지?”

로키는 턱을 치켜들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당당함을 보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 둘에겐 아무 공통점도 없을 지 모르겠군요.”

헬라가 로키의 어깨에서 손을 떼더니 대신 목덜미를 움켜쥐어 왔다. 로키가 헬라의 손아귀 안에서 경련했지만, 헬라는 그 초현실적인 힘으로 로키를 돌벽에다 밀어 붙였다. 어둠 속에서 헬라의 창백한 얼굴이 로키 쪽을 향해 어렴풋이 도사려 왔다. 로키는 숨을 쉬려고, 제정신을 차리려고 몸부림을 쳤다. 요툰헤임의 왕세자가 이렇게 죽게 되는 것일까? 미친 사령관에게 목이 졸려 생명이 조금씩 빠져 나가게 되는 것일까?

“내 말 잘 들어, 이 쬐끄만 쥐새끼.”

헬라가 내뱉었다.

“내겐 네 놈이 필요 없어. 내 제안은 그저 순전한 자애심에서 나온 거였어.”

우리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 로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로키가 말을 꺼낼 수만 있었어도, 로키는 헬라가 그 자애심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해 신랄한 조롱을 쏟아 냈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로키가 입을 열지 않는 편이 로키에게는 더 나았을 것이다.

“자네가 아이를 가졌답시고 주장했을 때 말이야.”

헬라가 말했다.

“그저 오딘의 환심을 사기 위한 거짓말일 줄로만 알았지. 이제 보니 정말로 자네가 아이를 뱄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뭐, 이제 더 이상 상관 없는 일이지. 하지만 이 사실은 알아 둬, 요툰 창녀.”

헬라의 입술이 로키의 귀 바로 옆에 와 닿았다.

“자네가 내 동생의 후예를 낳게 된다면, 그 조그만 괴물의 발목을 손에 쥐고 가까운 바위에다 내리쳐 머리를 빠개 주도록 하지.”

로키는 공포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꿈에서 보았던 그 아이, 토르의 푸른색 눈을 가지고 자신을 쳐다보던 그 아이…. 그 아이는 존재하지조차 않는 아이였지만, 로키는 보호 본능이 몸을 압도해 오는 것을 느꼈다. 로키는 헬라의 손아귀 안에서 미친듯이 몸부림을 쳤다. 로키의 손이 자기 목덜미를 붙들고 있는 손을 힘겹게 움켜쥐었다.

헬라는 그 미미한 저항에 웃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내가 정말로 혼혈아 따위를 내 왕좌에 가까이 두기를 허락하리라 생각했나? 토르의 얼굴에 무슨 표정이 떠오르는 지를 보고싶어서라도, 그렇게 해 주어야겠군.”

헬라가 말했다. 헬라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귀에 뜨겁게 닿아 왔다.

“내 동생은 어린아이들에게 너무나 약하더라고. 자기 자신의 아이가 내 손에 죽는 모습을 보면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말겠군. 그 후에는 내게 맞서 싸우려 들지도 못할 거야.”

로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공포감으로 위장이 뒤틀렸다. 안 돼. 토르는 안 돼.

“자네는 일단 살려 두도록 해야겠군. 내가 내 동생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 동안 잘 지켜 보도록 해. 천천히, 철저하게 찢어 놓을 테니까. 그 애가 가장 두려워하는 방식으로 해체해 놓을 거야. 그리고 죽음으로 둘러싸인 그 때에야 자네도 깨닫게 되겠지. 그 때 내 제안을 받아들였어야 했을 거라고.”

그러고선 헬라는 로키의 목을 놓아 주었다.

“아, 그리고 말인데.”

헬라가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한 이야기들은 다 부담 없이 토르에게 전달해 주도록 하렴.”

헬라의 입술 위 웃음이 매서워졌다.

