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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로키/번역]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 (15/16)

토르로키 / Thorki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왕세자와 야수)"

by triedunture


원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5267873


  • 작가님께서 번역은 출처를 포함하여 자유롭게 하라고 명시하셨습니다. (https://i.imgur.com/r6PfDqx.jpg)
  • 에시르 토르x요툰 로키 정략결혼 AU입니다. 구전동화 느낌이 살짝 끼얹어진 작품으로 이야기 중간중간에 화자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 로키를 비롯한 모든 요툰 종족은 인터섹스(자웅동체)라는 설정입니다. 엠프렉 언급이 있습니다.
  • 요툰헤임에는 성별의 구분이 없고 누구나 아이를 밸 수 있기 때문에, 어머니/아버지라는 단어 대신 (주로 동물 번식에서) 누가 씨를 뿌렸고 누가 새끼를 배었는지 칭하는 단어인 dam/sire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 단어들은 원문에서 사용한 의미와 가장 비슷한 단어인 '종빈/종모'로 번역합니다.



*    *    *


15장.


말은 맹렬한 속도로 로키를 성채 바깥으로, 그 너머의 마을로 몰고 갔다. 로키는 거의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말의 목을 미친듯이 붙들고 있느라 머리를 들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비명 소리와 전투 소리가 귀에 들려 왔다. 성을 둘러싼 마을까지 전쟁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그 어떤 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키는 자기가 올라타고 있는 근육 덩어리의 동물에 생각을 기울일 수 없었다. 이 거친 승마 덕에 나중에 틀림없이 몸에 멍이 들게 될 것이란 사실도, 스톰브레이커의 거센 말발굽 뒤로 목숨을 보전하려 달리고 있는 아스가르드인들에도, 로키는 마음을 줄 수 없었다.

로키의 머리 속에 있는 것은 토르와, 그 믿을 수 없는 작별 뿐이었다.

그 야수가…자신을 사랑한다고? 언제부터? 대체 어떻게? 모든 일이 말도 안 되는 것만 같았다. 로키는 자기 자신의 불충스런 심장과 힘겹게 맞서 싸우느라, 자신 애정의 대상 역시 고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야만인이 자기 끔찍한 계획을 그만두고자 결심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을까? 로키에게 이용당했다는 고통을 안겨 주지 않으려? 토르의 그 결정 덕에 토르는 자기 왕국을 잃게 될 것이다. 자신 목숨 또한 잃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보냈던 밤의 기억들이 로키의 머리속으로 헤엄쳐 들어왔다. 그 푸른 눈이 응시해 오는 모습 하나 하나, 그 거친 손이 닿아오는 감촉 하나 하나, 토르가 했던 말 한마디 한마디, 헤임달에게 자기 계획은 이걸로 끝이라고 선언하고 나서도 토르가 선사했던 그 모든 선물들….

굳건한 확신이 로키를 사로잡았다. 토르에게 가야만 한다. 너무 늦기 전에 가야만 한다.

“멈춰!”

로키는 말 갈기를 잡아당기며 소리를 질렀다.

“다시 성으로 데려가 줘!”

물론 말은 로키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로키와 말은 사람으로 붐비는 마을길을 따라 돌진해 내려갔다. 희생양이 되어 있는 마을 사람들도, 황금색 망토를 걸친 방위병들도, 말의 기세에 옆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스톰브레이커가 뒤집힌 수레 위를 훌쩍 뛰어 넘어 반대편에 착지했고, 로키는 폐에서 숨이 쥐어짜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 후에도 말은 계속 전력 질주를 해 나갔다.

로키는 말에서 뛰어 내릴까 하고 잠깐 고민했다가, 곧장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땅바닥에 머리가 수박마냥 부딪혀 깨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로키는 절박한 심정으로 말에 꽉 매달렸다.

“부탁이야.”

로키는 이 동물이 알아들을 수 있기만을 바라며 속삭였다.

“네 주인의 목숨이 위험해. 돌아가야 한다고!”

어쩌면 그 군마가 로키의 말을 알아들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눈 앞의 길에 펼쳐져 있는 불길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마 후자가 조금 더 가능성 있을 것이다.

어찌 됐건, 스톰브레이커는 발을 멈춰 세우더니 요란하게 우는 소리를 내며 뒷다리로 번쩍 일어섰다. 로키는 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로키는 그 자리에 누운 채 헐떡이고 있었고, 말은 전혀 동요하지 않은 듯 꼬리를 흔들며 혼잡한 군중 속으로 느긋이 걸어가 버렸다.

로키는 사람들에 짓밟혀 버리기 전에 얼른 몸을 일으켜 세웠다. 로키는 뺨에 묻은 진흙을 닦아 냈다가, 검은색 흙과 함께 손가락에 묻어져 나온 붉은색 액체를 빤히 응시했다. 종모의 피를 닦아낼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로키는 몸이 떨리는 것을 겨우 참아 눌렀다. 살아 남으려면, 지금 이 순간에 정신을 집중해야만 했다.

이제 두 발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주변의 참상이 더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피투성이가 된 머리를 움켜쥐며 비틀거리는 남자들, 나풀거리는 치마를 걸친 채 아기를 가슴에 끌어안고 도망치려 애쓰는 여자들, 울며 도움을 청하는 어린 아이들. 왕실 근위병들이 그 혼란 사이로 걸어가며, 움직이는 모든 존재를 수확기계처럼 내리쳐 쓰러뜨리고 있었다. 그 순전한 비탄의 규모에, 로키는 전쟁에 짓밟힌 요툰헤임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헬라는 자기 국민들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좌우로 흔들리는 나무 간판 하나가 시선에 들어와, 로키는 눈을 반짝 빛냈다. 간판에는 검은색 모루와, 모루 위에 놓인 망치가 그려져 있었다. 대장간이었다. 로키는 손목을 감싸고 있는 황금 고리에 손을 가져다 대며, 시체 더미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 서늘하고 어두운 작업장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대장간은 비어 있었다. 로키의 심장이 내려 앉았다. 대장장이가 쓰는 기구들도 그 통에서 사라져 있었다. 공포에 질린 군중들이 대장간에 침입해 자신을 방어할 만한 무기들을 챙겨 간 모양이었다.

“거기 너, 멈춰!”

로키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소리쳐 불렀다.

심장이 입까지 튀어 나오는 기분으로, 로키는 뒤로 돌아섰다. 덩치가 산 만한 남자 하나가 문가를 가리고 서 있었다. 남자의 두툼한 손 안에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철퇴가 쥐어져 있었다.

