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토르로키/번역]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 (13/16)

토르로키 / Thorki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왕세자와 야수)"

by triedunture


원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5267873


  • 작가님께서 번역은 출처를 포함하여 자유롭게 하라고 명시하셨습니다. (https://i.imgur.com/r6PfDqx.jpg)
  • 에시르 토르x요툰 로키 정략결혼 AU입니다. 구전동화 느낌이 살짝 끼얹어진 작품으로 이야기 중간중간에 화자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 로키를 비롯한 모든 요툰 종족은 인터섹스(자웅동체)라는 설정입니다. 엠프렉 언급이 있습니다.
  • 요툰헤임에는 성별의 구분이 없고 누구나 아이를 밸 수 있기 때문에, 어머니/아버지라는 단어 대신 (주로 동물 번식에서) 누가 씨를 뿌렸고 누가 새끼를 배었는지 칭하는 단어인 dam/sire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 단어들은 원문에서 사용한 의미와 가장 비슷한 단어인 '종빈/종모'로 번역합니다.



*    *    *


13장.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마법은 즉흥적인 작업이다. 꿀케이크 한 덩이를 굽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쓸 만한 물건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조리법만을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 마법은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비슷하다. 뭐, 그 사람이 모든 살아 숨쉬는 생명체 안에 존재하는 운동 에너지와 심적 에너지라면 말이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 다가가는 법을 배워야 하고, 특정한 상황에서 적절하게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숨결 하나하나가 변수로 작용하고, 계절의 모든 변화 하나하나가 위험 요소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타고난 재능을 지녀 자신의 마법 능력에 뛰어난 로키가, 소환술을 시전하는 길에 나서며 직감에 따라서만 움직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본능이 로키를 정원 쪽으로 이끌고 갔다. 피부에 신선한 공기가 닿아야만 했고, 달빛과 자신 사이를 가리는 그 어떤 것도 없어야만 했다. 로키는 망토 모자를 머리 위로 둘러쓴 채 성 안 통로를 살금살금 걸어갔다. 경비병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로키는 각별히 신경을 썼다. 이 주문은 완전히 사람들의 눈을 벗어난 곳에서 시전해야만 했다. 달의 절기가 완전히 맞아 떨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환술에 성공했다고 가정했을 때, 누군가 프리가의 형상을 보고 두 사람의 행각을 헬라에게 알리는 일은 없어야 했다.

늦은 시간이라 왕궁의 정원은 당연히도 텅 비어 있었고 고요했다. 여전히 정원 바닥과 나뭇잎들에는 얇은 서리 층이 내려앉아 있었지만, 쌓여 있던 비단 같은 눈더미는 녹아 내려 있었다. 로키는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아스가르드의 계절이 신기했다. 요툰헤임에서는 계절의 변화가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자주 닥쳐 오지 않았다.

울퉁불퉁하게 비틀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정원의 중앙에는 얼음 덮인 조그만 장식용 연못이 있었다. 연못의 가장자리로 다가가는 로키의 부츠 밑에서 서리가 뽀드득 소리를 냈다. 왠지 모르게도 물이 적당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리가가 목숨을 잃은 것은 늪지대에서였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 비슷한 곳에서 다시 프리가의 존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깨 너머를 뒤돌아 보아 자신을 지켜보는 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로키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짐을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고양이 발톱과 올빼미 깃털은 약초 더미 위에다 올려 놓았다. 깨진 거울 조각에는 입을 한 번 맞춘 후 그 옆에 내려 놓았다. 그런 후 로키는 토르의 황금 머리카락이 감겨 있는 양초를 꺼내 차갑고 딱딱한 땅바닥에다가 힘써 꽂아 놓았다. 어렵사리 배운 불 피우는 기술과 부싯돌을 이용해, 로키는 양초 심지에 불을 붙였다. 로키는 양초가 타 내려가고 마침내 머리카락 가닥에도 불이 붙기 시작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머리카락이 꼬불꼬불하게 탄 모양으로 흙 위로 흘러 내렸다. 매캐한 냄새가 로키의 코를 톡 쏘아 왔지만, 로키는 숨을 깊게 들이 마신 후 소환술을 위해 빚어 낸 주문의 말을 읊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길 잃은 왕비를 찾는다. 그 대가가 무엇이든 나는 왕비를 청한다.”

(물론 굳이 이렇게 주문에 운을 맞출 필요는 없다. 그래도 해 될 일은 없으니.)

뼈 속까지 울리는 진동이 조용한 정원을 따라 퍼져 나갔다. 연못의 표면이 떨리는 것이 로키의 시선에 들어왔다. 돌 같은 것을 던지지 않았음에도, 연못 한 중앙으로부터 동심원의 물결이 바깥으로 퍼지고 있었다. 다시 한번 진동이 들려 왔다. 로키의 뱃속을 요동치게 만드는 징 같은 소리였다. 물이 다시 한번 잔물결을 일으켰다. 세 번째로 진동이 울려 왔을 때, 로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군.”

로키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대가인가 보군.”

로키는 털망토를 벗어 내린 후 신발도 마저 벗었다.

물은 얼어 붙을 듯이 차디찼다. 로키가 연못 물을 헤치고 들어가는 동안 물 표면에 둥둥 떠 있는 얼음 막이 좌우로 흔들리며 옆으로 갈라졌다. 바지가 젖어 들기 시작했고, 물이 허리까지 이르렀을 때는 튜닉이 젖기 시작했다. 이 조그만 연못은 장식용일 뿐이었다. 깊으면 얼마나 깊겠는가? 하지만 그 순간 로키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무언가가 로키의 다리를 움켜 쥐었다. 로키는 차디찬 공기에다 대고 놀란 숨결을 내뿜었지만, 곧 물 안으로 끌려 들어간 덕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었지만, 그럼에도 로키는 더 깊이 빨려 들어갔다. 머리 위로 두 달의 모습이 흐릿한 동전 두 개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달마저도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고, 로키는 어두운 심연 속에 홀로 남았다. 코와 입으로부터 숨이 흥분한 거품이 되어 뿜어져 나왔다. 로키는 수영에는 젬병이었고 (요툰인들 대부분이 그렇다), 물에 빠져 죽는다는 생각에 폐가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는, 공기가 느껴졌다.

로키는 기묘한 호숫가에 털썩 엎어진 채 숨을 헐떡거리며 기침을 했다. 로키의 몸은 흠뻑 젖은 채 추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로키의 손가락이 흙 위를 파고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흙이 아니었다. 그것이 손 끝에서 먼지처럼 흩어져 나갔다.

로키는 눈을 들어 자신을 감싸고 있는 자욱한 안개를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태양에서 나는 흐릿한 빛이, 온갖 방향으로 터덜터덜 걷고 있는 형체들을 비추고 있었다. 형체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로키는 소리를 내 말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소리마저도 공허 속에 묻혀 버렸다.

공황상태에 빠져 봤자 소용 없을 것이다. 로키는 천천히 발을 디디고 일어나며 쿵쿵 뛰는 심장이 알아서 진정하기만을 바랐다. 프리가를 찾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그 일에 너무나 많은 것이 걸려 있었다. 로키는 토르를 떠올렸다. 담요 더미 사이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모습. 로키는 그 생각이 부적이라도 되듯 매달렸다. 토르를 위해 이 주문이 자신에게 무슨 대가를 요구하든 견뎌낼 것이다.

하지만 로키가 발걸음을 뗄 수 있기도 전, 아니, 어느 방향으로 갈지 결정하기도 전, 어떤 형체 하나가 어둠으로부터 뛰쳐 나오더니 로키에게로 달려 들었다. 그 형체가 로키를 먼지 위로 넘어뜨렸다. 칼날이 목에 눌러져 오는 것을 느끼며 로키는 애처로운 침묵의 소리를 내질렀다. 로키는 자신이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여자였다. 아스가르드인. 여자는 회색과 푸른색으로 된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어두운 색의 머리가 잔뜩 흐트러져 흘러 내리고 있었고, 사납게 다물어진 이가 드러나 보였다.

