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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로키/번역]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 (14/16)

토르로키 / Thorki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왕세자와 야수)"

by triedunture


원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5267873


  • 작가님께서 번역은 출처를 포함하여 자유롭게 하라고 명시하셨습니다. (https://i.imgur.com/r6PfDqx.jpg)
  • 에시르 토르x요툰 로키 정략결혼 AU입니다. 구전동화 느낌이 살짝 끼얹어진 작품으로 이야기 중간중간에 화자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 로키를 비롯한 모든 요툰 종족은 인터섹스(자웅동체)라는 설정입니다. 엠프렉 언급이 있습니다.
  • 요툰헤임에는 성별의 구분이 없고 누구나 아이를 밸 수 있기 때문에, 어머니/아버지라는 단어 대신 (주로 동물 번식에서) 누가 씨를 뿌렸고 누가 새끼를 배었는지 칭하는 단어인 dam/sire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 단어들은 원문에서 사용한 의미와 가장 비슷한 단어인 '종빈/종모'로 번역합니다.



*    *    *


14장.


로키는 오딘의 사저 건물에서 걸어 나왔다. 자신이 어떻게 멀쩡히 걸어 나왔는지는 로키도 말해줄 수 없을 것이다. 팔다리에 아무 감각이 없는 것 같았다. 두 팔이 몸 옆에 납처럼 매달려 있었다. 발을 내딛고 있는 판석의 감촉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자신의 육체에서 완전히 떠나가, 마치 비극적인 연극을 지켜보는 관객처럼 이 모든 사태를 저 멀리서 관망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로키는 그 비통한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는 커녕, 더 이상 지켜보고 싶지 조차 않았다.

토르는…어딘가에 있었다. 아마 로키의 옆에 있겠지. 그래. 토르는 거기 있었다. 로키의 왼쪽 편에서 어렴풋이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토르의 그 거짓 봄날 같은 눈이, 그의 나머지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거짓만을 띠고 있는 그 눈이, 로키 쪽으로 무거운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왕세자.”

토르가 입을 열었다.

“라우페이가 왜 왔는지 알고 있나? 당신이…당신이 라우페이를 부른 건가?”

그 짐작은 너무도 터무니없기 짝이 없어서, 로키는 대답조차 주지 않을 뻔 했다. 하지만 감각 없는 입술로부터 자기도 모르게 응답이 흘러 나왔다.

“내 종모가 날 버린 이 곳에 내가 그 사람을 왜 부르겠어? 나는 그 사람과 나눌 이야기 없어.”

로키는 헤임달의 뒤를 착실히 따르며 모퉁이를 돌았다.

무용한 분노가 마비시켜 놓은 자리에, 싸늘함이 대신 자리를 잡았다. 로키의 가슴 안으로 서리가 기어 들어갔고, 심장을 둘러 결정체를 형성해 놓았다. 토르의 친절함은 모조리 연극일 뿐이었다. 로키의 애정을 얻기 위한 술책이었다. 그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니었다. 그 어떤 것도 이제는 소용 없었다. 로키는 이 세상 속에서 완벽히 혼자였다. 친구 하나, 동료 하나 없었다. 로키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니 행복하게도, 로키에게는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었다.

차디찬 안도감이 비통으로 이루어진 외투처럼 로키를 감싸 왔다. 로키의 옛 가면과도 잘 어울리는 옷임은 틀림 없었다. 하지만 로키는 자신의 그 가면이 심장과 함께 부서져 버렸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로키의 두 눈에, 로키의 입가에 고통스러운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제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얼굴에서 쓸어 내는 로키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로키는 보지 못했지만, 토르는 보았다.

“괜찮아?”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기는 중 토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만큼은 로키도 그 질문을 무시하는 데 성공했다. 저 멍청한 질문들에는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토르가 다시 한 번 애를 써 보였다.

“미안해. 나는….”

“알현실에 거의 다 이르렀습니다.”

헤임달이 두 사람 쪽으로 몸을 돌리며 그 말을 잘랐다.

“저는 이만 떠나 보아야 합니다. 조심하십시오, 왕자님.”

헤임달이 주저하며 이렇게 일러 주었다.

