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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로키/번역]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 (2/16)

토르로키 / Thorki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왕세자와 야수)"

by triedunture


원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5267873


  • 작가님께서 번역은 출처를 포함하여 자유롭게 하라고 명시하셨습니다. (https://i.imgur.com/r6PfDqx.jpg)
  • 에시르 토르x요툰 로키 정략결혼 AU입니다. 정략결혼이라고는 하지만 로키 입장에서는 거의 포로로 잡혀온 신세이기 때문에 초반의 로키 취급이 좀 좋지 않습니다...구전동화 느낌이 살짝 끼얹어진 작품으로 이야기 중간중간에 화자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 로키를 비롯한 모든 요툰 종족은 인터섹스(자웅동체)라는 설정입니다. 엠프렉 언급이 있습니다.
  • 요툰헤임에는 성별의 구분이 없고 누구나 아이를 밸 수 있기 때문에, 어머니/아버지라는 단어 대신 (주로 동물 번식에서) 누가 씨를 뿌렸고 누가 새끼를 배었는지 칭하는 단어인 dam/sire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 단어들은 원문에서 사용한 의미와 가장 비슷한 단어인 '종빈/종모'로 번역합니다.



*    *    *


2장.


꿈이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이것 또한 알 것이다. 다른 사람의 꿈 이야기를 듣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따분한 일이라는 것을. 물론, 당신 자신의 꿈은 흥미로울 것이다. 당신의 심장이나 당신의 미래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를 찾을 수 있는 열쇠이니까. 하지만 당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특별한 점이 없으며, 매우 거슬리기만 할 뿐이라는 점을 일러 두겠다. 그렇기에 사과의 말을 올려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번 이야기의 이 시점에서, 당신의 꿈이 아닌 다른 사람의 꿈 이야기를 들려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끝날 것이라 장담한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얼마든 잊어 버려도 좋다. 어쨌거나, 꿈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아스가르드에서 보낸 첫 날 밤에, 로키는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로키는 겹겹이 주름진 아스가르드 예복을 입은 채 벼랑 끝에 서 있는 여인을 보았다. 여인은 전사들처럼 단단하고 근육이 잘 붙은 몸을 지니고 있었다. 그 쪽으로 다가간 로키는, 여인이 요툰헤임 북부의 얼음 지대를 내려다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향의 모습을 본 로키의 심장이 죄어 왔다. 꿈 속의 정경에서도 고향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여인이 로키 쪽으로 몸을 돌렸다. 황금색 머리가 머리 꼭대기에 다발다발 땋여진 채로 얹혀 있었다. 여인의 눈은 오딘슨의 것과 같은 거짓 봄날의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그 두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뜨여 있었다.

“거기 누구냐?”

여인이 물었다.

로키의 혀가 입 안에서 무겁게 느껴졌다.

“물어보는 그 쪽은 누구죠?”

예복을 입은 여인이 한 쪽 어깨를 들더니, 로키의 대답이 일리 있다고 말하기라도 할 것처럼 입술을 들썩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여인은 사라져 버렸다. 로키는 토르의 붉은 망토에 몸이 뒤얽힌 채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로키는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일어나 앉아 불가 쪽을 바라보았다. 벽난로 앞 오딘슨의 자리는 비워져 있었다. 벽난로 안에서는 장작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아, 일어나셨군요.”

깊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로키는 눈을 비벼서 잠을 쫓은 후 창문 밑에 있는 테이블 쪽을 쳐다보았다. 남자 한 명이 테이블 위에 옷가지를 쌓아 올리고 있었다. 남자는 키가 컸고 어두운 피부에 떡 벌어진 어깨를 하고 있었다. 위대한 지도자가 지닐 법한 자신감을 가지고 움직이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에시르족 들에 대한 자신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로키는 적어도 이 남자에게는 매력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했다.

“당신은 누구지? 왜 내가 자는 동안 내 방에 몰래 들어온 거지?”

로키는 팔다리에 얽혀 있는 망토를 풀어낸 후, 몸 주위로 망토를 조금 더 얌전하게 감쌌다.

“왕자님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남자가 몸을 돌려 로키 쪽을 바라보았다. 로키를 향한 그의 두 눈은 오딘슨의 그것보다 더 이상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허여멀건하기는 했으나, 눈 전체가 흰색을 띠고 있었고 구름에 둘러싸인 것처럼 뿌옇게 보였다.

“저는 헤임달입니다. 토르 왕자님의 신하이죠. 새 옷가지들을 전해 드리려 왔습니다.”

“당신 맹인이로군.” 

로키가 불쑥 말했다.

헤임달이 머리를 꾸벅 숙였다. 입가 한 구석이 살짝 꿈틀거렸다.

“왕실의 반려께서는 관찰력이 매우 좋으시군요.”

헤임달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쪽으로 오셔서 오늘 입으실 옷을 직접 고르도록 하시지요. 조만간 새 옷을 재단해드릴 터이지만, 지금은 여기 있는 것 정도로도 괜찮으실 겁니다.”

헤임달이 자신 옆 테이블 위에 차곡차곡 포개져 있는 옷가지들을 두드려 보였다.

로키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천천히 그 쪽으로 다가갔다. 로키가 검은 가죽 튜닉과 바지를 고르는 동안, 헤임달은 벽난로 쪽으로 가 잿더미를 쑤시고 있었다. 로키는 혼자서 옷을 입었다. 왕자의 신하도 딱히 도움을 제안하지 않았고, 로키 또한 한시 빨리 이 결혼 복장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헤임달이 방을 이리저리 가로질러 다니는 동안, 로키는 그를 계속 빤히 쳐다보고 싶은 충동과 맞서 싸웠다. 자신이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 쪽이 모른다고 할지라도, 무례한 행동이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결국 로키의 호기심이 그를 압도해버리고 말았다.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나?”

로키가 물었다. 지금까지 로키는 자신과 같이 천성적인 약점을 지니고 세상에 태어난 사람을 많이 만나 볼 기회가 없었다.

“아닙니다.”

헤임달이 토르의 망토를 개키며 대답했다.

“유감스럽게도 최근에 있었던 사건이지요.”

“아.”

로키는 자신의 목소리에 드러난 실망감을 차마 감추지 못했다. 그러고는 그 목소리가 얼마나 끔찍하게 들렸을지를 알아채고, 얼른 말을 더했다.

“사과하네. 나는 몰랐….

“모르시는 게 당연하리라 생각합니다.”

헤임달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텅 빈 자신의 두 눈을 손짓해 보였다.