그 여자의 입이 열렸고, 뭔가 거친 요구사항이 틀림없을 무엇인가를 외쳐 말했다. 하지만 로키는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이 무의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그저 잠잠했다. 로키는 빈 손을 위로 치켜든 채 대답을 건네려 애썼다.

“내 이름은 ‘조그만 자’ 로키다! 나는 왕비님을 찾고 있어!”

하지만 로키의 목소리는 텅 빈 공기 중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로키는 그 푸른 색 망토를 어디서 보았는지 문득 기억해 냈다. 역사책. 로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신 발키리로군.”

발키리는 로키의 입술 위로 띄워진 자기 신분의 이름을 읽어낸 듯 했다. 발키리가 단검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발키리는 여전히 로키의 허리 위에 올라탄 채, 로키의 몸을 먼지 위에 단단히 고정시킨 상태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발키리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요툰인? 이 곳에?

로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요툰인이야. 도우러 왔어.”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로키를 바라보았다. 그 말을 해독하려는 것인지, 이미 알아들었지만 로키의 말을 믿어 주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 목소리가 안개를 뚫고 들려 왔다. 실제로 들을 수 있는, 진짜 목소리였다.

“그 자를 일으켜 주게.”

주황색과 황금색의 의복을 걸치고 어깨 위에는 사냥꾼의 가죽 띠를 두른 프리가가 어물거리는 어둠으로부터 걸어 나왔다.

“그 자는 내 아들의 친구네.”

발키리가 마지막으로 한 번 로키를 향해 미심쩍은 시선을 던져 보인 후, 발을 디디고 일어섰다. 발키리가 손을 내밀었고, 로키는 고맙게 그 손을 맞붙잡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키의 시선은 여전히 왕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왕비님. 여기서 이야기하실 수 있는 건가요? 목소리를 내실 수도 있고요? 이 세상이 저를 귀머거리로 만들어 버린 줄 알았습니다.”

여전히 로키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프리가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듯 했다. 프리가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 장소에서도 여전히 약간의 능력은 보유하고 있다네.”

프리가가 말했다. 로키의 어깨를 두드리며 프리가가 미소를 지었다.

“잘 왔네, 왕세자. 약속을 지켜 주었군. 자네가 사흘이라고 했었지. 그리고 그 말 대로 여기로 와 주었군.”

“그게 말이지요….”

로키는 몸을 움찔했다.

“조금 일찍 와야 했습니다.”

“피치 못할 일이라도 있었던 것인가?”

프리가가 물었다.

“자네의 완전한 능력 없이 그런 여정을 시도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었을 텐데.”

“제가 바보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몇 번이고 확신해 와서 말이지요.”

로키는 자기 스스로에게 말하듯 이렇게 투덜거렸다. 그런 후 로키는 머리를 흔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든, 제가 여기 왔지요. 주문이 제대로 통하기만 한다면, 아스가르드에서 수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겁니다.”

로키는 손을 내밀었다.

“오세요. 깨어 있는 세상으로 저와 함께 돌아 가시지요. 그 곳에서는 유령의 형상으로 보이시겠지만, 적어도 아드님과 아스가르드 왕실에 왕비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소식은 알릴 수 있겠지요. 어떻게 이 곳에 갇히게 되셨는지도요.”

“그리고 이 속박구들 또한 깨부수어 달라고 부탁할 수 있겠지.”

프리가가 로키의 마법을 붙든 팔찌가 매여 있는 쪽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면 자네가 나와 내 전사 군단을 이 감옥에서 풀어줄 수 있을 테고.”

“전사 군단이요?”

로키는 왕비의 강인한 어깨 너머로 시선을 향했다. 그제서야 그 거친 어두운 색 머리를 한 발키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망토를 두른 여자들 한 부대가 서 있었다. 일부는 검을 들고 있었고, 일부는 방패를 쥐고 있었다. 그 전사들이 모두 로키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로키를 재어 보며, 로키가 자신들 수준에는 모자라다는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이.

“아하.”

로키가 입을 열었다.

“발키리들이 어디로 갔나 했더니 말이지요.”

“헬라는 자기 승리를 나누는 것에는 만족하지 못했지.”

프리가가 설명했다.

“특히 이 방패 든 여전사들과는 말이다. 헬라는 아주 오래 전 발키리들을 이 곳에 가두었어. 발키리들의 실종은 전설으로만 남았네.”

프리가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주 잘 통한 수법이었지. 내게도 똑같은 짓을 했으니 말이다.”

“헬라는 승리하지 못 할 겁니다.”

로키가 말했다. 자신의 그 말에 진실이 담겨있다는 것을, 로키는 뼈속부터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결코 그렇게 두지 않을 거에요.”

프리가의 눈이 번득 빛을 냈다. 토르를 떠올리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그래, 절대 그러지 않을 거네. 작은 거인.”

프리가가 이렇게 말하더니, 로키의 손을 움켜 쥐었다.

세찬 물줄기 소리가 로키의 귀 안을 채웠다. 마법이 자신의 몸을 감싸오는 것을 느끼며 로키는 눈을 감았다.

로키는 젖은 채 추위로 덜덜 떨며 연못 옆의 차디찬 땅 위에서 깨어났다. 바람은 한 점도 불고 있지 않았지만, 로키가 모아 왔던 잡동사니들은 돌풍을 직격으로 맞기라도 한 듯 여기저기 흩어 널부러져 있었다. 양초는 다 탄 채 꽁지만 남아 있었다. 로키는 눈을 깜빡여 물을 떨구어 냈다. 그 세상 사이의 세상에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던 거지?

“마법이 제대로 작동했구나.”

로키는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고대의 나무 옆에 프리가가 서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프리가의 투명한 형상이었다. 프리가는 자신의 유령 같은 손을 빤히 응시했다가, 얼어 붙어 있는 정원을, 나무를, 그리고 하늘과 두 개 달들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정말로 해냈구나.”

프리가가 속삭였다.

로키의 입술에 미소가 띄워졌다.

“절 믿지 못하신 건가요, 왕비님?”

로키가 물었다.

“솔직히 말해 주기를 원하나? 조금은 그랬지. 하지만 내가 잘못 생각했군.”

프리가가 서둘러 로키에게로 다가왔다.

“자, 얼른 나를 토르에게로 데려다 주거라. 내 아들을 너무도 보고 싶었다. 다른 누구보다 토르와 가장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구나.”

“물론이지요.”

로키가 대답했다.

“이 쪽으로 오시면….”

하지만 로키가 자신 사저 쪽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해 줄 수 있기도 전, 정원에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다가오는 동안 프리가는 동상처럼 빳빳하게 서 있었다. 이 왜소한 나무는 두 사람의 모습을 감추기에는 턱도 없었다. 숨을 곳이라고는 없었다.

“왕세자님?”

헤임달이 울타리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계신가요? 왕세자님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말이지요.”

로키는 눌러 참고 있던 숨을 턱 내뱉었다.

“신이시여 맙소사. 헤임달 당신이었군.”

“헤임달!”

프리가가 환희 어린 표정을 띤 채 서리가 내려앉은 땅 위를 뛰쳐 달려갔다.

“내 오랫 벗이여! 어떻게 지냈는가?”

프리가가 헤임달을 껴안으려 했지만, 그 두 팔은 나무 기둥을 둘러싼 옅은 안개처럼 헤임달의 몸을 통과해 지나칠 뿐이었다. 소환술은 어쩔 수 없이 그런 방식의 주문이었다. 왕비는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데 분개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왕자의 신하는 프리가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프리가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기색조차 없었다.

“정원을 산책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입니다만, 왕세자님.”

그 대신 헤임달은 로키에게 이렇게 말했다.

“괜찮으신 겁니까?”

“헤임달, 나야. 프리가네.”