로키는 토르의 중얼거리는 응답을 귀기울여 듣지 않았다. 수행을 기다리는 대신 로키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왕실 근위병들이 로키의 앞으로 거대한 대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아스가르드의 알현실은 그 대회당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꽤 인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높은 아치형 천장, 두꺼운 보라색 벨벳 커튼, 아름답게 세공된 조각상과 태피스트리들. 하지만 이미 낮은 탁자에 자리를 잡고 있는 두 명의 존재감 덕에 그 모든 화려함은 색이 바래고 말았다. 헬라와 라우페이였다. 두 사람이 로키가 들어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냉랭한 불쾌감이 두 사람 얼굴 위로 동시에 떠올랐다.

“로키.”

서리 거인의 왕이 방 안을 울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석 더미 위에 우아하지 못하게 걸터앉아 있던 라우페이는 (라우페이의 거대한 몸집을 수용할 만큼 큰 의자는 없었던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좋아 보이는구나. 아스가르드에서 널 잘 먹여주고 있나 보군.”

라우페이의 어두운 붉은 색 눈이 헬라 쪽을 휙 향했다. 음식 같은 사치품으로 자기 자식의 버릇을 잘못 들여 놓았다고 비난하기라도 하는 눈빛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종모.”

로키는 탁자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누구와도 눈을 맞추고 싶은 생각이 없어. 로키는 벽 쪽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무엇보다 토르의 눈을 마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야만인은 로키의 옆자리를 선택하더니, 로키가 몸을 움찔할 정도로 가까이 몸을 붙여 앉아 왔다. 로키는 자신이 몸을 움찔한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 했기를 바랐지만, 토르는 눈치를 챘다.

방 안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왕실 근위병들이 눈부시게 빛나는 뿔 투구를 쓴 채 한 쪽 벽을 등지고 나란히 서 있었다. 라우페이의 뒤에는 털 외투와 거칠고 간소한 튜닉을 걸친 파견단이 서 있었다. 로키는 파견단 중 자기 형제들 몇 명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들은 로키를 반기는 말이나 손짓 같은 것은 전혀 건네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로키 또한 그들을 무시했다.

마침내 헬라가 입을 열었다.

“이 날이 우리 두 왕국의 역사에 새겨지리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군요. 에시르와 요툰이 한 탁자에 앉아 있다니. 우리가 얼마나 기적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지.”

헬라의 미끄러운 검은 색 머리가 라우페이 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나는 역사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니오.”

라우페이가 말했다.

“오딘은 어디 있소? 손님을 초청해 놓고는 만나 보지도 않으려는 것인가?”

라우페이가 에시르 양피지 하나를 꺼내더니 탁자 위에다가 던졌다. 그 두루마리가 탁자 위에서 굴러가는 동안, 이미 금 가 있는 아스가르드 왕실의 붉은색 밀랍 봉인이 벗겨져 떨어져 나갔다.

토르가 그 야수 같은 얼굴에 잔뜩 혼란을 드리운 채 로키 쪽을 바라보았다. 로키는 그 새로운 소식에 무심한 척 행세해 보이기 위해 애를 썼다. 오딘슬립에 빠져 있는 올파더가 그런 편지를 보냈을 리는 없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무슨 목적으로 그랬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제 아버지는….”

토르가 라우페이 쪽으로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불운하게도 왕은 지금 오실 처지가 못 되십니다.”

헬라가 불쑥 끼어들었다.

“왕은 시급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잠시 떠나야만 하셨고, 자신을 대신해 우리들을 보내셨습니다. 깊은 유감의 말을 전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국왕님을 만나 뵙기를 정말로 고대하고 계셨는데 말이지요.”

토르가 그 말은 거짓이라 주장하려는 듯 했지만, 로키는 매서운 눈길을 쏘아 보내 토르를 조용히 시켰다. 진실을 나누기에는 이 장소의 공기가 너무 위태로웠다.

라우페이가 코웃음을 쳤다. 라우페이가 머리 위에 얹힌 나무와 뼈로 된 왕관 끝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그랬을 것 같지는 않군. 하지만 상관 없소. 오딘이 우리 협상 자리에 자기 자식들을 대신 보내고자 한다면, 그러라고 하지.”