“왕자님께 여쭈어 보시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실 겁니다.”

“왜 당신이 직접 이야기해 주지 않고?”

로키는 새 바지 안으로 다리를 집어 넣은 후 골반 아래쪽까지 끌어 당겼다.

“나라면 내 조그만 체구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뒤에서 이야기하게 놓아 두는 대신, 내 입으로 직접 말해 주었을 거거든.”

“좋습니다.”

헤임달이 창문 쪽으로 가더니 커튼을 젖혀 아침 햇살이 들어오게 했다.

“수 세월 전, 저는 아홉 왕국의 모든 구석구석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저는 국왕 폐하의 오른팔이었고, 폐하의 모든 영토를 지켜보도록 신임을 받았지요. 하지만 어느 날 저는 왕의 금궤에서 도둑질을 했다는 혐의를 샀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여신께서 그에 대한 처벌로 제 시야 모두를 앗아 가도록 명령을 내리셨지요.”

그의 입술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저는 무고했지만요.”

로키가 숨을 삼켰다.

“그런 수난이 있은 후에, 오딘슨이 당신을 자기 하인 노릇을 하게 만들어 놓은 것인가?”

로키가 진저리 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나 다름 없군. 너무도 끔찍해.”

“잘못 이해하셨군요.”

헤임달이 대답했다.

“헬라 님께서 제 시야를 박탈한 후, 저는 제 평생의 고향인 아스가르드로부터 추방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토르 왕자님께서 저를 이 곳에 머무르게 해 달라고 올파더에게 간청하셨지요. 그래서 결국 제가 토르 왕자님 곁에서 왕자님을 섬기는 것으로 제 처분이 결정되었습니다.”

헤임달의 눈이 로키를 향했다. 그 시선이 로키를 관통해 들어오는듯 해, 로키는 몸을 떨었다.

“시기가 워낙 절망적인 때인지라, 왕자님께서는 모을 수 있는 모든 동맹을 필요로 하시는 상태입니다.”

로키는 한참 동안 생각하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신의 충성심은 존경할 만 하네만, 내 생각에 아주 잘못된 믿음인 것만 같군. 오딘슨은 야만인이야. 야수나 다름없지. 내가 당신 입장이었다면 난 추방되는 쪽을 선택했을 거야.”

“그러셨을까요?”

헤임달이 침대 쪽으로 다가가더니 손으로 구겨진 이부자리 위를 쓸었다. 헤임달의 눈썹이 의아하다는 듯 휘어졌다. 로키는 뺨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왕자님께서 어젯밤 왕자비께 손을 대지 않으셨지요.”

그가 말했다.

“왕자님을 야수라고 한다면, 꽤나 잘 길들여진 야수인 것 같군요.”

“그 자가 당신에게도 자기 계획을 알려주었나 보군. 자신의 속임수도.”

로키는 튜닉의 옷깃을 가다듬으며 성난 소리로 말했다. 튜닉의 높은 목깃이 목에 달린 황금 고리는 감추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로키는 앞에 놓여 있는 실내화에 발을 집어 넣었다. 기다란 부츠 안에 발목 고리를 쑤셔 넣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왕자님께서는 저와 모든 비밀을 공유하시지요.”

헤임달이 모호하게 대답했다.

“토르 왕자님께서 겉으로는 조금 거칠어 보이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장담 드리지요. 저는 왕자님을 어린 시절부터 봐 왔습니다. 왕자님은 내면으로는 온화하시고…

로키가 콧방귀를 뀌자 헤임달이 얼굴을 찌푸렸다.

“…정이 많으시고…”

로키는 이번에는 웃음을 풋 터뜨렸다.

“…용감하신 분이시지요.”

“이제 알겠군.”

로키가 웃으며 말했다.

“오래 전부터 오딘슨이 성 안에서 짧은 바지를 입고 걸음마를 하는 모습을 봐 왔다는 거지. 당연히 그 자가 상스럽다거나 잔인한 사람이라 생각하지는 못 했겠지! 처음 시작부터 당신을 속여 온 것이니.”

“제가 속았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머지않아 왕세자께서도 제 말에 동의하실 날이 올 겁니다.”

헤임달이 대답했다.

“그럴 것 같지는 않은걸.”

로키가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새로 차려 입은 가죽 조끼가 로키의 움직임에 따라 끽끽대는 소리를 냈다.

헤임달이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 검은색 옷을 고르셨나 보군요. 왕세자님의 기분에 맞추신 것이라 생각해도 될까요?”

헤임달은 로키가 대답을 쏟아낼 시간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옷을 다 입으셨으면 이만 나가 보도록 하지요. 방을 청소하는 시종들이 피가 묻은 시트를 발견하도록 해 주어야 할 테니까요.”

이번에는 헤임달의 눈썹이 즐거움을 담아 위로 치켜 올라갔다.

두 사람은 함께 방을 떠났다. 헤임달은 성의 복도를 따라 로키를 인도했고, 갈림길에 맞닥뜨릴 때마다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로키는 맹인의 움직임을 신중하게 쳐다보았다. 헤임달이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디디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어떻게 지팡이나 길잡이 마법의 도움 하나 없이 길을 찾을 수 있는 거지?”

로키가 마침내 물었다.

헤임달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저는 제 평생을 이 복도들을 걸으며 살아 왔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이 성은 잘 알고 있지요. 이 곳에서 길을 찾기 위해 두 눈을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헤임달이 대답했다.

가신들이 입는 느슨한 의복을 걸친 아스가르드인 몇 명이 앞쪽의 복도 모퉁이에서 걸어 나왔다. 로키의 모습을 본 그들의 쾌활한 목소리가 속삭임이 되어 낮아졌다. 그 자들을 지나칠 때 헤임달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지만,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로키에게만 향해 있었다. 그 시선에는 노골적인 호기심과 더불어 적잖은 두려움도 담겨 있었다. 로키는 그 가신들 쪽을 향해 무례한 손짓을 해 줄까 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그러기 전에 그 사람들은 둘의 옆을 지나쳐 사라져 버렸다.

“앞으로도 늘 내 모습에 저런 반응이 튀어 나올까?”

로키가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왕세자님. 빤히 바라보는 시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저도 잘 압니다.”

헤임달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요툰인을 한 번도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이 혼인이 왕세자님을 심각한 해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유감스럽게도 이 곳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요. 적어도 당분간은 말입니다.”

로키가 혀를 찼다.