왕비가 헤임달 바로 앞에 섰다. 그 고귀한 얼굴에 근심이 떠올라 있었다.

“자네가 눈을 잃은 것은 알고 있네. 그래도 귀로는 여전히 들을 수 있지 않는가.”

프리가가 로키 쪽을 보았다.

“왜 헤임달이 대답하지 않는 거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로키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대답했다.

“괜찮으신지 안 괜찮으신지 모르시겠다고요?”

헤임달이 얼굴을 찌푸렸다.

“열이 나시는 건가요?”

헤임달이 체온을 재려는 듯 로키의 이마 쪽으로 한 손을 뻗어 왔다. 로키는 그 손을 황급히 피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몸이 흠뻑 젖어 있는 이유까지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나도 내가 왜 이 시간에 나왔는지 잘 모르겠다는 거였네.”

로키가 얼버무렸다.

“그냥 이래저래 불안했던 모양이야. 혼잣말이나 하고 말이지. 당신도 이해하겠지, 헤임달.”

로키가 조용한 사과의 말을 담은 눈으로 프리가를 응시했다.

“헤임달이 내 말을 못 듣는구나.”

프리가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작은 거인이여. 자네 마법이 계획했던 대로 작동한 것이 아니었구나. 정확한 달 절기를 기다렸어야 했는데!”

로키는 좌절스런 한숨을 뿜어 냈다. 그런 명백한 사실을 굳이 그렇게 읊어 줄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로키는 벌써 그 실수에 대해 자신을 질책하고 있었다. 그래도 상황이 완전히 구제 불가능 한 것은 아니었다. 로키는 다시 입을 열어 헤임달에게 말했다.

“나는 서재로 갈까 해. 뭐라도 좀 읽으면 머리 식히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

“서재까지 모셔다 드리도록 할까요?”

헤임달이 물었다. 그 조심스러운 표정에 헤임달의 걱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로키가 혼자 몸으로 헬라와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닥치게 될 위험을 걱정하는 것이다.

“그럴 필요 없어.”

로키가 대답했다. 그 어떤 것보다 지금은 혼자 남겨지는 것이 중요했다.

“고맙네. 하지만 혼자 찾아 가겠네. 이 시간에는 어차피 아무도 없지 않는가. 자네만 제외하고 말이지.”

로키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 두었다.

“알겠습니다.”

신하가 머리를 꾸벅 숙였다.

“그러면 아침 식사 시간에 뵙도록 하지요.”

로키의 심장이 쿵쿵 뛰어 왔다. 아직 토르가 자기 방 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그 모든 일을 헤임달에게 설명해 주려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음, 오늘 아침 식사는 필요 없을 것 같아. 굳이 수고하지 말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 후, 로키는 외투와 부츠를 집어 들고 유령 같은 왕비에게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두 사람은 성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해가 안 되는군. 왜 헤임달에게 모든 일을 설명해 주지 않은 것이지?”

두 사람이 걷는 동안 프리가가 물었다.

“헤임달은 아스가르드의 가장 충성스런 수호자이네. 적어도 예전에는 그랬지. 내 귀환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헤임달도 알아야 해.”

프리가가 혀 차는 소리를 냈다.

“불쌍한 이 같으니라고. 그 사람의 지위가 박탈될 때 내가 이 곳에 있어 변호를 해 줄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로키는 두꺼운 털망토를 젖은 어깨 위로 둘렀다.

“헤임달에게 죽은 왕비님께서 바로 코 앞에 서 있다고 제가 설득하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세오. 물론 헤임달은 왕비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왕비님을 만질 수도 없지요. 아마 제가 미쳤다고 생각할 겁니다. 혹시 헤임달의 두 눈이 멀쩡했다면 왕비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요…?”

로키는 그 생각을 숙고했다.

“더 멀리 가기 전에 이 주문이 얼마 만큼이나 잘못되었는지 시험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직 눈치채지 못한 효력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러면….”

통로를 지나는 부드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와, 로키는 왕비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머지않아 조그만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침구가 담긴 바구니를 든 시종 빌이었다.

“빌.”

빌이 모퉁이길을 돌기 전 로키가 불렀다.

“너무 바쁘지 않다면, 잠깐 이야기 나누도록 하지.”

소녀가 몸을 돌리더니 자기를 부른 게 누군지 알아보고는 창백한 기색을 띠었다. 빌의 시선은 왕비가 있는 쪽을 향하지 않았다. 그 키 크고 강인한 모습을 한 왕비의 모습을 놓쳤을 리는 없는데 말이다.

“왕세자님….”

빌이 속삭이듯 말했다.

“오, 안 돼. 죄송해요. 그래야만 했어요. 그 조그만 말을 가지고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왕자님께 갈 수밖에 없었어요!”

보아하니 여전히 그 불운한 도피 시도에 대해 조바심을 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로키는 앞으로 걸음을 향하며 안심시키려는 듯 손 하나를 들어 올렸다. 프리가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로키의 뒤를 따랐다.

“조그만 말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

“그 일로 널 원망하지는 않아, 빌.”

로키가 빌에게 말했다.

“너는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그 은화 열 닢은 돌려 받아야 할 것 같구나.”

빌이 얼굴을 찡그렸다.

“제게 없어요, 왕세자님. 왕자님께서 은화는 제가 가져가서….”

빌이 그림자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입을 잠깐 다물었다.

“음…왕자님께서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로키의 가슴으로부터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알았어. 네가 충성을 다하는 건 왕자에게라는 거지. 당연히 그래야 마땅하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이것 한 가지만 해 주렴. 이 통로에 지금 몇 명의 사람이 있는지 말해 줄 수 있니?”

빌이 로키를 빤히 응시했다가, 통로 쪽을 위아래로 훑어 보았다. 무슨 속임수라도 아닐까 의심하듯 빌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왕세자님, 여기엔 우리 밖에 없어요.”

빌이 말했다.

“그냥 우리 둘 뿐이라는 거지?”

“네, 왕세자님. 왜 물어보시는 거죠?”

“별 것 아니야. 그냥 확인하려는 것 뿐이었어.”

로키는 이렇게 내뱉은 후, 왕비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면 이만 가서 할 일 하렴, 빌.”

빌은 서둘러 절을 꾸벅 해 보인 후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왕비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그 누구도 날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군. 내가 떠난 이유로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 말은 기억하고 있다. 혹시 요툰헤임의 왕세자가 자기 혼자서 내 왕실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이 바뀌었는가?”

“아니오.”

로키가 어두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정도로 많이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로키는 왕비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오십시오. 서재에서 마저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아직 왕비님께서 모르시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더 멀리 가기 전 아셔야만 하는 사실들입니다.”

왕비가 감금되어 있는 동안 모르고 지냈던 일들을 모조리 다 나열하는 것이 가능할까? 시도는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일단, 프리가는 자신의 죽음이랍시고 알려진 실종 사건의 여파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토르의 분노와 미드가르드의 파괴, 토르의 능력을 앗아 간 오딘의 저주, 그리고 헬라가 빠르게 총애하는 자식의 위치를 차지한 것…. 두 사람이 함께 나눈 꿈에서는 이 모든 사실을 논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이 모두가 프리가에게는 새로운 소식이었다. 프리가가 익숙한 환경인 자기 서재에서 그 소식을 전해 듣는다면 충격이 조금이나마 덜어지지 않을까 하고, 로키는 내심 바랐다.

물론 로키의 생각은 빗나갔다.

로키가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모두 설명해 주고 나자, 프리가는 경악했다. 프리가가 무익한 분노를 담아 유령 같은 손을 책장에다가 내리쳤다. 프리가의 몸이 실존한 상태였더라면 서재 안은 틀림없이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럴 리 없어!”

프리가가 고함을 질렀다.

“내 남편이 그런 일이 생기도록 놓아 두었을 리가 없다!”

“국왕께서도 많은 것들을 후회하고 계십니다. 그 이야기를 제게도 해 주셨지요.”