“당신은 사령관 편인가?”

그 남자가 종용했다.

로키는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했다. 아는 목소리였다.

“볼스타그?”

로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당신인가?”

로키의 남편의 덩치 커다란 친우가 그림자로부터 걸어 나왔다. 로키를 알아 본 볼스타그 역시 눈을 깜빡였다.

“왕실의 반려가 아니십니까!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거죠?”

로키는 두 팔을 들어올려 손목에 매인 황금 고리를 흔들어 보였다.

“이것에서 자유로워질 방법을 찾고 있지. 자네는? 토르도 자네와 함께 있나?”

볼스타그가 털 덥수룩한 머리를 흔들었다.

“아직 왕자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제 친우 펜드랄과 호건이 무참하게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지요. 우리가 대련하고 있던 중 그 자들이 습격해 왔습니다. 레이디 시프는 혼란 중에 놓쳐 버리고 말았지요. 시프가 살아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겠군요. 시프를 찾고 있는 중이었는데….”

볼스타그가 낮은 천장 쪽으로 붉은색 눈을 들어올렸다.

“내 친우들이…내 고향이….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로키는 황급히 앞으로 달려나갔다.

“지금 눈물 흘릴 시간은 없네. 왕자가 우리 도움을 필요로 해. 그리고 내겐 대장장이가 필요하고. 대장장이는 대체 어디 있나?”

볼스타그의 입에서 쓰디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 대장장이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사람들 모두 산 쪽으로 달아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키는 미친듯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볼스타그가 그 커다란 손에 쥐고 있는 철퇴가 눈에 들어왔다. 로키는 자기 왼쪽 손을 응시했다. 로키가 주로 사용하는 손, 토르가 입을 맞추었던 손이었다. 머리속에 생각이 떠올랐다. 로키는 차갑게 식어 있는 용광로 옆에 높인 커다란 모루를 바라보았다. 로키는 앞으로 몇 발자국 나아가, 그 모루 옆에 나란히 섰다. 로키는 까만 모루 판 위에 자기 왼쪽 팔을 올려 놓고는, 손목의 고리를 향해 고갯짓을 해 보였다.

“당신이 이걸 깨 줘야 할 것 같군.”

로키가 말했다.

“미쳤어요?”

볼스타그가 고함을 질렀다.

“손을 부수어 놓고 말 겁니다.”

“그렇겠지.”

로키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한쪽 손만 속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내 마법을 쓸 수 있게 되겠지.”

로키는 이 일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마음을 다잡으며, 땅바닥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주로 쓰는 손을 자유롭게 할 수만 있다면 마력을 조금 더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 사이의 입구를 열기 위해서는 충분한 마력이 필요했다. 그 때 묠니르가 가두어져 있던 감옥에서도 어느 정도 마법을 이끌어낼 수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한 손 만으로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토르 곁에서 함께 싸울 군대를 이끌어올 수 있을 거야.”

“군대라니요?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로키는 볼스타그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우리가 여기 서서 망설이는 동안, 헬라가 자네 왕국 사람들을 도살하고 있다고! 제발 부탁인데 내 빌어먹을 팔을 좀 부수어 주지 그래?!”

볼스타그가 주저하더니, 조심스러운 표정을 띤 채 두 손으로 철퇴를 들어 올렸다.

“정말로 확실한 겁니까?”

“어서 해!”

로키의 입에서 명령이 숨결처럼 자연스럽게 튀어 나왔다.

“토르가 날 가만 두지 않을 텐데.”

볼스타그가 내뱉었다. 볼스타그가 머리 위로 무기를 높이 들어올리더니 인정사정 없는 힘을 실어 아래로 내리쳤다.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속이 살 위로 내리쳐지는 소리, 거대한 무게 아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황금이 깨지며 끼익대는 소리.

로키는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자기 짓이겨진 손을 내려다본 로키의 입에서 다시 한번 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부서진 손목에 매달려 있는 황금 고리는 비틀려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멀쩡해 보였다.

기절할 것만 같았지만, 로키는 모루에다가 몸을 지탱했다.

“다시 해.”

볼스타그의 얼굴이 우려로 죄어들었다.

“작은 거인, 그러면 안 될 것 같….”

“다시 하라고!”

로키가 소리를 질렀다.

볼스타그가 다시 한 번 철퇴를 내리쳤다. 이번에는 황금 고리가 부서져, 먼지 쌓인 바닥 위로 조각조각 떨어져 내렸다. 로키는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다. 오랫동안 입 밖으로 터져 나가는 괴로운 신음소리였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고통이 로키의 몸 속에서 비틀리며 자라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로키의 마법 또한 밝게 불타올랐다.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한, 강력하게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이거면 충분할 것이다.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미안해요, 미안, 미안….”

로키가 바닥으로 풀썩 쓰러지기 전 볼스타그가 간신히 로키의 어깨를 붙들었다.

“정신을 잃으실 것 같으신가요?”

로키가 의식을 붙잡으려 애쓰는 동안 눈앞이 빙빙 돌았다. 하지만 아직 어둠 속으로 빠져들 수는 없었다. 토르에게는 자신이 필요했다.

“괜찮네.”

로키가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로키는 피투성이로 짓이겨진 팔을 가슴 쪽으로 가져가 감쌌다.

“사실 이보다 더 좋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군.”

땀방울이 흘러 내려, 로키는 눈을 깜빡여 떨구어 냈다.

“성으로 돌아가야 해. 주의를 끌지 않고 정원 쪽으로 날 데려가 줄 수 있겠어?”

볼스타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곳으로 통하는 길을 압니다. 오세요. 저를 붙잡으시죠. 피를 많이 흘리고 계시는군요.”

볼스타그가 로키를 부축해 주는 동안 볼스타그의 튜닉에도 피가 잔뜩 묻어 났다.

대장간 바깥의 세상은 바뀌어 있었다. 몇 분 전만 해도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던 공황의 장소가, 이제는 무시무시하게 조용했다.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초가지붕을 따라 번져 나가고 있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진흙길을 따라 걸어가더니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진흙탕을 가로질러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지는 동안을 고투하며, 걸음을 옮겼다.

“거의 다 왔습니다.”

빛나는 성벽 쪽으로 로키를 반쯤 짊어지다시피 하며 가고 있던 볼스타그가 말했다.