“이런 어설픈 소극을 정말 혼인이라 불러도 될까? 글쎄, 아스가르드에서는 그럴지는 몰라도—”

헤임달이 그의 팔을 붙잡더니 그를 복도 쪽으로 이끌었다. 헤임달이 소리를 죽여 입을 열었다.

“저희 둘만 있을 때 다시 한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 말고는 아무도 왕세자님과 토르 왕자님 사이에 주선된 일의 진상을 알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자리에서는 말을 조심하시는 편이 나으실 겁니다. 물론 기분이 언짢으실 테지요. 이런 상황에서 왕세자님께서 기뻐하길 바라시는 분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왕자님의 친우분들께도, 왕자님께서 어제 왕세자님을 가지지 않으셨다는 점을 알리시면 안 됩니다. 이 거짓 이야기가 목적에 부합하도록 해야 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로키가 대답했다. 생각에 잠긴 로키의 두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 이 거짓 촌극은, 진실과 공상 사이의 기묘한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 틀림 없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성 안 복도를 빠져 나와 모래가 덮인 성 안뜰에 도착했다. 오딘슨과 몇 명의 동행이 칼과 창을 가지고 대련을 펼치고 있었다.

“왕자님께서는 틀림없이 왕세자님께 대련장에서의 자기 기술을 선보이고 싶어 하실 겁니다. 좋은 시간 보내시지요.”

헤임달이 그렇게 말하더니, 숨겨진 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로키는 헤임달의 이름을 외쳐 부를 뻔 했다. 이 새로운 지뢰밭에 혼자 남겨질 준비는 아직 안 되었던 것이다.

“왕자 저하.”

수염을 기르고 유연한 몸을 지닌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새 왕실의 반려께서 마침내 침대 밖으로 나온 것 같습니다만.”

오딘슨이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돌렸다. 로키의 뺨이 달아올랐다.

“내가 어젯밤 왕세자를 오랫동안 못 자게 만들었거든.”

오딘슨이 말했다. 그가 친우들을 향해 외설적으로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나무 걸이에 칼을 꽂아 놓고 로키 쪽으로 다가왔다. 오딘슨은 허리 위로는 옷을 하나도 걸치고 있지 않았고, 몸은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로키는 코를 찔러오는 땀냄새에 얼굴을 찌푸렸다. 오딘슨이 번드르르한 손으로 로키의 손을 붙잡더니 손등 위에 묘하게 정숙한 입맞춤을 해 보였다.

“헤임달이 새 옷을 가져다 주었나 보군. 새 옷은 어때?”

오딘슨이 물었다.

“나쁘지 않아.”

로키가 재빨리 손을 빼 내며 대답했다. 로키의 시선이 안뜰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향했다. 그들 모두 숨김없는 흥미를 담아 로키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수염을 기른 남자 옆에는 체구가 작은 궁수 한 명이 있었고, 단단한 몸을 지닌 여자 한 명, 그리고 뚱뚱한 남자 한 명이 있었다.

“내 친우 전사들을 소개해 주도록 하지.”

토르가 이렇게 말하고는 각각 이름을 불러가며 그 자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들은 모두 예의 바르게 로키를 향해 고개를 꾸벅해 보였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경계의 표정이 띄워져 있었다.

“왕실의 반려께서 대련을 보고 싶어 하실지도 모르겠군.” 

레이디 시프라는 여자가 말했다.

“괜찮은 생각인걸.”

펜드랄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무기 걸이에서 양날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왕자 저하. 내가 도전해 보도록 하지. 이 서리 거인은 한 번도 제대로 된 칼싸움을 목격한 적이 없을 거야. 아니면 다른 교양 있는 싸움 기술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 기술을 선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사람은 나지.”

로키는 그 수염 덥수룩한 건달을 매섭게 노려 보았다.

“너 같은 사람에게는 ’서리 거인’이 아니라 ‘왕세자’라는 칭호로 불리는 것이 마땅할 것 같군. 그리고 나는 싸움 기술에는 아주 익숙해. 네가 교양 있다고 칭하는 기술은 물론이고, 그것보다 더 우월한 요툰의 기술에도 말이지.”

펜드랄이 잠시간 충격을 받은 듯 조용해지더니, 다음 순간 몸을 구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토르를 제외한 다른 아스가르드인들도 거기에 합류했다. 토르는 그 멍청이 무리들을 향해 고개를 흔들어 보이더니, 로키에게 언짢은 시선을 던져 보였다.

“미안하군, 왕자 저하.”

시프가 웃음 사이로 말을 내뱉었다.

“이 조그만 거인이 자기 기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니…상식 이상의 일이로군. 우스운 것은 어쩔 수가 없구만.”

오딘슨이 불편하게 몸을 뒤척이며 입을 열었다.

“요툰의 싸움 기술에도 뛰어난 점이 많을 거라 생각해. 우리가 관심만 있다면 배울 점도 있을 수도 있고.”

있을 수도 있어? 로키의 피가 끓어 올랐다. 로키는 입매를 단호하게 굳힌 채 네 명의 전사들 쪽으로 돌아섰다.

“손수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나와 대련을 해 보는 건 어떤가?”

“당신과요?”

궁수 호건이 로키를 별 감흥 없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오딘슨 쪽으로 옮겨갔다. 그 모습에 로키는 더더욱 격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야만인을 무슨 내 대변인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건가?

“그래.”

로키가 되풀이해 말하며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내 대련 상대를 스스로 선택한다는 조건 하에서 말이지.”

“아하, 저것 봐. 이 요툰인은 레이디 시프를 고를 속셈이야. 쉬운 상대라고 생각하고 말이지.”

볼스타그라는 이름의 뚱뚱한 사내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마 엄청나게 실망할 걸!”

시프가 그 자의 팔을 주먹으로 치는 바람에 볼스타그가 몸을 움찔했다.

“왕세자.”

토르가 로키의 팔꿈치를 붙잡더니 그의 몸을 옆으로 돌려 조용히 일렀다.

“체면을 지키기 위해 그런 무리한 도전을 할 필요는 없어. 아스가르드 식의 전투에서 패배하는 것에는 그 어떠한 명예도 따르지 않으니 말이야.”

“나는 패배할 생각 없어.”

로키가 위협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도 아니고, 앞으로도 절대.”

로키는 토르의 어깨 너머로 목을 길게 빼고 볼스타그의 거대한 몸을 가리켰고, 크게 소리쳐 불렀다.

“거기. 저 자와 싸우도록 하지.”