로키가 프리가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애쓰며 말했다. (토르가 그 분노를 어디서 물려받았는지도 이제 알 것 같았다.)

“왕비님을 잃으신 후 오딘께서는 슬픔에 압도당해 버리셨고, 의지력마저 꺾여 버리셨지요. 폐하께서 갈망하시는 유일한 일은 자신의 손주를 보는 것입니다.”

“손주라고?”

프리가가 이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해 보려는 노력을 멈추더니, 로키를 빤히 바라보았다.

“가당찮은 말이다. 헬라는 아이를 배는 것에는 절대 관심이 없어. 손주를 어떻게 본다는…?”

그제서야 깨달음이 닥쳐온 듯 프리가가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안 돼. 토르가…?”

로키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차피 프리가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의 입으로 말해주는 편이 나을 것이다.

“토르는 정략 혼인을 했습니다, 왕비님.”

로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혼인은 명목상의 것입니다. 토르도 지금 당장은 자신의 그 반려에게 관심 있는 척을 해 보이고 있을 뿐이고요.”

“그 반려가 누구인가?”

프리가가 재촉했다.

얼어붙은 망설임이 로키를 죄어 왔다. 프리가의 분노가 자신에게 향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말해 주게, 왕세자.”

프리가가 형체 없는 옷깃을 휘날리며 로키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남편이 내 아들을 누구와 속박시켜 놓았다는 것이지?”

“…왕비님 앞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로키가 대답했다. 로키는 발 밑의 카페트 위에 시선을 내리깔았다. 위를 올려다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충격이 방 안을 궤뚫고 지나가고 있었다. 로키는 바짝 마른 입으로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왕비님. 그 일은 제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어요.”

“자네가? 하지만….”

왕비는 할 말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자네는 요툰인이지 않은가.”

로키는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두 왕국 사이의 전쟁은?”

프리가가 물었다.

“전쟁이 끝난 것인가?”

“두 왕국 사이에는 평화 조약이 맺어졌습니다. 이 혼인도 그 약속을 확정 짓기 위한 의미로 성사된 것이고요. 제 종모가 그 혼인에 찬성하신 이유는….”

로키는 한 손을 올려 반대쪽 팔꿈치를 감쌌다. 무너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음…저를 이상적인 후계자의 상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대체 왜…. 자네의 몸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참한 심정으로, 로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제 종족의 혈통 때문에, 아마 왕비님의 아드님께도 제가 그다지 이상적인 짝이라 할 수는 없겠지요.”

로키는 웃음을 지어 보이려 애썼다.

“생각해 보면 아주 우스운 일이에요.”

“날 보게, 작은 거인.”

프리가가 말했다. 로키가 순순히 복종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목소리었기에, 로키는 눈을 들어 프리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프리가에게서 어머니의 그것 같은 따스함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런 안개 같은 몸으로는 자네를 흔들어 제정신을 차리게 만들어 줄 수 없다는 점이 유감이로군. 그저 자네가 내 말을 잘 경청하기만을 바랄 수밖에.”

프리가가 자신의 두 손을 강하게 한데 움켜 쥐었다.

“나는 내 자식 그 누구도 자네의 종모가 자네를 대한 것처럼 대하지 않을 거네. 자네가 만일 내 자식이고, 자네 키가 일 미터 밖에 안 된다 했을지라도, 나는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자네 그 모습 그대로도 충분하다고 자네에게 일러 주었을 거네.”

로키의 다리가 떨려 왔다. 로키는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에 두 손을 가져갔다. 토르가 그 다정함을 어디서 물려 받은 것인지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로키가 손바닥 위에다 대고 말했다.

“저를 알지도 못하시잖아요.”

“로키. 자네는 크나큰 위협을 무릅쓰고 날 소환해 내지 않았는가. 다른 많은 이들이 실패한 일에 자네는 인내하며 버텼어. 자네가 이 곳에 오게 된 연유가 무엇이든 간에, 자네가 내 아들의 친구이고, 그 애를 돕고 싶은 마음에 이 모든 일을 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군. 자네가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아는 것도 그 때문이지. 충분하다 마다.”

프리가가 몸을 숙이며 살짝 즐거움을 띤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 아들이 누군가와 가짜 혼인에 얽매여야 한다면…. 그 짝이 자네라는 것에 나는 기쁜 마음 뿐이구나.”

(물론, 왕비는 마음 속으로 이 혼인이 얼마 만큼이나 가짜일까 하고 궁금해 하고 있었다. 이 혼인에 얽매인 사람 중 적어도 한 명은 밤에 상대의 꿈을 꾸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왕비는 현명하게 그 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로키가 자기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털어 놓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따를 것이 틀림 없었고, 프리가는 로키에게 대답을 강요한다는 생각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그 수수께끼의 진상을 밝혀낼 시간은 충분히 있을 것이라고, 프리가는 생각했다.)

코를 한 번 훌쩍하며 겨우 다시 평정을 되찾은 후, 로키는 다시 손을 밑으로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칭찬을 받는 데는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얼버무려 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토르의 저주에 대해서는 고심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왕비님께서 그 주문을 해제하실 수는 없을까요?”

“저주도 저주 나름이지.”

프리가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 저주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었는지 혹시 아는가? 분명히 치유법이 있을 거네.”

“제가 토르에게 해 줬던 말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로키는 마법과 관련된 책자들이 진열된 곳으로 서둘러 걸어가, 다 낡아 해진 마법 주문서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토르에게 그 저주에 대해 물어 보았더니, 무척 비밀스럽게 굴더군요. 부끄럽기라도 하다는 듯 말이지요! 토르는 그 마법을 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다른 방법으로 저주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고 말하더군요.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푸는 것이 불가능한 저주라고? 그런 건 세상에 없다.”

프리가는 형체 없는 턱을 손으로 괸 채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쩌면….”

로키가 책에서 눈을 들었다.

“어쩌면이요?”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프리가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구나.”

하지만 로키를 새로이 보기라도 한 듯, 로키를 향한 프리가의 시선이 약간 묘해졌다. 갑자기 수수께끼를 고민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없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물론 로키는 들고 있던 책을 읽느라 바빠 프리가의 그 표정을 눈치채지 못 했다.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은, 어느 시점까지는 토르도 제가 그 저주를 푸는 데 도움을 주리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로키는 책 페이지를 휙휙 넘기며 말했다.

“하지만 갑자기 이제 와서 그 계획을 포기해야만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왜인지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아드님께서는 무척 고집이 세서 말이지요.”

“그렇지.”

프리가가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리가는 방 구석에 쌓여 있는 쿠션 더미 위에 무겁게 주저 앉았다. 커다랗게 떠진 두 눈이 먼 곳을 응시했다.

“자기 어머니만큼이나 고집이 세지.”

“어찌 됐건, 왕비님께서 이제 여기 계시니 다같이 해결책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왕비님께서 이 곳에 소장하신 책을 이제 거의 다 뒤져 보았지만, 여전히 주문을 이해할 길은 없어 보이는군요.”

로키는 책을 닫은 후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허리에 두 손을 올려 놓으며 로키는 열심히 생각을 했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토르는 왕비님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을 텐데, 어떻게 왕비님이 진짜 여기 계시다는 사실을 믿게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생각에 너무 깊이 빠져 있던 나머지, 프리가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로키가 프리가 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왕비님?”

“음?”

왕비가 황금색 머리를 휙 돌리더니 로키를 빤히 응시했다.

“지금 뭐라고 했는가?”

“왕비님께서 살아 계시고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토르에게 어떻게 믿게 할 수 있을지 여쭈어 보았습니다.”

로키는 프리가의 희미한 형체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틀림없이 증거 같은 것이 필요할 텐데요.”

“나는 그 애의 어머니네.”

프리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날 볼 수 없더라도, 그 애는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 게다.”