“토르와 제가 젊은이였을 때, 이 비밀 통로를 통해 마을로 가서 진탕 술을 마시고 오고는 했지요.”

“아주 대단하군.”

로키가 꽉 다문 이 사이로 말했다. 팔 전체가 유리에 관통 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날카롭고 또렷한 고통은 수그러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더 커져만 가고 있었다.

성벽의 바닥 쪽으로 빽빽한 야생 가시 덤불이 자라고 있었다. 볼스타그가 그 덤불을 옆으로 제끼자, 벽돌 사이의 틈새가 드러났다. 딱 볼스타그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로키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눌러 삼키며 볼스타그의 뒤를 따랐다.

“연못으로 가는 길이 어디지? 그 구부러진 나무 옆에 있는?”

볼스타그가 땋아 내린 붉은색 머리로부터 나뭇잎 하나를 떼어 내며 대답했다.

“이 쪽입니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울타리 미로 사이를 살금살금 걸어갔다. 다행히 폭력의 손길이 정원에는 미치지 않았지만, 여전히 성 쪽에서는 전쟁 소리가 메아리 쳐 오고 있었다. 헬라의 충성스런 병사들이 어디에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로키는 부러진 팔을 조심스럽게 잡아 올린 후 핏자국이 뒤에 남지 않기만을 바랐다.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충동으로 세이드가 날뛰고 있었지만, 로키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손 앞에 놓인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남겨 두어야만 했다.

미로 모퉁이를 돌던 볼스타그의 입에서 놀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대한 몸 뒤에서 슬쩍 앞쪽을 바라본 로키의 눈에 에시르 남자아이 세 명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이들의 얼굴은 검댕으로 뒤덮여 있었고 눈물 자국으로 가득했다. 로키는 그 아이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너무도 오래 전 그 아이들이 성 안뜰에서 조랑말을 타고 노는 것을, 토르가 그 아이들을 가르쳐 주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볼스타그와 아이들 사이를 지키고 선 채 칼을 빼내 들고 그 아이들을 지키는 소녀 역시 아는 얼굴이었다.

“빌!”

로키가 불렀다. 로키는 볼스타그를 옆으로 밀어 젖혔다.

“괜찮아?”

빌의 두 눈이 안도감으로 커다래졌다.

“왕세자님! 죄송해요. 사령관님의 사람들일까봐 그랬어요. 사령관님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사람 모두를 살해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왕자님께서 국왕을 암살했다고 하더군요. 어쩌면 두 명의 국왕을 죽였을지도 모른다고도 했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온통 달려 다니고 비명을 지르고 싸우고 있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이 아이들을 이 곳에 숨겨 주려 했지요.”

빌의 시선이 로키의 다친 팔 쪽을 향했다.

“오, 세상에….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죠?”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로키가 대답했다. 가슴이 쑤셔 왔다. 아이들, 에시르 아이들마저도, 전쟁 중에는 갈 곳이 없었다. 로키는 볼스타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아이들을 데리고 성벽 너머로 가.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 줘.”

“왕세자님은 어떡하고요?”

볼스타그가 물었다.

“난 괜찮을 거야.”

로키는 거짓말을 했다. 로키는 볼스타그의 거대한 피난처 같은 팔을 향해 아이들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산으로 가렴. 그 곳에선 사령관의 사람들도 너희를 못 찾을 거야. 너도 가, 빌.”

“왕세자님. 혼자 가시면 안 돼요. 그런 몸으로는 말이지요.”

빌이 로키의 배 쪽을 의미심장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볼스타그의 얼굴이 그 붉은 수염 밑에서 창백해졌다.

“맙소사. 깜빡하고 있었잖습니까! 지금 왕자의 후예를 밴 몸으로, 제게 본인 몸을 때려 부숴 달라 시키신 겁니까?”

“그게 아니….”

팔에서부터 새로운 고통의 물결이 밀려와 로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는 아이를 밴 적 없어. 거짓말이었어. 설명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그냥 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능한 한 가장 멀리까지 가. 내 걱정은 하지 말고.”

“하지만 왕세자님….”

빌이 주저했다. 그랬다가 빌이 놀라울 정도로 우아한 손동작으로 들고 있던 칼의 손잡이를 로키 쪽을 향해 내밀었다.

“이거라도 가지고 가세요, 왕세자님. 적어도 한 손은 쓰실 수 있는 것 같으니까요.”

로키는 빌이 말한 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건 네가 가지고 있도록 해. 네게 필요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왕세자님께 더 필요할 거에요.”

빌이 고집했다.

“따지고 보면 왕세자님의 물건인 걸요. 왕세자님이 주신 은화로 산 칼이에요.”

“그랬어?”

“네, 왕세자님. 왕자님께서 제게 그러라고 하셨어요. 저희는 성 안에 있는 모든 하녀들을 무장시켰어요. 왕자님께서는 사령관님이…공격을 가하게 될 날에 저희가 무방비한 상태이길 원치 않으셨거든요.”

로키는 눈을 깜빡였다. 그래, 토르도 시종들의 안녕을 신경쓰고 있기는 했구나. 그 얘기를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음, 그래. 따지고 보면 내 물건이겠구나.”

로키는 빌에게서 검을 건네 받은 후, 오른손 안에서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자신이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제 다들 가 봐. 여기서 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까지 가야 해.”

볼스타그가 로키를 향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커다란 팔에다가 어린아이들을 끌어 안았다.

“이 오솔길을 쭉 따라가면 이그드라실 나무를 찾을 수 있으실 겁니다. 행운을 빕니다.”

빌은 로키를 꼭 껴안아 주고 싶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겨우 그 마음을 참아 누른 듯 했다.

“몸조심 하세요, 왕세자님.”

그 대신 빌은 이렇게 말했다.

아스가르드인들이 떠난 후, 로키는 혼자 남았다.

로키는 볼스타그가 알려 준 방향 쪽으로 길을 따라 갔다. 로키가 걷는 동안 세이드와 피가 손가락 끝으로부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거의 다 왔다. 몇 미터만 더 가면 된다. 로키는 해 내야만 했다. 토르가 기다리고 있다.

로키는 연못 옆의 소환술을 시전했던 장소에 도달했다. 그 날이 겨우 어젯밤 일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때로부터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대기가 전쟁의 열기로 탁했다. 날씨마저도 그것을 알아챈 듯했다. 새벽이 당도함에 따라 마지막 남은 서리 흔적이 녹아 내렸고, 연못 위에 떠다니던 얼음도 기억 속에만 남았다. 머리 위에서는 회색 구름이 위풍당당하게 전열을 다지고 있었다.