“토르는 아마 경솔하게 행동하려 들겠지. 내 동생에게는 자기 감정에 지배당하고는 하는 끔찍한 버릇이 있거든. 여자들 중 가장 약한 이들처럼 말이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미친 사령관은 휙 떠나 버렸다. 헬라가 걸어가며 남기는 발자국 소리가 돌바닥 위로 문신처럼 새겨졌다.

로키는 숨을 충분히 들이마시기 위해 반쯤 흐느끼며, 바닥 위에 무릎을 꿇은 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쑤시는 가슴 속에서 심장이 요란하게 날뛰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로키는 떨리는 다리로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세워 섰다. 로키는 사저로 돌아가려 다급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로키는 얼굴을 닦으며 목에 남은 상처를 가리기 위해 옷깃을 위로 끌어 올렸다.

헬라가 알고 있었다.

헬라는 그 누구도 알면 안 되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강제로 로키에게서 튀어나오게 만들기 전까지는 로키 자신마저도 몰랐던 사실을. 로키가 오딘슨을 향해 느끼는 감정이 단순한 욕정, 신뢰, 마지못한 존경심이 아닌, 그 이상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감정은 두 사람 모두의 목숨을 앗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이 멍청한 놈. 로키는 자신 사저의 안전한 피난처로 황급히 돌아가며, 스스로를 질책했다. 이 멍청하고, 멍청하고, 멍청한 자식 같으니. 로키는 헬라가 자기 내장을 따 버릴 칼날을 자신의 손으로 건네 주고 말았다.

로키는 열쇠로 문을 연 후 방 안으로 서둘러 들어갔고, 문을 다시 잠궜다. 가슴 속에서 폐가 여전히 포효하고 있었다. 로키는 손 밑의 부드러운 나무 문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을 하려 애썼다. 도대체 이제는 무슨 행동을 취해야만 하지?

“왕세자님?”

뒤에서 조그만 목소리가 불렀다.

로키는 홱 뒤로 돌아섰다. 세이드가 구속구에 저항해 박동해 왔다. 잠긴 방 안에 자신을 공격할 만한 사람이 함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로키는 숨을 훅 내쉬었다. 시종 빌이 주황색 양초를 손에 들고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왕세자님께서 부탁하신 것을 가져 왔어요.”

빌이 양초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탁자 위에 올려 두도록 할까요?”

“그러도록 하렴. 고맙군, 빌.”

로키는 침착한 어조로 말하려 노력했지만, 목소리가 온통 갈라지고 쉬어 있었다. 로키는 뭔가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빈 벽난로 쪽으로 걸어갔다. 손수 불을 때는 법에 익숙하기라도 한 것 마냥, 로키는 벽난로 안에 불쏘시개 하나를 던져 넣었다.

그제서야 로키는 자신이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혹시 추우세요? 그건 제가 할게요, 왕세자님.”

빌이 이렇게 말하더니, 도움을 주려 로키 옆으로 다가왔다. 로키는 고맙다는 말을 중얼거린 후 빌이 작업에 착수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가까이 다가온 덕에, 그 소녀도 로키의 옷깃 바로 위까지 보라색으로 피어 오른 멍 자국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로키가 빌의 시선을 알아채자, 빌은 얼른 홱 고개를 돌렸다.

“혹시…괜찮으신 건가요, 왕세자님?”

빌이 물었다.

로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썩 좋다고는 못 하겠구나.”

로키가 이렇게 시인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있을까요? 도와드릴 일은요?”

너무 순진할 정도로 진정 어린 빌의 목소리에, 로키는 눈물이 따끔따끔 차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는 안 돼. 로키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이 불쌍한 소녀 앞에서는 안 돼. 로키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느라 등줄기가 부들부들 떨려 왔다. 사실 로키를 도와줄 수 있는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 소녀도, 소환술을 해 보려는 로키의 변변찮은 노력도, 로키의 에시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로키는 마지막에는 결국 홀로 남은 채, 적의 땅에서 죽음을 맞이해 버리고 말 것이다.