다시 마음을 굳게 다잡은 듯, 프리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게. 이만 가 보자고. 내 아들을 한시빨리 만나고 싶어 견딜 수가 없구나.”

두 사람은 성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창문 틈으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스며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로키는 살짝 몸을 움찔했다. 이렇게나 오래 떠나 있을 예정은 아니었다. 로키는 토르가 여전히 모피 더미에 파묻힌 채 잠에 빠져 있기를, 그저 몸을 살짝 흔들어 그를 깨울 수 있기를 바랐다. 운이 따라 준다면, 왕비가 이 방이 왕자의 사저일 거라 생각할 지도 모르고, 그저 토르의 잠버릇이…이상하다고만 여길지도 모른다.

물론 로키의 희망은 헛된 것이었다.

문을 따고 방 안으로 들어간 로키는 토르가 옷을 완전히 차려 입은 채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토르는 가슴 위로 팔짱을 낀 채 문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당신 또 떠났군.”

로키가 입을 열 수 있기도 전 토르가 먼저 말했다.

로키는 프리가의 형상을 안으로 들인 후, 그 뒤로 문을 닫았다.

“그랬지.”

로키는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그 얘기를 하기 전에….”

“내게 여기 머무르라고 했던 건 당신이었잖아.”

토르가 말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토르의 목소리가 분노로 높아져 있지 않았고, 그 대신 비단결처럼 부드러웠다.

“내가 머물러 주었더니, 당신은 떠났군.”

그 대화의 내용을 귀담아 듣기에는, 프리가는 자기 아들의 얼굴을 경탄 어린 눈으로 바라보느라 너무도 바쁜 듯 했다. 로키는 그 사소한 사실에나마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로키는 한숨을 내뱉으며 변명 비스무레한 것을 이끌어냈다.

“미안해.”

로키가 말했다.

“해야 할 일이 있었어.”

“한 밤중에 말이야?”

토르가 애처롭게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나 보니 당신이 내 곁에서 사라져 있었지. 그리고 난 이 방 안에 갇힌 채 혼자 남아 있었고. 당신이 마침내 도망치는 데 성공한 줄로만 알았어.”

토르가 쓰디쓴 웃음을 뱉었다.

“이 자리에 가만히 앉은 채 내가 생각했던 일들이란….”

“내 아들 곁에서 잤다고?”

프리가가 열띤 표정으로 로키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이야기는 내게 말해주지 않았잖는가. 이 혼인이 명목상일 뿐이라고 하지 않았나.”

“잠깐만 시간을 주세요.”

로키가 프리가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듯한 로키의 모습에, 토르가 혼란스럽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시간이라니?”

로키는 끙 앓는 소리를 냈다. 토르 쪽으로 몸을 돌리며 로키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널 언짢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 네가 깨어나기 전에 돌아오려고 했단 말이야.”

토르는 늘어뜨려진 노란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내리며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도무지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래서 어딜 갔다 왔다는 거야?”

“내게는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

프리가가 로키의 다른 쪽 대화를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외설적인 세부 사항은 일러줄 필요 없으니, 내 아들에 관한 자네의 계획이 계획 그 이상의 의미를 띠고 있다면, 내게 말해 주게.”

로키는 프리가를 잠깐 쳐다봤다가, 다시 토르 쪽을 바라 보았다. 그런 후 로키는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 설명해 주려 하고 있잖아.”

로키가 토르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앉는 편이 좋을 걸.”

토르는 잠시간 침묵한 채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토르의 턱이 살짝 경련했다. 마침내 토르가 다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을 때야, 로키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 모든 사실을 한꺼번에 털어 놓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질 끌면 끌수록 이 짜증나는 혼선만 더 길어질 것이 틀림 없었다.

“사실은….”

로키가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네 어머니가 살아 계셔.”

토르는 움직이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그 공허한 표정 이외에 다른 그 어떤 감정도 얼굴에 떠오르지 않았다. 로키는 토르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 어떤 것이라도. 하지만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처음에는 내 꿈을 찾는 유령인 줄로만 알았어.”

로키는 방 안을 서성이기 시작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런 후 네 어머님과 나는 단편 단편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지. 그리고 사실은 그 동안 네 누이가 왕비님을 어느 지하 세계 같은 곳에 감금해 놓았던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거짓 봄날의 눈이 창문 쪽을 향했다.

“이제는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게 구는군.”

토르가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조금 더 큰 목소리로 토르가 말했다.

“내 어머니는 죽었어. 그 사실에 내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를 이야기해 주었더니, 당신은 그 사실을 칼날 삼아 날 비참하게 만들려 하는군.”

“대체 자네 두 사람 뭔가?”

프리가가 물었다.

“자네들은 대체 연인인 건가, 아니면 적인가?”

로키는 프리가 쪽으로 초조한 시선을 쏘아 보냈다.

“난 널 비참하게 만들려는 게 아니야.”

로키는 토르 쪽으로 두 손을 내밀어 보였다. 손목에 매인 고리가 서로 맞부딪쳐 쨍그랑대는 소리를 냈다.

“네 어머니는 정말로 살아 계셔. 나는 내 마법 없이는 왕비님을 자유롭게 해 드릴 수 없어. 하지만 이 세상으로 어머니의 영혼을 소환해 내는 데는 성공했지. 오로지 나만이 여기 계신 왕비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어. 내 말이 어떤 식으로 들릴지는 알고 있어. 하지만 맹세컨대, 결코 속임수가 아니야.”

로키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제발 내 말 믿어 줘.”

“그렇다면, 어머니가 날 뭐라고 부르지?”

토르가 물었다.

로키는 눈을 깜빡였다.

“뭐라고?”

당혹스런 마음으로 로키는 왕비 쪽을 돌아 보았다. 왕비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어머니가 정말로 여기 있다면, 어머니가 날 뭐라고 부르는지를 당신에게 이야기해 줄 거야. 그러면 나도 당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겠지.”

토르의 얼굴이 바위처럼 무표정했다.

프리가가 가슴 위에다 두 손을 포갠 채 냅다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내 작은 곰! 어서 말해 주거라, 로키. 작은 곰, 털 복슬복슬한 내 아이. 오, 세상에! 밤에 토르를 재워 주기 전에 늘 그렇게 말해 주고는 했다. 우리 둘만 있을 때 말이지. 토르의 머리카락은 늘 그 날 겪은 모험 덕에 마구 헝클어져 있었거든.”

투명한 뺨 위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내 사랑스런 아이. 내 아들. 그걸 기억하고 있었구나!”

로키가 부드러운 표정을 띤 채 토르 쪽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음…왕비님께서 널 작은 곰이라고 불렀다고 하시는군. 왕비님께서…감정이 북받치신 것 같아.”

한 대 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 토르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뭐라고 했어?”

“작은 곰….”

로키는 침을 꿀꺽 삼켰다.

“털 복슬복슬한 아이…. 어머님께서 널 재워 주곤 하셨다고 하셔. 네 머리카락이….”

부모의 사랑을 드러내는 그 조그만 상징을 목격한 로키의 심장이, 자신이 한 번도 가지지 못했던 것을 그리며 쑤시듯 아파 왔다.

살짝 벌어져 열린 토르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 눈에 눈물이 고여 떨어져 내리는 것을 토르는 그대로 놓아 두었다. 눈물이 뺨 위로 쏟아져 내려 수염을 적셔 왔다.

“어머니가 정말로 여기 계시는 건가?”

“그래, 그래!”

왕비가 토르의 발치에 무릎을 꿇더니 아들의 허리를 끌어안으려 애를 썼다. 프리가의 두 손이 올라와 토르의 얼굴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 손은 무기력하게 토르를 통과해 지나칠 뿐이었다.

“오, 내 아들. 내 사랑하는 토르.”

“어머니가 여기 계셔.”

로키가 속삭였다.

“네 바로 앞에.”

토르가 자기 앞의 허공을 미친 듯이 응시하며, 한 줄기의 연기를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어디에? 여기에? 어머니께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줄 수 있어? 그리고…죄송하다고도?”