그 말에 전사들이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로키의 팔을 잡은 토르의 손아귀가 더 세게 죄어 왔다.

“로…왕세자.”

오딘슨이 로키의 노려보는 시선 앞으로 다시 몸을 들이밀며 말했다.

“진지하게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볼스타그는 당신 몸집의 두 배라고. 전장에서 사람도 많이 죽여 본 친구야. 허락할 수 없어.”

“아, 허락하실 수가 없으시다고.”

로키가 내뱉었다.

“토르!”

볼스타그가 무기고에서 커다란 도끼를 집어 들며 외쳐 불렀다.

“네 조그만 잠자리 상대랑 싸우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토르가 몸을 돌리며 입을 열려 했지만, 로키는 토르의 팔에 날카로운 손톱을 박아 넣으며 그의 말을 막았다.

“날 대신해서 대답할 생각 하지 마.”

로키가 사납게 속삭였다.

“나 스스로도 잘 말할 수 있으니까.”

오딘슨이 한참 동안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팔꿈치를 놓아 주었다.

“그렇게 하던가.”

오딘슨이 말했다.

“하지만 볼스타그가 당신 두 팔을 모두 부러뜨려 놓는다고 해도, 내가 경고하지 않았다는 소리는 하지 마.”

로키는 오딘슨을 밀치고 지나가 대련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련장에는 이미 그 덩치 커다란 전사가 어깨에 도끼를 짊어진 채 서 있었다.

“나는 이미 무기를 골랐어, 요툰인.”

볼스타그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무기는 무엇으로 고를 거지?”

“아무 것도. 널 항복 시키기 위해 무기 따위는 필요 없어.” 로키가 대답했다.

대련장 바깥에 선 채 부릅뜬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머지 세 명의 전사로부터, 믿을 수가 없다는 킥킥대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토르가 언짢은 얼굴을 한 채 그들 옆에 합류했다. 토르는 무기 걸이에 걸쳐져 있던 튜닉을 집어 들어 머리 위로 뒤집어 써, 땀이 흘러내리는 가슴을 덮었다.

“왕자 저하, 저 작은 거인이 자칫하면 짜부라질지도 몰라.”

펜드랄이 말했다.

그 말을 분명히 알아 들은 로키가, 자신의 대련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응답했다.

“내가 승리한다는 데 은화 열 개를 걸도록 하지.”

“당신에겐 은화 열 개가 없잖아!” 

토르가 소리쳤다.

“내 남편의 은화 열 개.” 

로키가 이렇게 정정했다.

“그 내기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시프가 대답했다. 호건과 펜드랄 역시 왕자의 불만스러운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각자 내기를 걸었다.

“수다는 그쯤 하지.”

볼스타그가 도끼를 들어 올렸다.

“싸워 보자고!”

볼스타그가 로키에게로 달려 들었다. 경기장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그의 거대한 몸에 엄청난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 모여 있는 자들 중 누구도, 로키가 자신의 삶 평생을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큰 적수를 상대로 대련을 해 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로키는 상대의 커다란 몸집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는 기술을 잘 터득한 바 있었다. 오히려 로키에게는 자신과 키나 무게가 비슷한 상대와 싸우는 것이 더 생소할 것이다. 그렇지만 볼스타그는 로키의 목적에는 딱 알맞은 체구였다. 로키는 사슴처럼 민첩하게 볼스타그의 몸을 슬쩍 피해 지나친 후, 그 자의 오금 쪽으로 자비 없는 발길질을 내질렀다. 볼스타그가 고함을 내지르며 꺾인 무릎으로 바닥에 넘어졌다. 볼스타그가 거칠게 도끼를 휘둘렀다. 로키는 날카로운 도끼날을 몇 센티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아슬아슬하게 피했고, 균형을 잃지 않은 채 급소를 중심으로 손날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콩팥, 배, 목울대. 마지막으로 로키는 볼스타그의 머리에 대고 자신의 머리를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찧었다.

그 거구가 고통으로 숨을 쌕쌕댔다. 볼스타그가 땅 위에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도끼 또한 바닥으로 떨어졌다. 로키는 볼스타그의 몸 위쪽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관중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그 은화를 받도록 하지.”

로키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볼스타그가 흙 위에서 신음을 내뱉는 동안, 돈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요툰인이 얼마나 치사한 수법을 사용하는지에 대한 속삭임 또한 오갔다. 나머지 전사들은 토르를 남겨놓고 대련장으로 들어가 볼스타그가 절뚝거리며 걸어 나오는 것을 도와 주었다. 로키는 내기에서 딴 돈을 세며 그 모든 것을 무시했다.

좋아. 이 정도면 성에서 도망칠 때 이 황금 고리들을 부숴 달라고 대장장이에게 쳐 줄 돈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내게도 미리 알려 주지 그랬어.” 

토르가 말했다.

“놀라움을 망쳐 놓을 수는 없지.”

로키가 그를 냉담하게 쳐다보았다.

“네 지금 표정을 네게도 보여 주고 싶군. 교양 없는 요툰의 전투 기술에서 배울 점을 찾는 게 즐겁지 않았어?”

“네가 다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결코 즐겁지 않았거든.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당신이 내 책임 하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나 말고는 그 누구도 널 지켜줄 사람이 없다고, 왕세자.”

“내 스스로 내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방금 충분히 증명해 보인 것 같은데.”

로키는 은화를 주머니에 집어 넣은 후, 끙 소리를 내며 떨어져 있는 도끼를 집어 들어 무기 걸이에 다시 걸어 놓았다.

토르가 로키의 팔을 붙잡더니 억지로 끌어당겨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게 했다.

“볼스타그와 다른 전사들이 내 친구라는 점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걸. 그렇지 않았으면 오늘 여기서 있었던 일은 눈깜짝할 새 내 누이의 귀 안으로 들어가 버렸을 거야.”

토르가 그의 팔을 거칠게 흔들었다.

“당신은 내 아이를 배고 있어야 한다고. 기억해? 적어도 그게 우리의 바람이지. 내가 당신을 전투장에서 대련을 하게 만들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헬라가 뭐라고 하겠어? 우리 거짓말, 그리고 내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 거야. 내 누이가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행사하려 들 때, 당신은 안 건드리고 멀쩡하게 놓아 둘 거라 생각해?”

로키는 바보가 아니었다. 로키도 자신이 포로로 잡힌 순간부터는 칼날 위에서 춤을 추어야 하는 위치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우월함을 뽐내고 싶은 하찮은 충동으로 대련장으로 걸어 들어간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인정하기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로키도 토르의 말이 맞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심해서 행동해야만 했다. 쥐처럼 고요하고, 안개처럼 은밀해야만 했다.