“물론 아버지께서도 우리가 의논해야 할 사항에 대해서는 제게 모두 설명해 주셨습니다.”

헬라가 부드럽게 말했다.

“기쁜 소식은 이미 들으셨겠지요?”

로키는 고개를 들었다. 공포가 피 속으로 스며 들어와, 이미 차갑게 식어 있던 피를 더더욱 차디차게 얼려 놓기 시작했다. 탁자 끝에 앉은 종모가 냉랭한 루비 색깔의 눈으로 로키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들었네.”

라우페이가 읊조렸다.

“그래서…사실인가, 로키? 이 에시르의 자식을 배고 있는 건가?”

라우페이의 거대한 머리가 토르가 앉아 있는 쪽으로 까딱였다.

“그렇습니다.”

그 거짓말은 저기 어딘가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 같이 들렸다.

“절 축하해 주러 오신 겁니까, 종모?”

“널 축하해 줘?”

라우페이의 얼굴이 혐오감으로 일그러졌다.

“네가 축하를 받을 만한 일을 뭘 했다고? 가만히 드러누워서 씨를 받는 것은 그 어디에나 널린 창부도 할 수 있는 있이다. 네가 맞서 싸우기라도 했더라면….”

토르가 너무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당신이 이 왕실의 손님이기는 하지만요, 라우페이.”

토르가 으르렁대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 왕세자에게 그런 식으로 말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라우페이가 손을 내저었다.

“나는 내 자식에게 내가 내키는 대로 말할 것이다.”

“앉아, 오딘슨.”

로키는 아무 감정 없이, 미동 없이 중얼거렸다.

“무례하게 굴지 마. 더군다나….”

로키는 토르 쪽으로 몸을 돌린 후 살짝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네 게임은 이제 끝났어. 이제 그런 겉치레는 필요 없는 거 알잖아?”

“하지만….”

토르는 입을 꾹 닫더니, 남아 있는 품위나마 지키려는 듯 의자를 다시 세우고 로키가 시키는 대로 했다.

로키는 다시 종모 라우페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셨죠? 제가 전사처럼 맞서 싸우기라도 했더라면, 종모의 이상상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질 수 있었을 거란 이야기인가요?”

“글쎄다. 그 누구도 네가 전사 지위를 획득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을 거다, 로키. 하지만 적어도 네가 이 에시르들을 상대로는 맞수가 되겠지. 네가 조금 더 노력해 맞서 싸우지 않은 것이 실망스럽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구나.”

“저희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을 때 종모께서…. 기억하실지는 모르겠군요. 제 유일한 고향에서 저들이 절 끌어냈던 그 때 말이지요. 그 때 종모께서는 절더러 날뛰지 말라고 말씀하셨지요. 마침내 요툰헤임을 위해 공헌하는 일을 하는 데 기쁜 마음을 가지라고요.”

로키의 얼음 가면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목소리에 열기가 떠올랐고, 눈이 번득이며 빛을 발했다.

“이제 와서야 제가 바로 그 정반대로 해야 했다고 말씀하시는군요.”

옆에서 무엇 때문인지 토르가 몸을 들썩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분노일까? 로키는 그에게 자신의 주의를 낭비하지 않았다. 탁자 덮개 아래로 토르의 손이 자신의 손에 닿아 오는 것을 느꼈을 때, 로키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손을 떨쳐내 버렸다.

“내 말은, 네가 내 명령에도 불구하고 분투하리라 생각했다는 뜻이었다. 이번만큼은 네가 내 명령에 문자 그대로 따랐다는 사실이 유감이로구나.”

라우페이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네가 모든 일을 너무도 복잡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어.”

쿡쿡 쑤셔오는 심장이 목구멍에 처박혀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야 종모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라우페이는 자신이 맞서 싸우기를 바랐다. 라우페이는 로키의 에시르 남편이 다른 에시르들이 그렇듯 야만적이고 자비 없는 사람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라우페이는 로키가 적의 영지에서 죽기를 바랐던 것이다.