토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토르가 손을 꽉 주먹 쥐었다.

“너무도, 너무도 죄송하다고…. 나는 어머니께 실망스러운 아들이 되고 말았어. 그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어야 했는데…잘 알았어야만 했는데….”

왕비의 형상이 토르 옆에서 흔들렸다.

“괜찮다, 토르. 괜찮아.”

프리가가 로키 쪽으로 애원하는 눈길을 보냈다.

“토르에게 말해 주거라. 부탁이네!”

“왕비님은 네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어.”

로키가 말했다.

“괜찮다고 하셔.”

“토르에게 내가 사랑한다고 전해 주거라.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할 거라고.”

“널 사랑한다고 하셔.”

로키 역시 감정에 북받치기 시작해, 목구멍이 메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할 거라고 말해 주셔.”

“어머니가 너무도 그리웠습니다.”

토르가 허공에다 대고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없이 그동안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정말 그동안 계속 살아 계셨던 건가요? 신이시여, 세상에….”

토르가 젖은 얼굴을 손에 묻은 채 몸을 숙였다.

프리가가 울부짖었다.

“내 아들을 안아 줄 수가 없구나. 로키, 제발….”

프리가는 물어 볼 필요조차 없었다. 로키는 이미 몸을 움직여 토르 옆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토르 옆에 앉은 후 로키는 토르의 황금 머리를 자기 어깨에다가 기대게 주었다. 튜닉이 눈물로 흠뻑 젖어 들기 시작했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어머니도 널 사랑하셔.”

로키가 토르의 목덜미에다 대고 말했다. 자신 역시 울고 있다는 사실을, 로키는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날더러 널 안아 달라고 부탁하셨어. 왕비님 스스로는 그러지 못하시니….”

토르가 바위에 달라붙은 덩굴손처럼 로키를 붙들어 왔다.

“고마워.”

토르가 말했다.

“당신이 내게 어머니를 데려와 주었어.”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 하지만 곧 그렇게 해 줄게.”

로키는 약속의 말을 건넸다. 토르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싶은 터무니 없는 충동을, 로키는 겨우 참아 눌렀다. 그 따스한 품 속에서 로키의 눈이 스르르 감겨 닫혔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피난처로 삼은 채, 서로와 위안을 나누었다. 눈물이 흘러 내렸다. 토르와 이렇게 몸을 가까이 맞닿아 있는 지금, 로키는 찰나의 순간이나마 자신이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전령이 아닌, 자기 에시르 남편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라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 잇속을 챙기려 들다니, 나는 얼마나 지독하게 끔찍한 사람인 걸까. 로키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연인의 접촉이 아니다. 적어도 토르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토르의 살갗 위에 단단히 몸을 누른 채, 토르의 냄새를 맡고, 토르의 몸의 열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너무도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눈을 뜬 로키는 토르의 어깨 너머로 프리가가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프리가가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명목상인 것만은 아니로구나. 그렇지?”

프리가가 속삭였다.

“오, 작은 거인이여…. 토르도 이 사실을 아는가?”

로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로키는 목을 가다듬은 후 토르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두 사람 사이에 공간을 마련했다. 토르는 여전히 로키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여기서 계속 이렇게 머무를 수는 없어. 내 원래 계획은 왕비님께서 국왕의 자문회나 왕실 사람들 앞에 직접 이야기할 수 있을 형상을 소환해 내는 것이었는데…. 주문이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어. 그리고 그 사람들 앞에 내 말은 아무 영향력도 지니지 못하겠지. 이 진실을 알릴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해.”

“내 자신의 말도 충분치 않을 것 같군.”

토르가 손등으로 마지막 눈물을 훔쳐내며 말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이외에는 아무 증거도 없이 그런 혐의를 제기한다면, 누이는 날 미쳤다고 할 거야.”

로키는 잠시 골똘히 생각을 했다.

“네 능력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모든 일이 훨씬 쉬워질 텐데. 헬라도 네 능력이 자기를 상대할 만하다 싶으면, 네 혐의를 그렇게 쉽게 물리쳐 버리지는 못 할걸.”

로키가 중얼거렸다.

“로키, 이 저주에 대해 조금 더 알아야만 할 것 같구나.”

프리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프리가는 토르의 반대 쪽 자리로 가더니 그 위에 걸터앉았다. 연기 같은 왕비의 형상은 침대 위에 자국조차 남기지 않았다.

“토르가 어린 시절 제멋대로 굴 때마다 내가 읽어 주던 동화에 나오는 저주와 비슷한 것인지, 토르에게 한 번 물어 보거라.”

“동화에 나오는 저주라니요?”

로키가 얼굴을 찌푸렸다.

“토르의 저주가 동화에 나오는 저주와 비슷할 리가요. 토르의 저주는 정말로 실제하는 고통인 걸요.”

이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잡기라도 하려는 듯, 토르의 눈이 좌우로 왔다갔다 움직였다.

“내가 버릇없이 굴 때 들려 주시던 동화 이야기를 하시는 건가?”

토르가 물었다.

“그래.”

로키가 대답했다.

“어떻게 알았어?”

“왜냐하면 내게 걸린 저주 또한 그것과 비슷하기 때문이지.”

그 야만인이 어머니의 유령 같은 형상이 앉아 있는 빈 자리를 빤히 응시했다. 토르가 입을 열어 느릿느릿하게, 신중하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헤임달만 알고 있지요. 그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지요?”

“이해한다고 전해 주거라.”

프리가가 속삭였다.

“이해한다고 전해 주시라는군.”

로키가 웃음을 픽 내뱉었다.

“왜 갑자기 두 사람 다 수수께끼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프리가는 그 질문을 무시했다.

“그 저주를…통상적인 방법으로 치유하려 시도했는지 물어 보거라.”

로키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 말을 되풀이해 주었다. 무기력한 꼭두각시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토르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계획이 있었지만…. 그 계획을 성사시킬 수가 없었다고 전해 드려. 그 대가를 치를 자신이 없었다고.”

토르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가망 없는 일이었을 거라 말씀드려 줘.”

“대체 그 계획이 뭔지 그냥 내게 설명해 주기만 한다면, 이 대화도 훨씬 더 수월하게 진행될 것 같은데 말이지.”

로키가 불쑥 말했다. 여전히 자기가 토르의 손을 맞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로키는 그 손을 꽉 쥐었다.

“내게 말해도 돼. 괜찮아.”

토르가 그제서야 로키를 바라보았다. 그 기묘한 두 눈이 끔찍한 고통에 젖어 있었다.

“그럴 수 없어.”

“로키.”

프리가가 입을 열었다. 두 사람에게로 몸을 기울여 오는 왕비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자네가 밤에 그런 꿈을 꾼다는 사실을 내 아들이 아는가? 내가 자네들이 물 속에 있던 것을 목격했던…그런 식의 꿈을?”

로키는 뺨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토르의 어깨 너머로 왕비의 파리한 얼굴을 응시했다.

“뭐라고요? 아니…몰라요.”

“대체 왜?”

프리가가 물었다.

“이미 자네 둘은 한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고 우리 법에 따르면 혼인까지 한 사이인데, 부끄러워할 일은 없지 않는가.”

“왕비님은 이해 못 하세요. 결코…환영받지 못할 거에요.”

로키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게 이 모든 일과 무슨 상관이죠?”

“어머니가 뭐라고 말씀하고 계셔?”

토르가 물었다.

“아무 것도.”

로키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냥 쓸데 없는 이야기들이야.”

“아니, 그렇지 않다.”

프리가가 키 큰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운 채, 탄원하듯 강인한 팔을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부탁이네, 로키. 사랑하는 아들을 대신해 어머니로서 간청하네. 토르를 향해 그 어떤 애정 어린 감정이라도 품고 있다면, 부디 지금 여기서 말해 주게.”