비. 로키는 공기 중에서 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로키는 그것이 좋은 징후이기만을 바랐다.

로키는 피투성이가 된 팔을 들어올린 후, 세상과 세상 사이의 공간으로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느릿 걸음을 걷는 죄수들을 수용하고 있는, 그 그림자 속의 공간. 로키는 아스가르드의 왕비를, 자신의 황금 아들을 지켜 줄 사랑 충만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로키는 왕비의 그 모습을 머리속에서 붙들고 있었다.

대문이 열렸다.

소용돌이치는 빛과 색깔의 입구가 연못 위에 나타났다. 연못의 둥그런 가장자리에서부터 물이 위로 빨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물이 다시 밑으로 빗줄기 쳐 내려, 공기 위로 차갑고 상쾌한 안개를 만들어 냈다. 로키는 몸을 떨었다. 로키의 몸은 이제 뜨거운 땀에 젖어 있었다. 다른 속박구들이 여전히 매인 상태로 마법을 이끌어 낸 덕분에, 둑의 콩알만한 구멍을 통해 물이 쏟아져 나오듯 마법이 로키의 몸에서 쏟아져 나왔다. 로키가 계속한다면 그 마법이 로키의 몸을 찢어 놓고 말 것이다.

로키는 계속했다. 입구가 깊어지고 넓어지는 동안 로키는 비명을 질렀다. 그 통로가 장막을 가로질러 지나가 다른 영역으로 도달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통로를 따라 잃어버린 왕비가 걸어 나왔다. 왕비는 사냥꾼의 가죽 띠를 두르고 있었고, 왕비의 주황색 예복이 갑작스런 바람에 물결치며 뒤로 휘날렸다. 그림자가 아닌, 유령도 아닌, 왕비의 실물이었다.

“자네가 우리를 포기한 줄로만 알았다.”

프리가가 포효하는 마법 너머로 소리내 불렀다.

로키는 떨리는 손을 위로 높게 치켜들었다. 이제는 로키의 의지력만이 그 대문을 열린 상태로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은 포기 했었습니다.”

로키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하지만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몇 번씩이나 바보 같은 짓을 해 와서 말이지요.”

프리가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고개를 뒤로 돌렸다.

“내 전사들이여! 내게 오거라!”

입구를 통해 방패 든 에시르 전사들이, 전설 속의 발키리들이, 눈처럼 하얀 말에 올라탄 채 달려 나왔다. 발키리들의 길게 땋아 내린 머리가 빛을 발했고, 손에 들린 무기들 역시 환하게 빛을 냈다. 날개 달린 탈것들 위에 닿은 축축한 공기가 물방울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열 명, 스무 명, 서른 명, 백 명…. 발키리들은 계속, 계속해서 달려 나왔다. 그들의 목소리가 한 데 뭉쳐진 낭랑한 외침이 되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얼마 전 로키의 목을 거의 베어 버릴 뻔 했던 기다란 검은 머리의 발키리가, 로키 옆에서 말을 멈춰 세웠다. 발키리가 검은 눈으로 밑을 빤히 내려다 보았다.

“또 당신이로군.”

여자가 말했다.

“당신 이름이 뭐라고 했지?”

로키는 턱을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나는 ‘조그만 자’ 로키…”

“이 사람은 ‘강인한 자’ 로키이다!”

왕비가 자신의 결집한 군대를 향해 외쳤다.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누가 우리를 풀어줄 수 있었겠는가? 요툰헤임의 왕세자여, 우리는 당신에게 빚을 졌다!”

발키리들이 칼을 꺼내 들어 허공에다 찌르며, 소리를 한 데 모아 하! 하는 소리로 응답했다.

로키는 그 모습을 경탄에 차 바라 보았다. 프리가가 세상 사이를 잇는 통로를 돌아 보았고, 로키는 자신의 과업은 이제 끝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로키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손을 내려 놓자, 통로가 닫히기 시작해 바늘 구멍 같은 빛으로 쪼그라들었고, 다음 순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왕비님, 지난 몇 시간 동안…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로키는 이제 쓸모 없는 팔을 다른 손으로 안아 든 채 말했다.

“헬라가 성 안에서 날뛰고 있습니다. 헬라는 제 종모와 폐하 두 분 모두를 살해했습니다. 두 왕국을 자신이 차지하려는 속셈인 것 같습니다.”

프리가의 창백한 얼굴이 더더욱 창백해졌다.

“왕이 죽었다고?”

발키리 부대들 사이로도 그 말이 전해져 나갔다. 말에 탄 전사들의 애도의 울부짖음이 공기를 찢었다.

“내 아들은?”

프리가가 재촉했다. 프리가 주위의 전사들이 다시 조용해졌다.

“토르는 어떻게 되었느냐?”

로키는 고개를 흔들었다.

“토르는 자신의 능력 없이 누이의 군대에 저항해 싸우고 있습니다.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요. 토르를 구해야만 합니다.”

로키는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프리가를 응시했다. 갑자기 말이 목구멍 속에 박혀 버린 것만 같았다.

“부탁입니다…저는…. 토르를 구해야만 해요.”

왕비가 한참 동안 미동 없이 서 있다가, 허리에 매달려 있는 칼을 빼내 들었다.

“발키리들이여!”

프리가가 소리를 질렀다.

“백 년의 시간 동안 나는 감옥에서 고통 받았다! 백 년 하고도 몇 천 년의 시간 동안 자네들은 감옥에 갇힌 채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미친 사령관이 우리에게서 시간을 앗아갔고,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그리고 이제는 아스가르드까지 앗아가려 하고 있다! 누가 그 자를 멈추게 하겠는가?”

다시 한 번 발키리들 사이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회색 공기 중으로 물결 같은 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더 크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발키리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로키는 깨달았다. 분노의 노래였다. 승리의 노래였다.

“전장을 향하여!”

프리가가 기수 없는 말의 고삐를 붙잡더니 은색 안장 위로 번쩍 올라탔다. 프리가는 칼을 높이 치켜 들었다.

“영광을 향하여!”

“’강인한 자’ 로키.”

검은 머리의 발키리가 로키를 불렀다.

“말을 탈 수 있나?”

그 발키리가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로키가 알아채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로키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발키리를 올려다 보았다.

“내 팔이….”

로키가 겨우 말했다.