로키는 죽었어야만 했다. 로키가 아직까지 살아 숨쉬고 있으며, 표면적으로나마 이 에시르 왕자의 자식을 배고 있다는 사실은, 요툰 왕좌의 계승권이 완전히 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라우페이는 그 일을 바로잡기 위해 온 것이다.

그리고 라우페이가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은, 헬라가 올파더 행세를 해 라우페이에게 전언을 보냈기 때문이다. 로키는 헬라가 자리잡고 있는 쪽 탁자 끝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헬라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자기 손톱을 응시하며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 지금까지 헬라는 언제고 로키를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헬라는 미끼 역할을 시키기 위해 로키를 살려 놓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함정이었다.

라우페이는 여전히 뭔가를 주절주절 떠들고 있었다. 그들 머리 위에 도사리고 있는 위협을 눈치채기에는, 라우페이는 자기 문제에 너무 심취해 있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너는 네 생득권을 포기해야만 한다.”

라우페이가 말했다.

“네 뱃속에 있는 그 아이는 오딘의 왕실에 속한 아이가 될 것이고, 너도 물론 이 곳에 머물러야 하겠지. 네 왕세자 자리에서 물러나 그 지위를 네 형제 르굴베에게 양보하는 쪽이 마땅할 것이다.”

로키는 요툰 파견단과 함께 서 있는 르굴베를 쳐다보았다. 형제의 바싹 깎아 민 머리통은 불운하게도 울퉁불퉁했다. 그 기다란 얼굴과 멍청한 두 눈은 제왕의 풍모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잠시나마 로키의 입술 위로 비웃음이 떠올랐다. 저 자가 얼음 왕좌의 계승자가 된다고?

멍청이들. 헬라가 자기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왕좌 같은 것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종모,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저희들끼리 잠깐 의논을 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로키가 말했다. 헬라의 자리 쪽으로 조심스레 눈짓을 해 보이며 로키는 라우페이가 그 단서를 눈치 채기만을 바랐다. 잠시 동안만이라도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눌 수만 있다면….

“자세한 사항들을 종모와 함께 검토해 보고 싶습니다.”

라우페이가 코를 흥 들이마셨다.

“의논할 것은 없다. 선언문은 이미 대신 써 가지고 왔으니, 네 손으로 쓸 필요도 없어. 네가 서명만 하면 되는 일이다.”

“부탁입니다, 종모.”

로키가 이를 악다문 채 말했다.

“선언문의 내용을 함께 살펴 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 저희들끼리요.”

“맞는 말이군.”

헬라가 벽 쪽에 늘어선 근위병들과 파견단 쪽으로 손짓을 해 보이며 말했다.

“모두 잠깐 나가 있거라. 왕족들끼리만 논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잠시면 된다. 끝나면 다시 부르도록 하겠다.”

헬라의 명령에 근위병들은 문 밖으로 줄지어 나갔다. 요툰 군단은 라우페이가 고개를 끄덕여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로키는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절박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안 돼. 로키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정말로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나게 되는 것일까?

문이 무겁게 덜컥 소리를 내며 닫혔다. 로키는 입술을 핥은 후, 종모에게 자신이 처한 위험한 위치를 깨닫게 해 주고자 다시 한 번 시도했다.

“제 말을 좀 들어 보세….”

“그 조그만 혀를 대체 언제까지 놀릴 셈이냐?”

라우페이가 고함을 질렀다.

“내 자문단과 네 가족들 앞에서 날 부끄럽게 만드는구나! 왜 너는 항상 이런 식으로 모든 일을 어렵게 만들려 하는 것이지?”

라우페이의 냉랭한 붉은 눈이 자신의 첫째 자식에게로 파고 들었다.

“대체 왜 내가 너 같은 저주를 떠안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로키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토르가 고함을 지르며 다시 한 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당신이 부끄러워 해야 할 일입니다, 라우페이 왕!”

그 조그만 기교에 로키는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토르, 지금은 그런 연극을 선보일 때가 아니야.”

로키가 말했다.

헬라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방 안을 가로질러 왔다.

“그러게다. 감정들이 격양되고 있구나.”