“세상에…. 왕자님. 죄송해요.”

빌의 손이 주저하며 로키의 아픈 어깨 쪽을 맴돌았다.

“캐물으려는 것은 아니지만요…. 혹시 왕자님께서…?”

빌의 목소리에도 이제 눈물이 섞여 들어가고 있었다. 빌의 동그란 얼굴이 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빌이 괴로워하는 모습에서, 그 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현명한 일이 아닐 수도 있고, 충분히 고심한 대답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로키는 빌에게 진실을 말해 주었다.

“아니야.”

로키는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왕자는 절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거야. 왕자의 짓은 아니었어.”

로키의 손가락 끝이 멍든 피부 위를 쓸었다. 멍이 가라앉으려면 며칠은 걸릴 것이다.

빌이 눈썹을 찌푸렸다.

“사람들이 왕자님께서 매일 왕세자님을 강제로 안으신다고들 하더군요. 그리고 이제 왕세자님께선 후예를 배고 계시지요….”

빌의 젖은 눈에 끔찍한 연민감이 드리워졌다.

“제가 왕세자님을 도울 만한 일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말 끔찍한 일이에요. 이 모든 것이요.”

“빌, 들어봐.”

로키는 빌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네 왕자는 여러 가지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이지만, 적어도 날 해할 사람은 아니야. 무슨 소문이 떠돌든 간에, 내가 말해 주는 이야기가 진실이야.”

빌의 입술이 떨렸다.

“정말인가요?”

빌이 물었다.

로키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물론이지. 왕자는 좋은 사람이야.”

그 사실을 지금에서야 깨닫게 된 것이, 너무도 마음 아팠다.

빌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러기만을 바랐어요. 바보 같은 생각인 건 알지만, 저는 언제나 왕자님께서 선하신 분이라고 생각해 왔거든요. 시종들에게 잔인하게 굴지도 않으시고…그 분처럼….”

빌이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말을 뚝 멈췄다. 하마터면 덫으로 뛰어들 뻔한 먹잇감 동물 같은 모습이었다.

“괜찮아.”

로키가 중얼거렸다.

“말 하지 않아도 알아. 나도 이해해.”

두 사람은 벽난로 앞에 몸을 쭈그린 채 한참 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마침내 로키가 목을 가다듬은 후 장작 쪽을 향해 고갯짓을 해 보였다.

“불을 어떻게 피우는지 좀 보여줄 수 있어? 마법 없이 하는 방법을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어서.”

“아, 왕세자님께서 직접 불을 피우실 필요는 없어요.”

“나도 배우고 싶어서 그래.”

로키가 대답했다.

“내 고향은 모든 일을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 중요한 곳이거든. 하지만 네 도움이 없으면 혼자 배우기는 도무지 힘들 것 같아서 말이야.”

로키는 빌에게 눈물 젖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빌도 똑같이 미소로 응답해 주었다.

“알겠어요, 왕세자님.”

빌이 이렇게 대답한 후, 로키에게 목재, 부싯돌, 밀짚, 그리고 약간의 의지력만을 가지고 어떻게 불꽃을 피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불을 피우는 것은 로키가 준비하는 소환술과도 비슷한 점이 있었다. 마력 같은 것은 필요 없고, 단순한 손재주만 있으면 된다. 물론 로키의 소환술의 경우에는 시간 또한 필요했지만. 그 생각을 떠올린 로키의 마음이 축 가라앉았다. 로키는 미친 사령관과 같은 지붕 아래서 삼 주의 시간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로키의 시선이 불을 떠나가 침대 옆 탁자에 머물렀다. 오후의 태양빛 아래서 황금과 보석으로 만든 토르의 선물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로키의 머리속에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좋은 생각은 아니었지만, 로키가 지금 처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무시할 수는 없는 생각이었다. 절박한 심정이 로키를 이성적 판단력의 가장자리로 내몰고 있었다. 그런다고 누가 로키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끝이에요.”