프리가가 허공에서 한 손으로 손짓을 했다. 황금색 세이드가 로키의 몸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으스러진 뼈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고, 살갗이 꿰매어졌다. 로키는 그 감각에 낮은 신음 소리를 흘렸다. 로키는 손목을 시험삼아 구부려 보았다. 여전히 쑤시기는 했지만, 적어도 이전의 그 으스러진 모습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 정도로 될 게다.”

프리가가 말했다.

“말을 탈 수 있는가?”

“네. 탈 수 있습니다.”

로키가 대답했다.

“그러면 우리와 함께 가지.”

발키리가 말했다. 그 여자가 로키 옆에 이미 준비된 상태로 서 있는 새하얀 말의 굴레를 당겨 왔다.

로키가 겨우 안장 위에 올라타자 마자, 발키리 부대가 프리가를 선두로 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창과 검이 방패에 부딪히며 북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정원을 빠져나가 곧장 성 쪽으로 달려 들어가며, 발키리들은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말들은 몇 세기 동안의 감금 생활에 대한 보상을 청하기라도 하듯 질주해 달렸다. 너무 빠르게 달렸는지라 거의 나는 것 같이 보였다. 로키의 말은 전사들 사이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는듯 했고, 로키는 말을 다룰 필요조차 없었다. 그들 부대가 성 통로를 따라 진격하는 동안 판석 위에서 말발굽이 따그닥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근위병들 몇몇이 발키리 부대의 모습에 기겁해 얼어 붙었지만, 발키리들은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그 자들을 베어 버렸다.

“대회당이요. 토르가 그 곳에 있을 겁니다!”

로키가 말발굽 소리 너머로 프리가에게 소리쳤다.

왕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모퉁이를 돌았다. 전사 부대가 성을 가로질러 자신들의 자취를, 정의의 물길을 새기며, 그 뒤를 따랐다. 로키는 빌이 준 칼을 한 손으로 꼭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고삐를 붙잡으며 전쟁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한참 떨어진 곳에서도 로키는 대회당의 문을 알아볼 수 있었다. 번쩍이며 빛나는 황금 대문은 이제 피로 뒤덮여 있었다. 병사와 시종과 가신들의 시체가 뒤범벅이 되어 그 앞에 꼬꾸라져 있었다.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죽음을 맞은 남자와 여자들. 로키는 토르의 모습을 찾았지만, 토르는 보이지 않았다.

“헬라를 내게 데려 와라!”

자신 쪽으로 감히 창을 치켜들어 보이는 근위병 전선을 짓밟고 지나가며, 프리가가 고함을 쳤다. 프리가의 검 만큼이나 무시무시한 마법이 앞으로 몰아쳤다.

전투는 탁한 안개로 변해 갔다. 무기와 말들이 한데 뒤섞인 혼란 뿐이었다. 로키는 손에 든 칼을 휘둘렀고, 약하게나마 남아 있는 세이드를 적군 쪽으로 쏘아 보냈다. 몇 명을 죽인 것 같기도 했다.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토르의 모습을 찾는 데 너무 정신이 팔려 있었다. 로키의 주위로 발키리들은 노래하며 싸웠다.

대회당에 몇 안 남은 충성스런 이들이, 그 전투 모습을 목격하고는 결집해 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돌아온 왕비를 향해, 오랫동안 잊혀졌던 여인 전사들을 향해 함성을 질렀고, 새로이 얻은 힘으로 왕실 근위병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가 이길 수 있겠어. 로키는 생각했다.

로키는 거칠게 숨을 몰아 쉬며 충신들 무리 쪽으로 달려갔다.

“왕자는, 왕자는 어디에 있나?”

로키가 소리를 질렀다.

“토르는 어디 있지?”

에시르 전사 중 한 명이 복도 쪽으로 손을 가리켜 보였다. 로키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로키는 냅다 말에서 뛰어내린 후 칼을 옆으로 던져 버렸다. 로키가 달려 가는 동안 다친 팔이 희미하게 지끈지끈 쑤셔 왔지만, 로키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자기 남편에게로 가는 것 뿐이었다.

“토르!”

복도는 고요한 학살의 현장이었다. 로키는 쓰러진 병사들과 부러진 무기 사이를 헤치고 지나갔다. 로키의 눈에 하얀 판석 위로 스며든 핏자국이 들어왔다. 그 핏자국은 도시를 내려다 보는 널찍한 발코니 쪽까지 이어져 있었다.

시야 한 구석의 붉은색 빛. 그 곳에 움직이지 않는 한 형체가 있었다.

“토르.”

로키는 겨우 내뱉었다. 그 속삭임은 거의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로키는 토르에게 달려가 무릎으로 털썩 미끄러져 주저 앉았다. 로키는 토르의 어깨를 붙잡은 후 힘껏 흔들기 시작했다. 피가 너무도 많았다.

“토르, 내 말 들려?”

“로키?”

핏덩이가 엉겨 붙은 눈이 파르르 떨리며 열렸고, 로키의 얼굴 위로 그 시선이 고정되었다. 두 눈에 깨달음이 쏟아져 들어왔다. 토르의 목구멍에서 고통스러운 낮은 신음이 흘러 나왔다.

“안 돼. 당신은 여기 있으면 안 돼. 당신은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하는데.”

로키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나 돌아 왔어.”

“그렇다면 내가 헛된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로군.”

자기 눈 앞의 광경을 차마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듯, 토르가 눈을 꽉 닫았다.

“넌 안 죽어.”

로키가 말했다.

“적어도 오늘은 아니야.”

“아니, 난 죽게 될 거야.”

토르가 겨우 이렇게 뱉어냈다. 피로 미끈거리는 토르의 손이 발코니로 통하는 아치형 입구를 향해 앞으로 뻗어져 나갔다. 발코니 바깥에서는 차가운 안개가 빗줄기로 변해, 철 난간 위로 부드럽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비를 느끼고 싶어.”

토르가 말했다.

“마지막 딱 한 번만.”

로키는 그 요청을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다. 로키는 토르의 몸을 팔로 부축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아치형 입구를 지나쳐 나갔고, 빗줄기 속에 이르렀다. 발코니에 도착한 로키는 토르를 눕힌 후 자기 다리 위에 토르의 머리를 누여 주었다. 빗방울이 토르의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토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토르의 눈이 어두운 구름을 응시했다. 빗방울이 토르의 눈물과 섞여 들기 시작했다.