헬라가 자리에서 일어 서더니, 두 손을 등 뒤로 포갠 채 느릿느릿 탁자를 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와인 한 잔이라도 하실까요? 에일 맥주 한 잔은요? 예민한 문제를 논하기 전 마음을 다스릴 만한 걸로요.”

“음료 같은 건 필요 없소! 나는 이 쓸모 없는 내 후예를 내쳐 버리면 끝이오.”

라우페이가 내뱉었다.

“그러고 나면 당신네들의 군대를 남부 평야에서 철수시키는 문제를 논의할 수 있겠지.”

헬라가 종모의 뒤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을 지켜보며, 로키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종모는 여전히 자리에 그대로 앉은 채 헬라 쪽으로 살짝 머리를 기울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모를 수 있는 거지?

“사실, 문제를 더 쉽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헬라가 말했다.

자기 누이의 목소리에 담긴 의도를 알아챈 토르가 팔을 뻗으며 앞으로 나섰다.

“헬라, 잠깐…”

“안 돼!”

로키가 비명을 질렀다.

이미 늦었다.

미친 사령관의 미소 만큼이나 날카롭고 잔인한 칼날이 라우페이의 가슴을 관통해 튀어 나왔다. 로키가 무력하게 서 있는 동안 뺨 위로 피가 튀어 왔다. 로키는 종모가 자신을 궤뚫은 무기를 멍하니 내려다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종모가 텅 빈 붉은 눈을 들어 로키의 시선을 마주했다. 종모의 입이 벌어져 열렸지만, 그 입에서는 핏줄기만이 흘러 나올 뿐이었다.

거인은 죽은 채 탁자 위에 쓰러졌다.

헬라는 소환해 낸 무기를 라우페이의 꿈틀거리는 몸에서 빼 내며 한숨을 쉬었다. 그 신비로운 칼날이 갈비뼈와 척추를 스치며 까득대는 소리를 냈고, 빠져나온 칼날은 사라져 버렸다.

“나는 와인 한 잔 정도 들었으면 했는데.”

헬라가 말했다.

로키는 종모 쪽으로 다가가며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미 종모의 두 눈에서는 생명의 빛이 사라져 있었지만, 그래도 로키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상처를 닫아 주어야 할까? 라우페이가 로키의 삶에 안겨 준 그 모든 증오와 비애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로키의 종모였다. 어쩌면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하지만 토르가 로키의 팔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헬라, 무슨 짓을 한 거야?”

토르가 고함을 쳤다.

자신이 시체와 함께하고 있는 방 안에 그들 둘 또한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기억하기라도 한 듯, 헬라가 눈을 들어 보였다.

“골칫거리를 해결한 거지. 내 희망 사항은 그래. 어디까지 했더라? 아, 그렇지.”

헬라가 시체가 있는 곳을 떠나더니 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로키는 토르의 손아귀 안에서 몸부림을 쳤다. 로키의 눈은 아직도 종모 쪽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종모에겐 내가 필요해. 가 봐야 해. 나는….”

“미안해. 라우페이는 죽었어.”

토르가 멀리 방 구석 쪽으로 로키의 몸을 끌어당겼다.

“여기서 나가야 해.”

헬라가 과장스럽게 문을 두 손으로 밀어 열었다. 로키는 문 바깥 복도의 광경에 숨을 헉 들이켰다. 푸른색 몸뚱아리 더미. 로키의 동료 요툰인들이, 로키의 형제들이, 난도질 당해 있는 모습. 피가 뚝뚝 흐르는 칼을 손에 쥔 아스가르드 근위병들이 그 위에 발을 디디고 서 있었다.

“내 동생과 그 반려가 요툰 국왕을 암살했다.”

헬라가 자신 동포들에게 선언했다.

“나 대신 저 자들을 좀 죽여 주겠나? 반항하려 들거든 알아서 진압해 주게. 내게는 다른 걱정할 문제들이 있어서 말이다.”

그러고는 두 사람에게 어깨 너머로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헬라는 쓰러진 요툰인들을 짓밟으며 떠났다.