“알았어.”

로키가 팔을 떨쳐내며 말했다.

“현란한 전투를 선보이는 건 오늘로 끝내고, 포로로 잡혀와 신방에 든 얌전한 반려 역할을 다해 주도록 하지. 물론 날 쳐다보는 눈이 있을 때에만.”

“고맙군.”

토르가 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투정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밑에 놓여 있는 자갈을 걷어 찼다.

“날씨가 좋은걸.”

토르가 난데없이 불쑥 이렇게 말했다.

“함께 정원 산책이라도 하는게 어때?”

“산책이라고?”

로키가 픽 코웃음을 쳤다.

“내가 지금 당장은 얌전하게 굴기로 약속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네 꼴보기 싫은 면전에 대고 필요 이상으로 자리를 지키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노력을 다해 봐야 하지 않겠어?”

토르가 차분히 대답했다.

“사람들 앞에서 부부로서의 모습을 보여야지. 널 하루 종일 방 안에서만 뒹굴도록 놓아 두면, 성 사람들이 내가 왜 왕실의 반려를 더 과시하고 다니지 않는지 궁금해 할 거야. 의심을 사게 되겠지.”

고집스럽게 턱을 앞으로 내민 채, 로키는 잠깐 생각을 했다. 자신의 빈 사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기도 했고, 정원을 보고 싶기도 했다. 대문의 위치나 건물의 허점 등, 도망갈 만한 길을 눈여겨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야만인은 자신 나름의 이유를 들었고, 나름대로의 정치적 술책을 품고 있었다. 로키 또한 자신 나름대로 게임판 위에서 장기말을 움직일 것이다. 바라건대, 자유를 향한 전개라면 좋을 것이다.

“알았어. 어디 날 마음껏 과시해 봐.”

로키가 조롱하듯 머리를 흔들며 느릿느릿 대답했다.

토르가 팔을 내밀었다. 로키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그 팔을 잠시동안 응시했다가, 최대한 접촉을 적게 유지하려 노력하며 팔을 붙잡았다. 토르의 우윳빛 피부는 여전히 뜨거웠고 땀으로 끈적끈적했다. 조그만 살갗의 접촉만으로도 넌더리나는 전율이 몸을 타고 내려오는 것 같았다.

“먼저 목욕이라도 하지 그랬어.”

대련장을 빠져 나가며 로키가 말했다.

“목욕이라는 게 아스가르드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만 일어나는 행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주기적으로 목욕을 잘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지.”

토르가 약간 분개한 듯한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성의 아랫층에 있는 욕실들은 이 나라에 있는 것 중 최고야. 천연 온천지에서 물을 받아 와, 일 년 내내 물이 따스하지. 함께 목욕을 하러 가자고 초대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이 거절하리란 생각이 드는군. 공용 욕실이거든.”

토르의 눈썹이 도전하듯 치켜 올라갔다.

“궁금한 걸. 당신은 남성용 욕실을 선택하려나, 아니면 여성용 욕실?”

로키가 경멸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고맙지만, 둘 다 사양하도록 하지. 더러움을 함께 나누는 욕조에 들어가 앉아있어야 한다니, 끔찍하기 짝이 없는 소리로군.”

“요툰 욕실은 훨씬 더 우월한가 보지?”

토르가 말벌처럼 날카롭게 찔러 왔다.

“물론이고 말고. 고향의 내 사저에는 내 개인 욕실이 있어.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고, 훨씬 더 위생적이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있었다는 거겠지.”

토르가 무자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개인 욕실이 있었다고 하는 쪽이 맞겠지. 한 때 네 고향이었던 곳에.”

로키의 얼굴에서 조소가 사라졌다. 이 야수의 잔혹함은 가장 불편한 순간에 두각을 드러내고는 했다. 요툰헤임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겨울의 가장 추운 날 밤에는, 지나간 봄날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 물론 이 더러운 오딘슨은 그런 지혜의 말은 싸그리 무시한 채, 기회가 닿는 모든 상황에서 칼을 비틀어 찌르려 할 것이다.

저 자에게 네 눈물을 보이지 마. 로키는 시선을 돌리며 스스로에게 일렀다.

“그런 말을 하려던 건….

토르가 입을 열었다. 분노가 다시 안으로 사라져 들어가는 듯 했다.

“난 당신이 여기서 최대한 편하게 지내게 만들어 주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매 순간마다 당신이 내 궁전을 얼마나 끔찍하다고 생각하는지, 내 존재를 얼마나 끔찍하다고 생각하는지 상기시켜 줄 필요 없어. 이미 당신의 그런 의견은 잘 알고 있으니까.”

“네 말이 다 맞아.” 

로키가 중얼거렸다. 

“날 가둔 사람을 비난하다니, 나도 참 멍청하기는.”

토르가 혀를 쯧쯧 찼다.

“당신도 정말 구제불능이로군.”

토르가 한숨을 내쉬며 로키를 아치 길 사이로 인도해 들어갔다.

“다 왔어. 내 정원에 대해 비난할 말이 있거든, 지금 여기서 다 털어놔 봐.”

로키는 밝은 햇빛에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 보았다. 잎 무성한 나무와 꽃이 맺힌 관목나무가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석조가 깔린 오솔길을 따라 양 옆으로 색의 향연이 넘쳐 흘렀다. 활짝 핀 꽃 사이사이로 나비들이 솜사탕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날아 다녔다. 널찍한 뜰에는 새 지저귐이 온통 울려 퍼졌다. 다른 사람들 몇 명도 고운 의복을 차려 입은 채 정원 안을 산책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원의 배치가 꽤나 영리하게 되어 있었는지라 다른 이들의 모습은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언뜻언뜻 보일 뿐이었다. 덕분에 방해 받지 않는 평화로운 느낌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노로 끓어오르고 있는 로키마저도, 이 정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부정할 수 없었다.

“나쁘지는 않군.”

로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토르가 끙 하는 소리를 내더니 로키를 산책로 쪽으로 이끌고 갔다. 둘은 침묵 속에서 걸음을 옮겼다. 푸른 색의 커다란 덤불나무들 옆으로 따라 난 구불구불한 길 쪽으로 접어들자, 색색깔의 무늬로 배치된 온갖 종류의 화려한 융단 같은 꽃밭이 나타났다. 로키는 그 낯선 식물들을 경탄 어린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요툰헤임에는 이렇게 화초가 풍부하게 자라지 않았다. 호기심이 근질근질 마음을 갉아 오기 시작했지만, 로키는 자신의 원치 않는 동행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저 야만인이 식물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기대도 없었다.