“고마워, 왕세자.”

토르가 속삭였다. 토르의 숨결이 조금씩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로키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조용히 흐느꼈다. 그 말을 꺼내야만 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로키는 너무나 힘겹게 고투했다. 왜 자신이 해야 하는 그 말을 그냥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는 것일까?

“토르.”

로키는 토르의 수염 덥수룩한 뺨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날 좀 봐.”

그 기묘한 푸른 눈이, 고통과 갈망으로 가득한 그 눈이, 로키를 향해 왔다.

“미안해.”

토르가 말했다.

“나는….”

토르의 눈이 감겨 닫혔다.

“안 돼.”

로키는 숨을 들이켰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토르! 일어나!”

로키는 토르의 피투성이 얼굴에서 머리카락을 걷어 냈다.

“사랑해. 내 말 들려? 지금까지 내가 사랑해본 그 어떤 것보다 널 더 사랑해. 그럴 수 없을 거라 말해서 미안해. 거짓말이었어. 난 늘 거짓말만 하거든. 내가 널 증오해야 하는 순간에도, 난 널 사랑했어. 널 사랑하는 걸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아. 제발, 부탁이야. 일어나 줘.”

토르는 깨어나지 않았다. 토르의 얼굴은 축 늘어진 채 고요했다. 로키는 눈물을 쏟아내며 그 얼굴을 응시했다. 자신의 사랑은 충분히 순수하지 않은 것이었을까? 진실되지 못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너무 늦어 버린 것일까?

“사랑해.”

로키가 속삭였다.

“사랑해, 토르. 제발….”

로키는 몸을 숙여 떨리는 입술을 토르의 입에다 대고 눌렀다. 두 사람의 첫 입맞춤이었다. 짠 맛과 피 맛이 나는 입맞춤. 여전히 토르는 움직이지 않았다. 로키는 몸을 뗐다. 그 사랑하는 얼굴에서 생명의 징후를 찾아 헤맸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로키는 울음을 터뜨렸다. 커다랗고, 기나길고, 태초의 것 같은, 상실의 울음 소리. 로키는 토르의 가슴에 머리를 묻은 채 그의 몸을 붙들었다. 자신의 에시르 남편, 야만인, 자신의 아름다운 야수. 무장한 군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는 것이 귀에 들려 왔지만, 로키는 신경 쓰지 않았다. 헬라의 사람들이 올 테면 오라고 하라. 적어도 이 모든 것이 끝날 때, 사랑하는 사람 옆에서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당신도 알 것이다. 기적.

토르의 갑주 끈을 움켜쥐고 있던 로키의 손을, 거친 손이 감싸 왔다.

로키는 머리를 홱 쳐들며 숨을 내뱉었다.

“토르?”

토르의 두 눈은 더 이상 푸른색이 아니었다. 토르의 눈이 깨끗하고 순수한 번개와 같은 하얀색을 띠고 있었다. 전능한 힘이 튀어 나갔다. 저 멀리서 희미하게 돌이 깨지는 소리, 벽돌이 폭발하는 소리,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토르가 한 손을 허공으로 치켜 들었다. 망치 묠니르가 날아와 탁 소리를 내며 그 손에 붙잡혔다.

“로키.”

여전히 망치를 머리 위로 들어올린 채로, 토르가 입을 열었다.

로키는 다시 한 번 토르에게 입술을 맞추었다. 토르의 몸 주위를 꿈틀대며 감싸고 있는 번개는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그 번개는 아프지 않았다. 번개가 스치는 살갗 한 점 한 점이 날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천둥처럼 밝게 타오르며 날아 오르는 느낌. 로키의 남편이 다시 한 번 신으로 되돌아왔다. 로키의 입술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두 사람은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이제 로키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토르의 입술의 따스함, 그리고 자신을 강하게 붙들고 있는 토르의 팔의 힘 뿐인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도, 지글지글 타오르는 번개 한 줄기가 여전히 둘 사이를 이어 놓고 있었다.

“나도 사랑해.”

토르가 말했다.

“잘 됐네.”

로키는 침을 꿀꺽 삼킨 후 마지막 남은 눈물을 닦아 냈다.

“음…아주 잘 된 일이야. 하지만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것부터 먼저 처리하도록 할까?”

“기꺼이 그러도록 하지.”

토르가 발을 디디고 일어났다. 하지만 토르의 몸은 땅으로부터 몇 센티미터 정도 떠올라 있었다. 폭풍우의 바람이 토르의 몸을 지탱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토르가 중얼거리더니, 아직 황금 고리가 매여 있는 로키의 오른쪽 손목 위에 손 하나를 올려 놓았다.

번개가 자기 몸 위로 찌릿찌릿 흘러오는 것을 느끼며 로키는 숨을 헉 들이켰다. 손목과 발목에 매여 있던 고리들이 모조리 부서져 돌바닥 위로 조각조각 떨어져 내렸다. 로키의 목에 감겨 있던 황금 족쇄 역시 두 조각으로 갈라졌고, 토르는 그 고리를 옆으로 던져 버렸다. 마법이 로키의 몸을 감싸 왔고, 로키가 가장 아끼는 망토도 돌아 왔다. 로키는 토르를 올려다 보았다. 자신의 눈 역시 토르의 것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훨씬 나은 걸.”

로키가 말했다.

토르가 미소지은 후, 고개를 돌려 황금색 망토를 두른 경비병들이 창을 치켜들고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바라 보았다. 토르가 로키에게 정중하게 손짓을 해 보였다.

“당신 먼저.”

로키는 마법을 쏟아 내 그들 절반을 날려 보냈다. 토르가 강력한 망치를 바닥에 내려쳐 나머지 절반을 휩쓸어 버렸다. 대회당에서 더 많은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자연스러운 기분으로, 로키는 토르와 등을 맞대고 싸웠다. 한 데 섞인 두 사람의 힘, 하얀색 번개와 녹색 세이드가 어우러진 모습은, 로키가 지금까지 목격한 그 어떤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

“저 자들은 왕비님의 군대로부터 후퇴하고 있는 걸 거야.”

로키가 공격하는 사이로 말했다.

“왕비님이 발키리들과 함께 오셨어. 아, 내가 말 했던가? 발키리들은 실존하는 인물들이었어.”

“이 전쟁이 끝나고 난 후 할 이야기가 많겠는걸.”

토르가 근위병 한 명의 가슴을 냅다 걷어 차 발코니 난간 너머로 날려 버렸다.