빌이 마지막으로 손을 휙 흔들며 수업을 끝냈다. 벽난로 안에 조그만 불길이 딱딱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제가 설명을 잘 드렸나요, 왕세자님?”

로키는 입술을 핥으며 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키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주 멋지게 잘 해 주었어, 빌. 이제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로키는 심장이 박동하는 것을 느끼며 다음 말을 신중히 골랐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네가 날 도우고 싶다고 했던 말…진심이니?”

빌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물론이죠, 왕세자님! 제가 어떤 걸 해드릴 수 있을지 몰랐을 뿐이에요.”

“몇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말이지.”

로키는 이렇게 말한 후, 주황색 양초와 조그만 황금 말이 나란히 놓여 있는 탁자 쪽으로 다가갔다. 로키는 황금 말을 손바닥 위에 들어 올렸다. 견고하고, 여전히 꽤나 괜찮은 뇌물이었다.

로키는 몸을 돌려 그 장식물을 빌에게 내밀었다.

“이걸 가지고 가서, 날 이 곳에서 몰래 빠져 나가게 도와줄 만한 사람을 찾아 줘. 성에 정기적으로 물품을 배달하는 상인 중 한명이면 좋겠지. 그 배달 수레 안에 숨을 수 있을 테니. 그런 후 그 사람이 날 대장장이에게로 데려가 줬으면 좋겠어. 내게 자기 기술을 빌려 줄 수 있을 만한 대장장이 말이야.”

로키는 벨트 주머니를 뒤져 오랜 시간 전 토르의 친우들로부터 따 냈던 은화를 꺼냈다. 말 장식과 은화를 한데 빌의 손에 쥐어 주며, 로키는 말을 이었다.

“은화는 네가 가지도록 하렴. 도움에 감사하다는 의미야.”

부엌에서 쓰는 체 만큼이나 구멍이 숭숭 뚫린 엉성한 계획이었다. 대장장이에게 구속구를 깨 주도록 한 후에는 그 값을 어떻게 지불해야 하지? 바이프로스트에는 어떻게 들어가야 하지? 그러고서는 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로키에게는 이 질문들에 대한 그 어떤 대답도 없었다. 로키는 그저 구석에 몰린 동물처럼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로키가 선택한 것이 겁쟁이의 도주로인 것 만은 아니었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 완전히 발을 떼 버릴 수만 있다면, 그 야수를 향한 로키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미 너무도 위험한 그 감정 또한 원천부터 싹둑 잘라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로키의 마음 한 구석에서 들려오는 조그만 목소리가, 토르는 자신 없이 더 안전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상기해 주고 있었다.

이 계획이 얼마나 부적절한 것인지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 빌이, 그저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왕세자님, 제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부탁이야.”

로키는 그 귀중한 물건들이 놓인 빌의 손 위로 손가락을 꼭 덮어 주었다.

“내 목숨을 구해주는 일이 될 거야. 약속할게. 그렇지 않고서는 네게 이런 무모한 짓을 시키지 않았을 거야.”

여전히 빌은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다. 빌의 입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더니, 마침내 말을 꺼냈다.

“정말로 큰 위험에 처해 계시는 거라면, 왕자님께 말씀 드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왕세자님 말씀대로 왕자님께서 정말로 그렇게 좋은 분이시라면, 저보다는 그 분께서 더 잘 도와 주실 수 있을 텐데요.”

“왕자는 날 도와줄 수 없어.”

로키가 대답했다. 헬라가 했던 말 중 한 가지는 맞았다. 토르는 분노에 휩싸일 것이고, 그렇기에 쉽게 쓰러뜨려지고 말 것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로키에게는 이미 한 번 토르에게 자유를 간청했다가 거부당한 전적이 있었다. 그 야만인이 지금 와서 자기 말을 들어줄 이유가 있겠는가? 로키는 잠깐 눈을 꾹 감았다.