근위병들이 방 안으로 몰려오는 것을 보며 로키는 절망했다. 둘은 무장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수적으로 열세였다. 가망은 없었다. 로키는 덫에 걸린 동물처럼 죽음을 맞을 것이다. 그 누구도 로키를 애도하지 않을 것이다. 로키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토르가 그를 끌고 태피스트리 뒤의 숨겨진 문으로 데리고 가지만 않았어도, 로키는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을 것이다.

“무슨…?”

뒤에서 문이 쾅 닫히는 것에 로키는 숨을 헉 들이켰다. 두 사람은 어두운 통로에 서 있었다. 유일한 불빛이라고는 그 곳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헤임달의 손에 들린 횃불 불빛 밖에 없었다.

“받으십시오.”

헤임달이 횃불을 로키의 손에다 쥐어 주며 말했다.

“저는 문을 막도록 하겠습니다.”

왕자의 신하가 문을 막는 동안, 로키는 몸을 돌려 토르가 전투 갑주를 팔에다 끼워 넣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발치에 갑주들이 한 더미 쌓여 있었다. 헤임달이 알아서 가져온 모양이었다.

“이게 뭐야?”

로키가 종용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어?”

“내 누이가 언젠가는 행동을 취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지.”

토르가 가슴 갑주를 껴입으며 말했다.

“하지만 오늘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어. 그리고 누이가 라우페이를 살해할 것이란 사실도 몰랐도. 미안해, 왕세자. 막을 수가 없었어.”

근위병들이 문을 내려치고 있었다. 문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로키는 나무 문 바깥에서 외쳐오는 거친 고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문이 버티지 못 할 거야.”

로키가 말했다.

“가야 합니다.”

헤임달이 성 밑 깊숙한 곳까지 그들을 이끌고 갔다. 시종들이 다니는 통로라는 사실을, 로키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들은 시종들이 조용히 보이지 않게 움직일 때 이용하는 비밀 터널 안에 있었다.

토르가 짧은 검을 벨트에다가 꽂아 넣었다.

“우리 사람들은 어디 있는가, 헤임달?”

토르가 물었다.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을까? 헬라는 왕실 근위병들을 자기 편으로 두고 있지만, 우리도 군대를 모으기만 한다면….”

“왕자님, 많은 전사들이 저희 뜻에 충성할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왕자님의 능력이 되돌아 왔다는 징후를 기다리고 있지요. 물론 일부 전사들은 왕자님의 편에 설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신 없이 사령관에게 맞서는 것은 자살 행위라 생각할 이들도 있을 겁니다.”

로키의 마음 속이 요동쳤다. 토르가 지금까지 쭉 조직을 모아 오고 있었다는 것인가? 하지만 토르의 번개 없이는 이 모든 일이 무용할 것이다.

토르가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면 아버지께로 가야겠군. 아버지를 깨우는 것만이 우리 유일한 희망이야. 아버지께서 내 능력을 돌려 주실 수 있을 거야.”

횃불 불빛에 밝혀진 헤임달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로키를 응시했다.

“혹시 왕세자님께서….”

“안 돼.”

토르가 말했다. 목구멍으로부터 거칠게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에, 로키는 눈을 깜빡였다.

“언쟁할 시간 없네. 얼른 아버지의 침실로 데려가 주도록 하게.”

어둠 속에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간 끝에, 그들은 또다른 문 앞에 이르렀다. 올파더의 사저 건물로 통하는 문이었다. 갑자기 한낮의 불빛이 눈을 파고 들어와 로키는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빛에 적응할 시간 같은 것은 없었다. 토르와 헤임달이 황급히 오딘의 방까지 로키를 데리고 갔다.

“오, 세상에….”

문을 밀어 연 토르가 숨을 내뱉었다.

바닥 위에 시체가 쌓여 있었다. 올파더에게 충성하던 몇 안 남은 근위병들일 것이라고, 로키는 생각했다. 피투성이의 몸뚱아리들 옆에는 근위병의 뿔 투구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침대 위에는 마지막 시체가 누여 있었다. 죽음을 맞은 오딘의 얼굴은 창백했다. 목에는 끔찍하게 붉은 자상이 남아 있었다. 눈 하나가 여전히 뜨인 채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딘이 자기를 살해한 사람을 목격했을지 로키는 궁금해졌다. 헬라가 오딘의 목을 직접 베었을까, 아니면 그 끔찍한 일을 대신 실행해 줄 사람을 고용했을까?