“아름답지 않아?”

로키가 조그만 은색 종 같이 생긴 꽃다발을 넋 놓고 감상하는 동안, 토르가 중얼거렸다.

“내가 이 풍경을 감상하는 동안 내 목덜미에다 대고 숨을 내뿜어 대는 멍청이만 없었더라도,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졌을 텐데.”

로키가 대답했다.

오딘슨의 콧구멍이 분노로 벌렁거렸다.

“이것 좀 봐….

하지만 토르의 항변은 헤임달이 등 뒤로 손을 감싸 쥔 채 과일 나무 뒤에서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중간에서 끊기고 말았다.

“왕자님, 그리고 왕자비시여.”

헤임달이 그들 각각에게 작게 고개를 꾸벅하며 말했다.

“오늘 하루를 잘 즐기고 계신지요?”

“아니.”

“딱히.”

토르와 로키가 동시에 이렇게 말했다.

헤임달의 입에 떠올라 있는 조그만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헤임달이 손을 뻗어 로키의 팔을 붙잡더니 토르의 팔에서 빼 내었다. 그러고는 그는 로키를 반대쪽 방향으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그것 유감이로군요. 저기 앞쪽에 있는 화단의 중앙에 자라는 나무에는 관심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만. 보이시나요? 아스가르드에서 살아 숨쉬는 것 중 가장 오래된 생명이지요. 한 번 구경하러 가 보시지요. 저는 잠시 왕자님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신을 잠시 물리치려는 헤임달의 시도를 알아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로키는 순순히 따랐다. 어차피 오딘슨의 곁에서 시간을 덜 보낼수록 좋았다. 로키는 그 울퉁불퉁하게 비틀린 나무 쪽으로 다가가, 그저 일말의 흥미만을 띤 채 나무를 살폈다. 황동색을 띤 이파리 하나를 손가락 사이에서 문질러 본 로키는, 이파리에서 따뜻한 감촉이 느껴지는 것을 깨닫고 살짝 놀랐다. 어깨 너머로 뒤돌아 보자, 헤임달과 토르가 뭔가 깊이 대화에 빠져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둘 다 로키에게는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슬쩍 빠져나가 탈출 경로를 찾아 보는 데 이것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겠는가?

로키는 우뚝 치솟은 소나무 그늘에 가려진 거품 이는 샘물에 눈이 이끌린 척을 하며, 다른 쪽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헤임달과 오딘슨의 모습이 화초에 가려질 때까지 로키는 계속 걸어갔다. 안뜰로부터 빠져 나갈 길을 찾아 보려고 시도했지만, 어느 쪽으로 가든 빙빙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 같았다. 정원은 미로 같았고, 이 곳의 구조에 익숙지 않은 로키로서는 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은 커녕, 아까 보았던 나무 쪽으로 돌아가는 길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로키는 자신이 헤임달과 토르가 있는 곳과 평행으로 마주한 오솔길에 도달해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두 사람과 로키 사이를 갈라 놓은 두꺼운 생울타리 사이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두 사람의 대화는 속삭임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로키는 그 말들을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도 노력했네, 헤임달.”

오딘슨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망이 없어. 그는 날 증오한다고.”

로키의 두 귀가 쫑긋 섰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왜?

“증오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 분께서 지금까지 감내해야 했던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직 하루도 안 지나지 않았습니까.”

헤임달이 말했다.

“왕자님, 제발 인내심을 가지십시오.”

“매 시간 시간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다가오는데, 어떻게 인내심을 가질 수가 있겠나?”

토르가 끙 소리를 냈다. 로키에게는 그의 모습이 가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키는 그 야만인이 커다란 손을 허공에다 대고 쳐 대는 모습을 눈 앞에서 그릴 수 있었다.

“고슴도치만큼이나 다루기 까다로운 사람이야. 절대 잘 풀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귀를 기울여 듣는 로키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저게 대체 무슨 뜻일까?

“그렇지요. 지금 상태로서는 절대 잘 안 풀리겠지요.”

헤임달의 목소리는 근엄하면서도 따스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그것과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더 부드러워지셔야 합니다, 토르 왕자님. 왕세자께서 미끼를 던진다고 해서 그걸 덥석 물지 마십시오. 무슨 대가가 따르든 간에, 친절함을 지니고 대해 주시지요. 제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왕자님의 그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자네가 내 자신보다 내게 더 큰 신뢰를 가지고 있는 것 같군.”

토르가 말했다.

“제 충성심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이, 오늘로 왕자님이 두 번째로군요.”

헤임달이 대답했다.

“이제 왕세자님을 모시러 가시지요. 왕세자께서는 아직 이그드라실을 보고 계신가요?”

토르의 놀란 고함소리가 들려와 로키는 울타리 뒤에서 얼어 붙었다.

“왕세자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군. 얼른, 찾는 걸 도와 주도록 하게.”

“네, 그러고 말고요. 맹인에게 그런 일을 맡기시다니.”

헤임달이 무미건조한 농담을 던졌다.

토르가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하는지 들을 수 있기 전 로키는 그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을 엿듣고 있다가 붙잡히면 안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로키는 오솔길을 따라 조용히 발끝으로 걸어가 정원 안 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왜 오딘슨이 자신의 기분을 돌려 놓으려 저렇게 노력하는 걸까? 로키는 의아함을 느꼈다. 지금 이렇게나 무력한 상태에서 자신이 제공해 줄 수 있는 도움이 뭐가 있다고?

“왕세자!”

토르의 목소리가 울타리 너머로 울려 퍼졌다.

“길을 잃었는가?”

아직 충분히 길을 잃지 않았지. 로키는 돌길을 따라 더 깊숙이 내려가며 생각했다. 이리저리 구부러진 길을 로키는 한참 동안 따라갔고, 오딘슨에게서 완전히 몸을 숨길 수 있을 때까지 걸음을 옮겼다. 로키는 어깨 너머를 살피며 오딘슨이 자기 뒤에 따라붙지 않았는지 확인하다가, 조그만 공터에 서 있는 대리석 조각상에 정면으로 부딪힐 뻔 했다. 마지막 순간에 겨우 멈춰선 채, 로키는 조각상을 올려다 보았다.