“왕자의 손도 묶여 있는 상태지. 그래서 네게나마 부탁하는 거야. 부디 시도라도 해 줄 수 있겠니?”

빌이 입술을 꾹 말았다. 하지만 마침내 빌이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제가…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보도록 할게요.”

“고맙구나.”

로키는 빌의 손을 꽉 쥐어 보인 후 뒤로 물러섰다.

“해가 지고 난 후 이 곳으로 와서, 성과가 있었는지 내게 알려줘.”

빌의 얼굴이 막 내린 눈처럼 창백한 색을 띠고 있었다.

“정말 제가 그러기를 원하신다면요.”

“물론이지. 이제 그만 가 보렴.”

로키는 빌을 방 바깥으로 안내해 주었다.

마침내 홀로 남은 로키는,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여전히 침대 곁 탁자에는 에시르 책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가지고 왔던 성애물들 사이에는 소환술에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골라온 지침서들도 몇 권 있었다. 빌이 자기가 맡은 임무에 성공한다면, 로키는 더 이상 두 개의 보름달 밑에서 주문을 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랬기에 로키는 그 책들을 그냥 없는 척 해 버릴까 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책 이외에 로키가 주의를 돌릴 만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헬라와의 그 불쾌했던 만남을 잊어버릴 수 있을 무언가가 로키에게는 간절히 필요했다. 그래서 결국 로키는 탁자 옆에 의자를 끌어와 앉은 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중에 헤임달이 저녁 식사와 욕조를 가지고 왔다. 오늘 아침 로키의 난처했던 기분을 눈치챈 모양인지, 헤임달은 말을 아꼈고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로키는 몸을 씻는 동안 헤임달에게 양피지와 잉크와 깃펜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새 로브를 걸쳐 입은 후, 로키는 저녁의 싸늘한 기운을 피하려 두꺼운 담요에 몸을 둘러 쌌고, 탁자 앞에 앉아 책에서 읽은 중요한 정보들을 필기하기 시작했다.

로키가 열심히 탐독한 옛 학술서 하나에는 발키리라는 부대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발키리는 강인한 에시르 여성들로 구성된 전투 부대로, 오랜 시간 전 많은 전쟁에서 싸우고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전사들이었다. 요툰헤임과의 전쟁을 기록한 초기의 역사서에는 발키리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따금씩 등장했지만, 그보다 조금 더 최근 연대기에서는 발키리를 언급한 말을 단 한 마디도 찾을 수 없었다. 발키리들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유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 방패 든 여인들이 어느 날 하루 하얀색 군마에 올라타 아스가르드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냥 동화에서 꾸며낸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결론을 수긍할 수가 없어, 로키는 그들에 관한 이야기 역시 양피지에다 필기해 두었다. 나중에 잊어버리지 않고 토르에게 물어볼 수 있도록.

나중이란 것이 있다면 말이다.

로키는 깃펜을 잉크통 안에 내려놓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좀 마음이 진정되고 나자, 대체 무슨 생각으로 빌에게 자기 도주를 도와 달라고 간청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창문 쪽으로 눈길을 준 로키는 이미 해가 졌고 밤이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로키는 양초에 불을 붙인 후 (그 주황색 양초는 아니고, 다른 양초. 주황색 양초는 침대 매트리스 밑에 숨겨 놓았다), 양초불에 의지해 계속 글을 읽었다. 이 소환술을 어떻게든지 시도해 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틀림없이 그 시종 소녀는 로키의 방을 떠나자 마자 그 황금 말을 가지고 종적을 감추어 버렸을 것이다. 그런다고 그 애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 황금 말은 아마 빌이 평생 손에 넣어본 물건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값이 나갈 것이다. 빌은 이미 멀리멀리 떠나, 그 말의 루비 눈을 빼내 자기 남은 여생을 보낼 수 있을 조그만 오두막 값을 지불했을 지도 모르고, 필요할 때마다 황금을 조금씩 깎아내 사용할 지도 모른다. 사실 그 생각은 꽤나 나쁘지 않았다. 로키는 자신이 공황 상태에서 저지른 실수에 조금이나마 선한 일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았다.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로키는 놀라 몸을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빌이 다시 돌아오기는 했구나. 로키는 담요를 어깨 위에 망토처럼 두른 채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을 여는 로키의 입술에 작은 미소가 드리웠다. 빌은 정말 천사 같은 소녀가 따로 없었다.