“차라리 제 몸에 불을 붙이라고 하시지 그러세요.”

로키가 쏘아 붙였다.

“로키, 어머니가 뭐라고 하셔?”

토르가 재촉했다.

“어머니께서….”

로키는 머리를 휙 돌려 토르의 불안한 얼굴을 응시했다. 토르의 그 두 눈. 지금 이 순간에도 토르의 모습을 시선에 담는 것만으로 심장이 요동쳐 왔다. 로키는 절망감을 느꼈다. 토르가 자신에게 의미하는 바처럼, 자신 또한 토르에게 그러한 의미였으면 하는 바람이 너무도 간절했다. 갈망의 대상이 되는 것. 신뢰하는 사람이 되는 것. 두 사람 사이 아무 장벽도 없이, 그의 비밀을 모두 아는 것.

그리고 갑자기 반짝이는 영감이 떠올랐다. 적어도 가장 마지막 사항은 이루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길이 보였다.

로키는 몸을 곧추세워 앉은 후, 토르의 늘어진 손길에서 자기 손을 빼 냈다.

“네 어머니께서 그 저주를 풀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안다고 하셔.”

로키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내게 모든 것을 다 말해 주어야 해. 네 계획과, 네가 맞닥뜨린 장애물과, 내가 수행해야 했던 역할까지, 모두 다. 그래야만 왕비님께서도 그 해결책을 털어놓을 수 있다고 하시는 군.”

“나는 그런 말 하지 않았다!”

프리가가 소리를 질렀다. 프리가가 그 공기 같은 손을 로키 쪽으로 휘둘렀다.

“그 거짓말 당장 물리도록 하거라!”

로키의 말을 들은 토르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

“하지만…어머니께서도 그것이 왜 불가능한 일인지는 알고 계실텐데.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일 거야. 내가 진실을 말할 엄두도 못 낸 것도 그 때문이고.”

로키는 들리지 않는 말에 쫑긋 귀를 기울이는 척을 해 보였다.

“어머니께서 네 두려움은 근거 없는 것이라고 하시는군. 네가 나한테 진실을 말해 주기만 한다면 모든 일이 명백해질 거라고 하셔.”

“로키, 부탁이네.”

프리가가 머리카락을 잡아 뜯으며 로키의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당장 멈추거라. 그러면 안 되네!”

“어머니께서 정말로…정말로 확신하시는 것인가?”

로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 돼!”

왕비가 울부짖었다.

“알았어.”

토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직접 보여 주는 쪽이 더 쉬울 것 같군. 이리 와.”

토르는 몸을 일으킨 후 문 쪽으로 향했다. 토르의 어깨가 무겁게 죄어들어 있었다. 로키는 입가에 조그만 미소를 띄우며 그 뒤를 따랐다. 잠긴 문이 열렸고, 그들은 성 복도를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 동안 프리가가 계속 간청을 쏟아 냈지만, 그 말들은 귀 먼 사람을 향하는 것만 같았다.

“제발 부탁이네. 이 정도로 해 두게. 자네 실수하는 거야. 내 말 좀 들어!”

프리가가 로키 앞에 발을 세우고 멈춰 섰지만, 로키는 왕비를 통과해 지나쳐 버렸다.

“내가 왜 이렇게 해야만 하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어.”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기는 동안 토르가 로키에게 속삭여 왔다.

“하지만 어머니는 현명한 분이시지. 나는 어머니를 믿어.”

“어머니께서도 그게 옳은 일이라고 하셔.”

로키가 말했다.

“머지않아 모든 일이 밝혀질 거라고도 이야기 하시네.”

적어도 그 말은 아주 거짓은 아니었다. 토르가 자기 비밀을 밝힌 순간에 로키가 내 놓을 프리가의 기적적인 해결책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로키도 잘 알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할 것이다. 마침내 모든 진실을 알고 난 후라면, 행운이 따라 주어 로키에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를 지도 모른다. 그래. 로키는 스스로에게 일렀다. 두 사람을 괴롭히는 그 일 하나만 해결되면, 로키도 마침내 토르를 도울 만한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들은 오딘의 사저 건물에 이르렀고, 올파더가 깊은 잠에 빠져 들었던 날에 로키가 언뜻 보았던 빗장 지른 문 앞에 멈춰 섰다. 그 날이 너무도 오래전 일 같았다. 로키는 토르가 왜 자기를 이 곳에 데려왔는지 궁금해하며 조심스럽게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 의아함이 얼굴 위로 빤히 드러났는지, 토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만.”

토르가 이렇게 말하더니, 열쇠 꾸러미를 꺼내 잠긴 사슬과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이제 끔찍한 침묵 속에 빠져 든 프리가의 형상이, 얼굴을 두 손에 묻은 채 어른거리는 몸을 옆으로 물렸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토르가 로키를 방 안으로 인도했다.

작은 원형의 방 안에서 로키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방 중앙에 있는 받침대였다. 그 위에는 정교하게 빚어진 전투 망치가 놓여 있었다. 초자연적인 손길이 붙들고 있기라도 한 듯, 그 망치는 대리석 판으로부터 한 치 정도 떨어진 채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저 멀리 벽 쪽에는 두텁게 먼지가 쌓인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이 방 안에서 그 망치가 눈여겨볼 만한 유일한 물건이기는 했지만, 누군가 망치를 골똘히 지켜 보려 저 의자들을 놓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로키의 시선이 곡선을 그리는 벽 쪽으로 향했다. 벽 위에는 아스가르드드를 상징하는 황금색과 붉은색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벽화 꽤 여럿에 날카로운 푸른색 붓질로 그려낸 요툰인들이 전장에서 쓰러진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저 그림들을 조금 더 가까이서 들여다 본다면 자기 형제나 숙부의 혈통 표식을 알아볼 수 있을까? 로키는 그 생각에 몸을 떨었다.

“여기가 어디지?”

로키가 토르에게 물었다.

“감옥.”

토르가 말했다. 토르가 받침대 주위로 걸음을 옮기며 망치를 가리켰다.

“이 망치는 묠니르야. 내가 하늘을 다스리던 시절 이 망치를 들었지. 내가 사용하기 전에는 헬라에게 속했던 무기였어. 하지만 내가 성년에 이르렀을 때, 이 망치가 나를 선택했지.”

“네 누이가 썩 좋아하지는 않았겠는걸.”

로키가 느릿느릿 말했다.

“안 좋아했다 마다.”

토르가 서성이던 걸음을 멈추더니, 망치를 감싸고 있는 듯한 은은한 빛 너머로 로키를 응시했다.

“아버지께서 내 능력을 가두었을 때, 묠니르 또한 가두어졌어. 내가 내 가치를 증명해 보일 때 까지 가두어져 있을 거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지.”

토르가 머리카락에 손을 집어넣어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 가닥을 걷어 냈다.

“앞으로 영영 내 가치를 증명해 보일 수 없을 것 같아. 내가 그런 일을 저지른 후로는 말이지.”

“너도 네 젊은 시절로부터 많이 성장했잖아.”

로키가 이렇게 지적했다.

“넌 더 이상 분노에 휩쓸려 다니지 않고, 네 종족들의 끔찍한 죄악 또한 인정했어. 그 정도면 아주 가치 있는 일로 받아들여 질 것 같은데?”

토르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꾹 다물었다. 토르의 두 눈이 감겨 닫혔다.

“어머니, 저는 못 할 것 같습니다.”

토르가 말했다.

“부디, 이것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로키는 닫힌 문에 기대 서 있는 프리가 쪽을 쳐다보았다. 프리가의 얼굴이 버림받은 집처럼 묵묵히 닫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요청하네.”

프리가가 말했다.

“할 수 있을 때 그만두게.”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호기심의 충동이, 로키의 자기 회의감이, 자신의 기묘한 남편을 향한 로키의 싹터오는 감정이, 이미 로키를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몰아 가고 있었다. 로키는 멈출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싶어하던 것에 이토록 가까운 순간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로키는 토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머니께서 꼭 해야만 한다고 하셔. 괜찮다고도 하셨어. 얼른 말해 봐.”