“그나저나 당신 팔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볼스타그가 부러뜨려 놨지.”

로키는 다친 쪽 팔을 가슴에다 감싼 채 오른손으로 마법을 쏘아 보냈다.

“그렇다고 볼스타그한테 화는 내지 마. 내가 시킨 거거든.”

“할 이야기가 아주아주 많겠군.”

토르가 망치를 휘두르며 투덜거렸다.

“동생아!”

헬라의 차디찬 목소리가 성을 가로질러 울려 퍼져 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돌려, 미친 사령관이 이 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헬라는 양 손에 칼을 쥔 채 온 몸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진심이냐?”

토르의 손에 붙잡힌 망치를 본 헬라가 조소를 흘렸다.

“그 수 년 동안 계획과 노력 끝에, 네 놈이 그딴 싸구려 기교로 내 원대한 순간을 망쳐 놓으려 하고 있는 건가?”

“누이가 한 일에 원대한 점이라고는 없어!”

토르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누이가 한 일은 아스가르드의 명예를 더럽힌 것 밖에 없지.”

“아스가르드의 명예를 더럽혀?”

헬라가 머리를 학처럼 쭉 뻗어 뒤를 돌아 보았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이냐?”

헬라가 느긋하게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헬라의 손에 들린 칼날이 돌바닥 위를 긁으며 지나갔다.

“죽음, 파괴, 고통…. 이것이 아스가르드의 참모습이지. 나는 되려 지금 이 모습을 축하하려 하고 있단다, 내 동생아.”

헬라의 미소가 새하얗게 빛났다.

“우리는 그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어.”

토르가 말했다.

“그래야만 해. 우리 왕국이 저지른, 우리 아버지가 저지른 죄악들을…. 우리는 바로잡을 수 있어, 헬라. 우리가 과거의 잘못들을 속죄한 후 함께 할 수 있을 일들을 한 번 생각해 봐.”

지독한 냄새를 맡기라도 한 듯 헬라의 코가 한껏 찌푸려졌다.

“누군가 역사를 쓰도록 남겨 두는 것은 실수가 되겠지.”

헬라가 느릿느릿 말했다. 헬라의 칼날이 비를 맞아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다.

“단 한 명의 역사가들도 오늘 하루를 살아 넘기지 못하게 만들 예정이라서 말이다.”

헬라가 토르와 로키를 향해 동시에 무기를 날려 보냈다. 그 신비로운 무기들이 헬라의 명에 따라 공기를 가로질러 왔다. 토르는 그 무기를 옆으로 쳐 냈고, 로키는 몸을 굴려 피했다. 하지만 수 십 개의 칼날이 그 뒤를 더 따랐다. 로키는 머리속으로 빠르게 생각하며 자신이 가장 애용하는 마법을 시전했다. 자신과 토르의 환영들이 잔뜩 나타나 헬라 주위를 단체로 감싸 왔다.

“한심한 장난 짓거리 같으니라고.”

헬라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더니, 사방으로 백 여개의 칼날을 날려 보냈다. 환영들은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기다란 검은 창 하나가 날아와 로키의 실제 어깨를 관통했고, 로키는 비명을 질렀다.

“로키!”

토르가 로키 쪽으로 달려 왔다. 그 틈을 타 헬라가 칼날로 토르의 가슴 쪽을 베었다. 하지만 토르는 그 상처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토르는 묠니르를 들어올려 힘껏 밑으로 내리쳤다.

망치가 머리 위를 내려치기 전, 헬라가 그 망치를 손으로 붙잡았다. 잠시 동안, 누이와 동생은 기묘한 장면을 연출하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토르는 고투하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헬라는 토르의 모든 움직임을 가로막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로키는 땅바닥에 널부러진 채 그 모습을 지켜 보며, 어깨에 깊게 파묻힌 칼날에 손을 가져 갔다. 헬라의 입술 위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 두려움이 닥쳐 왔다.

“너는 늘 내 물건을 훔치고는 했었지.”

헬라가 말했다.

“내가 못 가진다면, 그 누구도 못 가지게 만들어 주지.”

그리고 그 초자연적인 힘을 내뿜어, 헬라는 묠니르를 날카로운 조각조각으로 산산이 부수어 버렸다.

“안 돼!”

로키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토르는 여전히 싸웠다. 그 하얀색 눈으로부터 번개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토르가 한 번 내려칠 때마다 헬라는 세 번의 공격으로 맞받아쳤다. 헬라의 잔인한 칼날이 몇 번, 몇 번이고 토르의 몸을 베어 왔다. 죽이려는 목적보다는 고통을 이끌어내려는, 얕디얕은 상처들이었다. 로키의 두 눈이 공포로 크게 뜨였다. 헬라는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토르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도, 토르는 헬라를 무찌를 수 없었다.

로키는 어깨에서 칼날을 빼 내려고 몸부림을 쳤다. 뭐라도 해야 한다. 뭐라도….

“보고 있나, 작은 거인?’

헬라가 소리쳐 불렀다. 토르의 목덜미를 움켜쥔 후, 헬라는 그 강철 같은 손아귀로 토르의 몸을 들어 올렸다. 로키 쪽을 향한 헬라의 시선이 입술의 그 미소만큼이나 냉랭했다.

“내가 진짜 마술을 보여 주도록 하지. 여기 지금 이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헬라가 토르의 얼굴에다 칼날을 휘둘렀고, 다음 순간 토르의 오른쪽 눈이 사라져 있었다.

토르가 비명을 질렀다. 로키는 토르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헬라가 몸을 돌려 다시 로키를 쳐다보았다. 그 얼굴은 피로 뒤덮여 있었다.

“쨘, 사라졌지.”

“이 괴물 같은 인간….”

로키가 이를 갈며 말했다. 로키의 세이드가 헬라 쪽으로 날아 갔지만, 수 천 개의 칼날이 마법의 물결을 막아 냈다. 마법은 그대로 로키의 가슴 쪽으로 반사되어 돌아왔다. 로키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한 쪽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 앉았다. 몸에서 숨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토르가 헬라의 손아귀 안에서 몸을 비틀었다. 텅 빈 검은색 안와가 얼굴 위를 황량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로키, 얼른 가! 도망쳐!”

얼른 가, 도망쳐.”

헬라가 그 말을 흉내냈다.

“두 사람 아주 역겹기 짝이 없구만.”