“네가 안 돌아올 줄….”

로키가 입을 열었다가, 문 밖에 서 있는 것이 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말을 멈췄다. 문가에 서 있는 것은 토르였다.

“아. 너구나.”

로키는 얼굴에서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붉은 망토를 두른 에시르 왕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깜빡이는 복도의 그림자 아래 서 있었다. 그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띄워져 있지 않았다.

오늘 밤 도망치는 것은 선택지가 아니겠군. 로키는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어 둔 채 탁자 쪽으로 걸어 돌아갔다.

“들어와. 르빈디에 대한 동화를 마저 읽어 줄까? 이것만 마저 끝내도록 할게. 기록할 게 몇 가지 있어서.”

로키는 책 수 권이 이리저리 쌓여 있는 탁자 앞에 다시 앉았고, 깃펜을 꺼낸 후 방금까지 읽고 있던 글을 다시 숙고하기 시작했다. 영혼을 소환하는 이 에시르식 주문들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세상과 세상 사이의 문을 여는 주문 또한 이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로키는 관련 있어 보이는 정보들을 몇 개 더 양피지에 끄적여 놓았다.

뒤에서 문이 닫히고 토르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야만인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로키는 하고 있던 작업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에 대해 토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만 않는다면, 그 일은 잊어버리는 걸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냥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게 최선이지 않겠는가?

로키가 글자를 적어 내리는 동안 토르의 그림자가 위로 드리웠다. 로키의 의자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토르의 몸의 열기는 거의 손으로 만질 수가 있을 정도였다. 로키는 입을 꾹 다문 채 있었고, 애써 손을 움직여 계속 책 페이지를 넘겼다. 종이 위에 깃펜이 끄적대는 소리와, 벽난로에서 불이 딱딱 타오르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지는 유일한 소리였다.

토르가 로키의 어깨 위로 팔을 뻗어 왔다. 탁자 위 로키의 잉크병 옆으로, 토르의 손이 무엇인가를 달각 하고 놓았다. 조그만 황금 말이었다. 말에 박혀 있는 보석들이 양초 불 아래 빛을 발했다.

빌어먹을. 로키는 눈을 꽉 감으며 책 위에 깃펜을 올려 놓았다. 잉크가 번지든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토르….”

로키가 입을 열었다.

“그 소녀가 곧장 내게로 온 것을 행운이라 여겨.”

한 치의 따스함도 담겨있지 않은 목소리로 토르가 입을 열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곧바로 내 누이에게로 말이 전해졌을 거야. 그랬으면 우리 거짓말이 들통났을 테고, 그렇게 되었으면 누이가 무슨 일을 했을지 생각조차 하기 싫군.”

로키는 한숨을 내쉰 후 어깨 위에 얹혀 있는 담요를 정돈했다.

“불쌍한 빌 같으니. 은화는 그 애가 가졌으려나? 글쎄, 뭐. 해가 된 일은 없으니.”

“해가 된 일이 없어…?”

토르가 로키의 어깨를 움켜쥐더니 몸을 홱 돌려 놓았다. 헬라가 잔인하게 멍을 남겨놓은 쪽 어깨였다. 토르의 두 눈이 푸른색 불꽃의 속심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당신에겐 농담 같나? 그렇게 생각해?”

거칠게 붙잡힌 어깨가 타오르는 것 같은 느낌에, 로키는 고통 어린 비명을 겨우 눌러 삼켰다. 스스로를 겨우 억누르느라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등 뒤의 불길을 받아 커다랗고 끔찍한 존재감을 발하는 토르의 모습을, 로키는 빤히 올려다 보았다.