조각상은 아스가르드 예복을 걸친 여인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여인은 키가 컸고 다부진 몸을 지니고 있었으며, 근육이 단단히 붙은 팔은 손짓하듯 앞으로 내밀어져 있었다. 기다란 머리가 갈래갈래 땋인 채 단단한 어깨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로키의 주의를 잡아 끈 것은, 단단한 턱을 지니고 있고 할 말이 가득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로키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전날 밤 꿈에 등장했던, 벼랑 끝에 선 채 로키의 고향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 여인이었다.

“거기 있군!”

오딘슨이 정원의 미로로부터 돌진해 나오며 외쳐 불렀다. 오딘슨의 얼굴은 분노에 차 있었다.

“내가 부르는 소리 못 들었….

갑자기 오딘슨이 얼어 붙었고, 그의 목소리도 목구멍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로키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 보았다. 그 야만인은 동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털이 덥수룩한 그의 얼굴을 진짜 감정이 뒤덮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 감정은 분노가 아닌 다른 것처럼 보였다. 로키가 잘 몰랐더라면, 비통의 감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 여인은 누구지?”

로키가 물었다.

로키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오딘슨의 기묘한 두 눈이 놀라움을 담아 로키 쪽을 향했다. 무겁게 침을 삼키며 토르가 입을 열었다.

“내 어머니셨어.”

로키는 마음 속에 떠오른 질문을 어떻게 던져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어머니셨다고?”

자신의 꿈을 찾은 존재가 유령이었다는 생각을 하자, 살갗이 오싹 곤두서는 것 같았다.

“돌아가셨어. 몇 년 전 일이지.”

토르가 땅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턱이 부딪히며 딱 소리를 냈다..

“미안하군, 왕세자. 정원의 이 쪽 구역으로는 거의 온 적이 없거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도 이미 충분히 힘든데, 어머니의 모습을…어머니를 본뜬 모습을 보는 것은….”

로키 역시 상실감에는 익숙했기에, 마음 속에 조그마한 연민이 도사리기 시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곳으로 가도 돼.”

로키가 제안했다.

토르가 고마움이 담겨 따스해진 푸른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토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잠깐 머물러 있어야겠어. 여기 마지막으로 있어 본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군.”

토르는 몸을 돌려 장식용 나무가 위에 드리워진 조그만 돌 의자 쪽으로 가더니, 거기 자리를 잡았다. 토르는 무릎 사이에 손을 넣어 감싸 쥔 후 조각상을 응시했다.

로키는 토르와 울타리 사이로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 사이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떠나는 것이 예의일 것이라고, 로키는 생각했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이 새로운 세계에서 예의라는 것은 정말로 까다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토르가 로키 대신 결정을 내려 주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그 생각은 한참 동안 더 로키의 마음을 괴롭혔을 것이다.

“옆에…함께 앉아 있어 주겠어?”

토르가 자신의 옆쪽의 빈 공간을 손으로 두드려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

로키는 이렇게 대답하고 조심스럽게 차가운 돌의자 위에 걸터앉았다. 로키는 오딘슨과 함께 한참 동안 침묵 속에서 여인의 동상을 바라보며, 눈으로 그녀의 얼굴 모양을 훑어 내렸다.

“어머니와 많이 닮았는걸.”

로키가 자기도 모르게 불쑥 말했다.

“그래.”

토르가 손을 맞대어 비비며 대답했다.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어. 어머니의 머리카락과, 두 눈, 그리고 어머니의 몸의 강인함을 물려 받았지.”

토르에게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머니의 의지력 또한 물려 받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군.”

로키가 흥미를 느끼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내 어머니, 프리가는….”

토르가 어머니의 동상 쪽으로 고갯짓을 해 보였다.

“내가 안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었지. 어머니는 아버지와 혼인하기 전 바나헤임의 공주였어. 자신의 삶 평생동안 마법 기술을 공부하셨지. 매우 영민하셨고, 많은 방면으로 재주가 넘치시는 분이셨어. 당신도 어머니를 좋아했을 거야.”

로키의 머리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여인이 마법 능력을 지녔다면, 로키가 본 것이 정말로 그녀의 유령일 수도 있다. 마법사들이 주문을 이용해 장막 뒤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이 프리가라는 여인도 그런 일을 했을 수도 있다.

“어머니께 무슨 일이 있었지?”

로키가 물었다.

“좋은 질문이로군.”

토르가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 정확히 모르겠어. 어머니께서 하루는 미드가르드의 땅으로 사냥을 하러 가셨지. 어머니는 사냥하는 것도, 미드가르드도 좋아하셨거든. 그런데 해가 저물고 난 후에, 어머니의 시종들과 하녀들이 두려움의 비명을 지르며 성으로 돌아왔어. 어머니가 늪에 빠져 잠겨 버렸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 날 밤, 나는 술에 취해 있는 상태였지.”

오딘슨이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는, 입을 가린 손바닥 뒤에서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악몽을 꾸고 있는 줄 알았어. 아침 식사 자리에서만 해도 어머니를 봤거든. 아버지께서는 내 옆에서 여기 이 동상처럼 얼어붙은 채 서 계셨지. 나는 분노에 빠져 들었어. 누이가 날 진정시키려 했지. 미드가르드의 늪지가 있는 장소는 정말로 위험한 곳이고, 분명히 사고였을 것이라고, 절대로 거기 살고 있는 필멸자들이 꾸민 사악한 음모는 아닐 것이라고, 내게 일렀지. 내 찢어진 심장에 누이의 말은 독처럼 와 닿았어.”

오한이 로키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맺어질지 로키는 이미 알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질문을 던졌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멍청한 어린아이처럼 행동했지.”

토르가 대답했다. 그는 손을 떨어뜨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미드가르드로 내려가서, 어머니의 살해범들을 찾아 도시 하나를 무너뜨려 버리고 말았어.”

로키는 그를 빤히 응시했다. 아무리 이 자처럼 강력하다고 해도, 어떻게 아스가르드인 한 명이 도시 하나를 통째로 파괴시킬 수 있다는 거지?

토르가 그의 시선을 마주했고, 숨겨진 질문을 알아들은 듯 했다.

“우리의 혼인 의식 때 아버지가 날 천둥의 신이라고 칭했던 것 기억나? 한 때는 그 이름도 칭호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지. 나는 하늘을 통제하고, 번개를 내 무기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어.”

“지금은 아니고?”

로키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의 모습보다 조금 더 어리고, 훨씬 더 강력한 오딘슨이, 자신의 혼란스러운 감정에 걸맞는 천둥을 불러내 자신의 앞길을 막아 선 모든 이들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지친 고갯짓이 대답을 대신했다.