떨리는 숨소리가 토르의 가슴을 울려 왔다.

“아버지가 내게 내리신 저주는 오래된 고대의 저주야. 내 힘을 완전히 앗아 간 그 저주를 푸는 데는 단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지.”

“그게 뭔데?”

로키가 열기어린 눈빛을 빛내며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토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사랑.”

토르가 속삭였다.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진 순수하고, 진실된 사랑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어.”

그 말에 로키의 마음 속 무엇인가가 얼어붙어 왔다. 그 사실을 이해하려 애쓰는 동안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사랑이라고? 고작 그거야? 하지만…. 안 돼.

안 돼.

안 돼.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사랑을 찾으려 노력했어.”

토르가 말을 이었다. 둑이 뚫린 것처럼 진실의 말이 와장창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걸 찾아 아스가르드 곳곳을 여행하고 침대 여럿을 전전했지. 나는 그 때 아직 어렸어. 자신감에 잔뜩 차 있었고, 멍청했어. 그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 줄 사람을 찾는 것은 아주 쉬운 문제일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결국 나는 찾지 못했어. 그리고 그 후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헬라가 내 아버지를 설득해 당신과 내 혼인을 주선했지. 헬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했어. 내가 내 일생일대의 적인 요툰헤임의 왕세자에게 속박되고 나면, 내게 그 저주를 풀 가망이라곤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지. 하지만 헤임달의 도움으로 나는 다른 계획을 생각해 냈어. 왕실의 반려가 내게 사랑에 빠지도록 만드는 것.”

토르는 시선을 들지 않았다. 만일 눈을 들었더라면, 로키의 얼굴에서 색이 모조리 빠져나간 채 창백한 하늘색을 띠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토르가 말을 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밀약 같은 것을 꾸며내 나를 잠재적인 동맹으로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는 데, 헤임달과 나 둘 다 동의를 했어. 당신과 나는 함께 아버지와 누이가 우리에게 원하는 모습을 연기해 보여 주게 될 거고,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작은 의사표현들과 다정한 모습을 통해 당신의 애정을 사려 했지.”

토르는 다음 말을 꺼내기 위해 고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난 멈춰야만 했어.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로키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 목소리에 토르의 고개가 휙 위로 들렸다. 로키는 그 자리에 선 채 시선을 둘 곳을 찾으며 눈에서 눈물을 떨구어 내고 있었다.

“왜? 내게 다정한 모습을 선보이는 게 그렇게나 힘든 일이었어?”

“아니, 그런 게….”

토르의 목이 꿈틀거렸다.

“왜인지는 중요치 않아.”

토르의 눈빛이 조금 밝아지며, 희망을 띠기 시작했다.

“이제 어머니께서 해결책을 설명해 줄 수 있으실 테니, 모든 일이 잘 풀릴 거야.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될지 어머니께 여쭤봐 줘.”

로키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 그저 숨을 몰아 쉬고만 있었다. 로키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뭐라고 하셔?”

그리고 깨달음이 그제서야 당도한 듯, 토르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안 돼, 설마.”

토르가 속삭였다. 토르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로키….”

토르가 받침대 주위를 둘러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하지만 로키는 뒤로 물러섰다.

“내 이름 입에 담지 마!”

로키가 소리를 질렀다.

“헤임달과 함께 음모를 꾸미는 동안 무슨 얘기를 했어? 둘이서 즐겁게 웃었어? 누군가의 손길 한 번 받아본 적 없고 친구 하나 없는 조그만 서리 거인이라니…. 얼마나 쉬운 목표물이었을까!”

“그런 식이 아니었어.”

토르가 고집했다.

“그럼 어떤 식이었는데?”

로키는 몸 양 옆으로 내려놓은 손에 힘을 준 채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로키는 그 날의 소풍을, 빗줄기를, 토르의 너그러움으로 선사 받은 선물들을 떠올렸다. 신이시여. 둘은 동침을 했다. 서로의 옆에서 잠을 청했다. 자신이 토르에게 하도록 허락했던 그 모든 일들이…. 눈물이 끊임 없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괴물 같을 수가, 그렇게 비정할 수가 있어?”

토르가 대답하지 않아, 로키는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말해 봐!”

유령 같은 창백한 모습의 프리가가 진정하라는 뜻으로 두 손을 치켜든 채 걸어 왔다.

“자네에게 고통을 안겨 주려는 뜻은 아니었을 게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들어 보게….”

“저 사람을 변호할 생각은 하지 마시죠.”

로키가 주먹을 말아 쥐며 으르렁대며 말했다. 로키의 마력을 붙들어 놓고 있는 황금 고리에도 불구하고, 힘의 물결이 로키의 몸에서부터 흘러 나와 방 안으로 치닫고 있었다. 토르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의자 두 개가 옆으로 쿵 쓰러졌고, 벽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벽화가 얇게 조각조각나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프리가 왕비의 형상은 아침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묠니르만이 그 받침대 위에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토르가 가까스로 몸을 가눈 후 다시 로키 쪽으로 걸어 오려 시도하기 시작했다.

“왕세자, 제발. 미안해. 잘못된 일인 줄은 나도 알고 있었어. 그래서 그만 두려 했던 거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로키가 흐느끼며 말했다. 로키는 뒷걸음질을 쳤다. 두 사람의 몸이 받침대 주위로 원을 그리며 돌고, 또 돌기 시작했다.

“날 침대로 데려 갔지. 다정함과 싸늘함을 번갈아 가면서 보여주어 날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고는, 내게 미끼를 던진 거지….”

로키는 정말로 이 잔혹한 계략에 완전히 속아 넘어갈 뻔 했다. 이 사악한 야만인에게 자신이 뭔가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착각할 뻔 했다. 멍청하고,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허약해 빠진 자식 같으니.

“그러려던 의도는 절대 아니었어!”

토르가 두 팔을 내민 채 로키의 걸음을 쫓았다.

“나는…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어. 나도 내가 바보 같이 행동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

“바로 그거야.”

로키는 문을 등진 채 몸을 멈춰 세운 후, 토르 쪽으로 사납게 삿대질을 했다. 토르가 받침대의 반대편에서 우뚝 얼어 붙었다.

“너는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바보 멍청이야.”

로키가 말했다.

“날 정말로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걸 보니. 네 계획이 정말로 먹혀들 거라 생각한 걸 보니.”

로키의 심장이 분노의 불길 안에 단단히 싸인 채 굳어지기 시작했다. 입으로부터 튀어 나온 말들이 이글이글 끓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너 같은 야수를 사랑하기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말이야.”

토르가 저만치 떨어진 벽에다 몸을 축 기대 세웠다. 그 끔찍한 푸른색 눈이 바닥 위로 떨구어져 내렸다.

“나도 알고 있어.”

토르가 말했다. 산산조각 난, 연약한 목소리였다.

“나도 알아.”

로키는 이 방을 뛰쳐 나가 자신의 가짜 남편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달아나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곳에 한 시간 정도 더 자리를 지키고 선 채, 눈물을 떨구어 내리며 자신의 말로 토르를 난도질해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로키는 그 둘 어떤 것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방 문이 벌컥 열렸다. 헤임달이 염려의 표정을 띤 채 복도의 횃불 불빛을 받으며 문가에 서 있었다.

“왕자님.”

헤임달이 말했다.

“두 분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오셔야 합니다. 두 분 다요. 지금 당장.”

“가 보게, 헤임달.”

엉망이 된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어, 토르가 말했다. 토르는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지금은 적기가 아닌 것 같군.”

“왕자님. 오셔야만 합니다.”

헤임달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말했다.

“요툰헤임의 국왕이 왔습니다.”


*    *    *





nal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16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15
[토르로키/번역]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 (11/16)
#17
[토르로키/번역]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 (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