“내가 지금 웃고 있는 걸로 보여?”

로키가 맞받아쳤다. 그런 후, 로키는 조금 더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이거 놔, 오딘슨.”

토르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놓아 주었다.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하다는 듯 토르가 잠깐 등을 돌렸다가, 다시 한 번 로키 쪽을 향했다. 분노가 그의 존재를 압도하고 있었다.

“내게 약속했잖아.”

토르가 말했다.

“다시 도망치려 하지 않을 거라 말했잖아. 적어도 겨울철이 지나기 전에는 말이야.”

“난 그런 약속 한 적 없어. 내가 도망치지 않는 게 희망 사항이라고 했던 건 너였어.”

“당신이 그 말에 동의한 것처럼 내가 믿게 만들었잖아.”

토르가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어젯밤…. 날 방심하게 만들었지. 당신은 날 속였어!”

“내가 속였다고?”

다시 한번 배 속에서 불길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로키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러는 너는 대체 언제쯤 솔직해질 생각인데? 네 계획들을 절대로 내게 이야기해 주지 않으려 하잖아! 네가 그 계획에서 날 배제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나도 이미 알고 있는데 말이야!”

방금 전까지의 토르의 감정을 분노라고 한다면, 지금의 토르는 현란한 불길을 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수염 덥수룩한 얼굴 위에서 입이 비틀렸다.

“그 계획의 위험성을 당신에게 이미 몇 번, 몇 번이고 설명해 줬잖아!”

토르가 다시 손을 올리더니 로키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기라도 하려는 듯 움켜쥐었다.

“대체 언제쯤 내 말을 들을 생각이야?!”

이번만큼은 로키는 참을 수가 없었다. 고통이 하얗게 불타올라 왔고, 로키는 비명을 내질렀다.

토르가 그 즉시 로키의 몸을 놓아 주었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선 채, 숨을 헐떡이며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커다랗게 뜨인 눈이 서로를 탐색했다.

토르가 앞으로 냅다 달려 들었다.

로키는 손을 들어올렸다.

“안 돼, 하지…”

하지만 로키는 자기 일에 착수한 토르의 힘에 맞서 저항할 수 없었다. 에시르 왕자가 로키에게서 담요를 벗겨 내, 로키의 멍 든 목을 드러냈다. 로키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렸다. 토르의 얼굴에 깨달음이 떠오르는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가 없었다. 토르가 로브 옷깃을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토르의 손이 로브를 벗겨내 맨 어깨를 드러내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모습이 까발려지고 나머지 상처까지 죄다 드러나는 감각에, 로키는 작게 숨을 흡 들이마셨다.

“세상에.”

그 끔찍한 광경에 토르가 탄식을 내뱉었다. 로키의 푸른색 피부가 검은색과 보라색 무늬로 물들어 있었다.

“이제 만족해?”

로키는 다시 로브를 목 위로 끌어 올렸다. 열심히 눈물을 참아 삼키는 중 최소한의 품위나마 유지하고 싶었다.

“내게도 도망치고 싶은 이유가 있었어. 충격적인 소식일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일이 너와 관련된 것은 아니라고.”

역시나, 거짓말에 함께 담긴 일말의 진실이었다. 헬라에게서 멀리 도망치고 싶은 바람 이외에도, 토르를 향해 점점 자라 가는 애정에서 달아나고 싶은 마음 또한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토르가 금방 병에라도 들 것 같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누이가…?”

“다른 누가 있겠어?”

로키가 쏘아 붙였다.

“언제?”

“그게 중요해?”

로키는 눈을 질끈 감은 채 흉골 위로 로브 옷깃을 꾹 움켜쥐었다.

“오늘 아침에. 우리가…헤어지고 난 후에.”

“내게 이야기해 주었어야지.”