“아버지.”

토르가 오딘의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토르의 손이 죽은 이의 차갑고 창백한 손을 움켜 쥐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토르가 흐느꼈다.

그 모습은 로키의 심장을 둘러싼 얼음 한 겹을 금 가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로키는 황급히 자신의 나약함을 책망했다. 로키의 적들은 자신의 동정심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 생각에 안주할 시간은 없었다. 방 바깥 복도에서는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 멀리서 비명이 들려 왔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도, 혼란스러운 고함 소리도 들려 왔다. 이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안전하지 않았다.

“토르, 떠나야 해.”

로키가 갑주 입은 어깨에 손 하나를 올렸다. 로키의 손 밑에서 그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자신 역시 조금 전 그와 똑같은 상실을 겪었던 입장에서, 로키는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존 본능이 그 감정을 압도해 왔다. 이번에는 자신이 냉정한 판단력으로 임해야 할 차례라면, 로키는 그렇게 할 것이다. 애도할 시간은 없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왕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어. 가야 해.”

“이제 어떻게 하지요, 왕자님?”

헤임달이 물었다.

세상에. 헤임달에게도 선택지가 바닥나 버린 거라면, 정말로 그들은 곤경에 처한 것이 틀림없었다. 로키는 토르를 잡아당겨 일으켜 세운 후 그의 두 눈을 마주했다. 로키는 눈으로 조용히 대답을 간청했다.

토르가 로키와 시선을 마주하며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리도록 놓아 두었다. 그리고, 의지력이 비통의 자리를 채워 오기 시작했다. 그 푸른 눈이 살짝 부드러워졌다.

“우리는 마구간으로 가겠네. 로키와 나 말이네, 헤임달.”

토르가 헤임달을 바라보며 말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을 모으게. 대회당에서 만나도록 하지. 그 곳에서 전선을 구축할 거네.”

헤임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행운을 빕니다, 왕자님.”

헤임달은 서둘러 떠났다.

“이해가 안 돼. 왜 대회당으로 가기 전 마구간에 가야 한다는 거야?”

로키가 물었다.

“도착하면 설명해 주지.”

토르가 말했다. 바깥의 혼란스러운 소음이 점점 더 기세를 더하고 있었다.

“어서 와. 시간이 별로 없어.”

두 사람이 달려가는 동안, 두 사람의 손이 무언의 합의 하에 서로를 찾아 꽉 손을 움켜 쥐었다. 로키는 거부하지 않았다. 이제 두 사람이 떨어지는 것은 너무도 위험했다. 모퉁이를 도는 곳마다 죽음과 파괴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몇 번이고 바닥에 널린 시체를 껑충 뛰어 넘어야 했고, 성벽을 따라 몰아치며 커튼과 장식물들을 삼키고 있는 불길을 피해야 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달려 나왔다. 그들은 왕실 근위병들이 미쳐 버렸다며 공포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토르는 사람들을 향해 성을 당장 떠나 숲으로 향하라고 소리를 쳤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토르의 그 명에 따랐다. 여전히 자신 죽음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 가고 있는 사람들에는, 로키는 생각을 기울이지 않았다.

마침내 두 사람은 마구간이 있는 성 안뜰로 뛰쳐 들어왔다. 여전히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비명과 고함 소리에 말들은 잔뜩 겁을 먹은 상태였다. 말들이 마구간 칸 안에서 말발굽을 부딪혀 대고 힝힝대는 소리를 울리는 바람에, 로키의 귀가 아파 왔다. 토르는 다른 모든 말들을 무시해 지나치며, 곧장 스톰브레이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얼룩덜룩한 말은 이미 준비 되었다는 듯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전쟁 소리에는 이미 너무도 익숙해 있는 말이었다.

“안장을 채울 시간은 없을 것 같군.”

토르가 스톰브레이커를 마구간에서 데리고 나오며 중얼거렸다.

“안장 없이 타야 할 거야.”

“뭐라고? 나 말이야?”

로키가 멈칫해 보였다.