헬라가 토르의 몸을 바닥에다 집어 던졌다. 헬라의 주먹이 이제 땅을 때리고 있는 빗줄기처럼 강하게 토르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물과 피로 흠뻑 젖어 들기 시작했다.

“아스가르드의 왕자가, 사랑에 모든 것을 내걸다니. 네 꼴을 좀 보거라!”

헬라가 몇 번, 몇 번이고 토르를 내려치며, 토르의 얼굴에다 대고 조롱했다.

“정말로 네 놈이 날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가?”

“아니.”

토르가 피투성이가 된 입술로 헐떡이며 뱉어냈다.

“하지만 저 분은 널 이길 수 있으시지.”

토르의 한 쪽 눈이 헬라 너머를 응시했다.

로키도 그 시선을 따랐다. 프리가가 칼을 한 손에 든 채 아치 입구에 서 있었다. 발키리 수십 명이 그 뒤를 지키고 서 있었다.

“어머니께 반갑다는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을 셈이냐, 헬라?”

왕비가 물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났는데 말이지.”

“당신은 내 어머니가 아냐.”

헬라가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헬라가 피 흘리는 토르를 그 자리에 놓아둔 채, 키 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로키는 자기 상처에도 불구하고 토르 쪽으로 필사적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당신은 두 개 왕좌로 향하는 내 길을 막는 또 하나의 방해물일 뿐이야. 나는 이제 다른 방해물들은 모두 극복했어. 당신 또한 그와 다를 바는 없겠지.”

“그러고는 어떻게 할 셈이냐?”

프리가가 물었다.

“과연 두 개 왕국으로 네가 만족할 것 같으냐? 혹은, 또 다른 전쟁, 그리고 또 다른 전쟁을 벌여, 모든 왕국에 죽음과 먼지만이 드리울 때까지 계속할 셈이냐? 그러고 나면 무엇을 통치할 생각이지? 시체와 빈 껍데기밖에 남아있지 않을 터인데.”

“시체도 나쁘지 않지.”

헬라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다시 한 번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시체들은 별로 말을 안 하거든.”

왕비가 미친 사령관과 싸우기 시작하자 칼날이 칼날에 부딪히는 쨍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중에 전해져 내려올 이야기에 따르면, 그것은 오랫동안 후세에 전해져 내려 올 위대한 전투였다. 하지만 로키는 그 싸움을 거의 눈여겨 보지 못했다. 로키의 온 정신은 토르만을 향해 있었다. 로키는 토르의 부서진 몸을 팔로 감싸 안은 채, 할 수 있는 한 그를 지키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로키는 미친 듯이 마법을 쏘아 보내 토르의 수많은 상처를 치유하며 속삭였다.

“내가 여기 있어. 모두 괜찮아질 거야.”

“모두 괜찮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토르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당신 말을 믿어.”

로키는 참을 수가 없었다. 로키는 다시 한 번 그 피투성이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발코니의 쇠 난간 쪽에서, 프리가가 마침내 헬라를 무장해제 상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무거운 세이드가 헬라의 강력한 두 팔을 붙들어 눌렀고, 헬라는 몸부림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 긴 검은 머리의 발키리가 헬라의 한 쪽 어깨를 붙들었고, 다른 발키리 한 명 역시 그 쪽으로 다가와 헬라를 붙들었다. 헬라는 사나운 눈으로 좌절스러운 고함을 내질렀다.

“죽음의 여신을 죽일 수는 없을걸.”

헬라가 프리가를 향해 내뱉었다.

“그러려는 생각은 없네.”

왕비가 대답했다.

“네 범죄에 대한 처벌로, 나는 널 세상과 세상 사이의 공간으로 보낼 것이다. 그 땅에는 싸울 수 있는 적도, 일으킬 수 있는 전쟁도 없지. 네가 그 회색 안개 안에서 그 어떤 방식의 평화이든 찾을 수 있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헬라의 눈이 공포로 커다래졌다.

“안 돼! 그럴 수 없어!”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프리가가 세이드로 소용돌이치는 손을 치켜 들었다. 프리가의 두 눈이 눈물로 젖어 들기 시작했다.

“잘 가거라, 딸아.”

부자연스러운 힘의 묘기를 선보이며, 헬라가 속박으로부터 뛰쳐나와 프리가의 목을 향해 짐승처럼 달려 들었다. 무기가 목표물에 꽂혀 들어가는 소리가 쇠 난간을 따라 울려 퍼져 왔고, 찰나의 끔찍한 순간 동안 로키는 프리가가 치명적인 공격을 입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상기된 얼굴을 한 발키리가 헬라의 곁에 선 채, 그 사령관의 가슴에 자기 창을 궤뚫고 있었다.

“네가 받아 마땅한 것보다 훨씬 자애로운 최후로군.”

발키리가 헬라의 귀에다 대고 으르렁거렸다. 발키리의 창이 헬라의 몸에서 젖은 소리를 내며 빠져 나왔다. 헬라는 비가 내려치는 돌바닥 위로 쓰러졌다.

로키는 열린 입으로 숨을 몰아 내쉬었다. 눈 앞에 보이는 장면을 믿을 수가 없었다. 로키는 토르를 붙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모두 끝났나?”

토르가 중얼거렸다.

“우리가 이긴 건가?”

“그래.”

로키는 눈물을 쏟아 내리며 말했다.

“모두 끝났어.”

“잘 됐군.”

토르의 눈꺼풀이 떨려 왔다.

“이제 나는 좀 자야 할 것 같아.”

“그래, 그렇게 해.”

로키는 토르의 입가에서 피를 닦아낸 후,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네가 깨어날 때 그 자리에 있을게.”

“나도 알아.”

토르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지만, 토르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찌 됐건, 당신은 날 사랑하니.”

토르가 의식을 잃는 모습을 지켜보며, 로키의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도 천천히 사라져 갔다. 비가 더 거세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로키의 팔이 토르의 몸을 꽉 움켜 쥐었다. 로키는 이 야만인을 사랑했다. 그리고 로키는 그 역시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 노래 한 자락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 모든 일이 간단해지리라는 법은 없었다.

이제 두 사람은 두 왕국의 정당한 왕이었다. 지도의 양쪽 끝에 있는 왕좌에 각각 올라야 하는 운명이었다. 오랜 전쟁의 양쪽 끝에서 맞서야 하는 위치였다.

처음 시작할 때 일렀듯이, 이 동화는 슬픈 이야기이다.

내 말을 귀담아 들었는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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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로키/번역]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 (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