토르가 말했다. 아까의 열기는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고통만이 그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당신이 날 믿는 줄 알았는데.”

로키는 토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일에서만은 아니야.”

토르는 지친 얼굴을 한 채 로키 앞에 서 있었다.

“다른 곳은…? 그 곳 말고 다른 다친 곳은 없나…?”

“없어.”

로키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멍 몇 개일 뿐이야. 아무 것도 아니야.”

물론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로키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로키가 정말로 상처 입은 곳은 자신의 심장, 자신의 영혼이라고?

“누이가 당신을 협박했나?”

토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딱히.”

로키가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헬라가 말했던 그 끔찍한 이야기들을 차마 털어 놓을 수가 없었다. 헬라가 어떻게 존재하지도 않는 두 사람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는지를. 어떻게 토르를 죽일 거라 계획하고 있는지를. 그 이야기를 해주면 토르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비밀로 감추어 놓아야만 했다.

“하지만 헬라는 널 엄청난 곤경으로 던져 넣으려 하고 있어.”

로키가 목덜미 위에 손을 올려 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을 네가 알고있다는 걸 아무에게도 알려서는 안 돼. 헬라의 계획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 같은 모습을 보여야 할 거야. 헬라의 주의를 돌려 놓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뿐이야.”

“내 성 안에서 내 반려가 폭행을 당했는데, 그 일에 대해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토르가 으르렁거렸다.

“바로 그거야.”

로키는 담요를 주워들어 다시 몸을 가렸다. 이런 모습을 한 채 토르 앞에 서 있자니 너무도 노골적으로 드러난 느낌이 들었다. 벌거벗은 것보다 더 나빴다.

“아무 것도 하지 마. 우리가 이번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이가 아니라고, 네 누이가 생각하도록 만드는 거야. 우리가 동맹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들자고.”

“그게 우리 둘 관계야? 동맹?”

토르가 물었다.

로키는 시선을 돌렸다.

토르가 고개를 흔들었다. 여전히 느슨하게 늘어뜨려져 있는 토르의 머리카락이 널찍한 어깨 위를 쓸고 지나갔다.

“잘 알아 들었어.”

토르가 다시 문 쪽으로 걸음을 향하기 시작했다.

“좋은 밤 되길, 왕세자.”

“잠깐만.”

로키가 다급히 불렀다.

토르가 발을 멈췄다.

“왜?”

로키의 마른 목구멍이 꿈틀거렸다. 토르에게 여기 있으라고, 여기서 자고 가라고, 그냥 자고 가기만 하라고 간절히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요청하는 것은 멍청한 실수가 될 것이다. 요정 날개를 단 유치한 소원일 뿐이다. 로키는 오늘 일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를 차마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토르의 팔에 안겨 안식처를 찾고 싶었는지를. 얼마나 그 팔에 안겨 심장 소리를 들으며 밤을 보내고 싶었는지를. 밤 중 습격에 대비해 함께 몸을 웅크리고 있는 두 사람.

하지만 로키는 차마 그 요청을 건넬 수가 없었다. 토르 또한 묻지 않았다. 그 푸른 눈은 이미 닫혀 있었다. 양초 하나 없는 창문. 겨울 눈보라에 얼음으로 꽁꽁 뒤덮인 유리. 로키는 그 모든 것들을 어젯밤 이전으로 되돌려 보려, 적어도 노력 정도는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에 도망치려 했던 것이 터무니 없는 계획이었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어.”

로키가 마침내 말했다.

“부디 이해해 줘.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몰라서 그렇게 했던 거야. 지금이라도 그 약속을 해 주기를 바란다면….”

“그럴 필요 없어.”

토르가 얼음 평지 같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큰 가치가 없는 약속일 테니.”

문으로 가더니 토르는 사라져 버렸다.

텅 빈 방의 침묵 속에서, 로키는 눈을 꽉 눌러 감은 채 눈물이 흘러 내리도록 놓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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