“너는 나와 함께 안 타는 거야?”

“그래.”

토르가 대답했다. 토르가 로키의 몸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말의 등 위에다가 내려 놓았다.

“요툰헤임에는 지금 당신이 필요해. 이제 요툰헤임의 정당한 왕은 당신이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찾도록 해.”

로키는 말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 만을 바라며 스톰브레이커의 회색 갈기를 한 웅큼 움켜 쥐었다. 말이 발을 굴리는 것에 심장이 미친듯이 쿵쿵 뛰어 왔다.

“이 말을 다룰 수 있는 건 너 뿐이잖아!”

로키가 항의했다.

“왜 내가…!”

“스톰브레이커를 다룰 필요 없어. 그저 꽉 붙잡고 있기만 해. 스톰브레이커는 빠르고 강한 말이야. 당신을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 줄 거야.”

토르가 말의 머리를 두 손으로 붙잡더니 그 동물의 미끈한 두 검은색 눈 사이에다 이마를 갖다 댔다. 스톰브레이커가 그 손길에 조금 더 침착해지더니, 조용하게 숨결을 내뿜었다.

“부디 이 사람을 잘 데려다 주도록 하렴.”

토르가 속삭였다.

“부탁해.”

“너는 어떡하고?”

로키가 물었다.

“너는 같이 안 가는 거야?”

토르가 말을 놓아 주더니, 고개를 흔들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여기서 헬라를 상대해야 해.”

“헤임달이 한 말 들었잖아! 네 능력 없이는 사람이 충분하지 않을 거야. 헬라는 자기 길 앞에 놓인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려 하고 있다고! 너는 상대조차 되지 않을 거야!”

“그래. 안 되겠지.”

토르가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헬라의 움직임을 조금 늦출 수는 있을 거야.”

토르가 칼을 빼 냈다. 토르의 다른 쪽 손이 위로 뻗어와 로키의 손을 붙잡았다.

“아스가르드는 무너질 거야.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상관 없어. 이제 중요한 것은 당신을 안전하도록 해 주는 일 뿐이야.”

“왜?”

로키는 그 기묘한 에시르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그 두 눈이 의지로 굳어져 있었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으로 넘쳐 흐르고 있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대체 왜 신경 쓰는 거야, 오딘슨?”

“왜냐하면….”

토르가 말을 멈췄다. 다시 눈을 돌리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토르의 손이 로키의 손을 꽉 움켜쥐어 왔다.

“이걸 이야기해 줄 생각은 없었어. 당신이 듣고 싶어하지 않을 말로 짐을 지워 주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끝나려 하는 지금, 당신이 알아 주었으면 해.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야.”

토르가 진실된 봄날의 푸른색 눈을 들어 올리더니,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 왕세자. 아홉 왕국의 그 어떤 것도 당신만큼 소중한 존재는 내게 없어. 내가 죽더라도, 나는 당신이 여전히 살아 있으리란 사실을 알고 죽을 거야.”

토르가 한데 붙잡힌 두 사람의 손을 입술 쪽으로 가지고 가, 로키의 손마디 위에 입을 맞추었다.

“용서해 줘. 참을 수가 없었어.”

“토르….”

로키는 숨막힌 소리를 내뱉었다. 자신이 듣고 있는 이 말이 대체 뭐지? 이것이 현실일까? 두 사람 모두…?

두 사람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토르의 눈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이제 가.”

토르가 말했다.

로키는 생각할 수 없었다. 움직일 수 없었다. 바싹 마른 입 안에서 혀가 둔탁하게 느껴졌다.

“잠깐만….”

토르가 칼날 무딘 쪽으로 스톰브레이커의 둔부를 내리쳤다.

“어서 가!”

토르의 명령에, 말이 마구간 밖으로 쏜살같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안뜰을 가로질러, 그리고 성 대문을 통과해서.

로키는 말의 갈기에 매달렸다. 세상이 옆으로 질주하는 동안 로키는 뜨거운 말 살갗 위에 얼굴을 짓누르고 있었다.

“잠깐만…!”

로키가 소리쳐 불렀지만, 그 목소리는 바람에 떠내려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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