“아버지께서 비통으로 인한 망연자실 상태에서 깨어나신 후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보셨을 때…내가 우리 가족들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무자비한 파멸의 행위를 가했는지 목격하셨을 때…아버지는 내가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결정하셨지. 나는 저주를 받았고, 천둥의 힘은 내게서 떠나 갔어. 내가 어머니의 의지력을 절반만 닮았었더라도, 그렇게 절망감에 휘둘리는 일도 없었을 테지. 내게 내려진 형벌의 무게를 감내해야 할 일도 없었을 테고.”

그래서 이 야만인도 마법에 손이 묶여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상황이 비슷해 보이기 시작했다. 로키는 그 생각을 떨쳐 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내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거지?”

“당신은 영리한 사람이잖아.”

토르가 대답했다.

“내가 이야기해 주지 않았어도 조만간 진실을 알아 냈겠지. 그리고, 당신이 강제로 결혼하게 된 것이 어떤 사람인지 알 권리도 당신에게 있고.”

토르가 어머니의 동상을 향해 슬프게 웃어 보였다.

“나도 이런 방식이 아니었으면 하고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몰라, 왕세자. 진심이야.”

로키는 오랫동안 그 점을 숙고했다. 비밀 한 가지는 드러났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비밀이 너무도 많았다. 왜 오딘슨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것일까? 그리고 오딘슨이 로키의 우정을 원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조심스럽게 사태를 시험해 보는 것이 올바른 수순일 것이다.

“나는 내 종빈을 모르고 자랐어.”

로키가 대리석으로 된 프리가 쪽으로 고갯짓을 하며 말을 꺼냈다.

이 조그만 정보가 로키가 원하던 효과를 곧바로 가지고 왔다. 로키를 바라보는 토르의 단아한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유감이로군. 몰랐어. 나는 내 이야기만 이렇게 떠들고….

“괜찮아.” 

로키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모르고 자란 사람을 애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딘슨은 뭔가 응답을 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네 종족들은…부모님을 어머니와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지? 내 말이 맞나? 그렇다면 네 종빈이라고 하면….”

“그래. 라우페이가 씨를 제공했고, 나를 낳은 것은 이미르라는 고위 계급의 전사였어. 그리고 내가 태어나자 마자, 모든 이들이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지. 나는 날 때부터 작고 약한 몸으로 태어났거든.”

로키는 머리를 뒤로 젖혀, 하늘 틈새로 특별히 선율이 고운 새가 날아 지나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이미르는 머지 않아 죽었어.”

“출산 중에?” 

토르가 물었다.

“아니.”

로키가 대답했다.

“내가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내 종빈은 자신이 낳은 조그맣고 끔찍한 아기에게 딱 한 번 눈길을 준 후, 황량한 얼음 평지로 죽음을 맞으러 걸어가 버렸다고 하더군. 여전히 탯줄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상태로.”

로키는 허공에다 대고 그 날 눈더미 위에 그려졌을 핏자국의 흔적를 따라 손가락 끝을 그렸다.

토르의 입이 벌어져 열렸다.

“종모는 내 목숨을 살려 주었지. 자신의 용감하고 아름다운 협력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자취를, 차마 파괴할 수 없었거든. 우리 국민들은 아직도 그 일로 종모가 매우 인정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로키의 두 눈이 옆으로 옮겨가 토르의 시선을 마주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그 기묘한 두 눈이 한참 동안 로키를 응시했다. 로키는 침묵한 채 기다렸다.

“당신 종족들의 관습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토르가 마침내 천천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신이 시험대에 올라 있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듯 했다.

“아직 나는 요툰헤임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하지만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달라고 요청한 적도 없고, 당신의 작은 체구를 스스로 어떻게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토르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 죄 없는 아기가 그것 때문에 멸시를 받았다는 사실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군. 훗날 운명의 여신이 내게 축복을 내려 내 자식을 가지게 해 준다면, 나는 그 아이의 크기나 모양이나 힘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내 온 마음으로 사랑해 줄 거야.”

그 아이의 색깔은 어떨까? 로키는 궁금해졌다. 혼인 의식 때 헬라가 내뱉었던 폭언이 기억 속에서 메아리쳤다. 로키는 그 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대답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실망스러운 대답이 돌아올 것이 틀림 없었다. 어쨌나 두 사람의 계획 덕분에 로키가 에시르의 자식을 배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무슨 상관이겠는가?

토르가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토르의 손이 돌의자 위 원래 있던 자리에서 미묘하게 움직여 와, 새끼 손가락으로 로키의 손가락을 살짝 스쳤다. 그 접촉에 로키의 폐 속에서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당신이 당신 종족의 기준으로는 작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내 눈에는 완벽한 크기로 보여.”

토르가 부드럽게 말했다. 로키의 불타오르는 시선이 매섭게 그 쪽을 향했다. 오딘슨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든 로키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토르가 자신의 말실수를 눈치챘는지, 얼른 이렇게 말을 더했다.

“당신의 체구가 내 체구와 잘 맞아떨어져서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 이것이 당신의 온전한 모습이기 때문이라는 뜻이었어. 어떻게 그 모습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어.”

로키는 오딘슨을 응시하며 묵묵히 앉아 있었다. 로키가 평생동안 듣고 싶어 했던 그 말을, 한 번도 로키에게 소리 내어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로키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로키의 마음 일부분은 그 말을 믿고 싶었지만, 다른 조금 더 실용적인 쪽은, 그 말을 불신할 수밖에 없었다. 계략임이 틀림없다. 로키는 생각했다. 저 흉측한 입에서 로키가 듣고 싶어 하던 말이 튀어 나오도록 만드는, 저급한 속임수일 것이다. 그래서 로키는 그저 입을 꾹 닫고 있었다.

토르가 침묵 속에서 한참 동안 그를 쳐다보다가, 마침내 한숨을 내쉬며 손을 다시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미안하군.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내 말은 무시하도록 해. 나는 당신처럼 재치 있는 혀를 지니지 못했는지라, 내가 하려는 말도 가끔 갈피를 못 잡곤 하거든.”

토르가 발을 디디고 일어섰다.

“식사는 했나? 곧 정오 식사가 차려질 거야. 나와 함께 드는 것이 괜찮다면 말이지.”

“배고파 죽을 것 같아.”

로키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오늘 아침 식사는 걸렀고, 전날 밤의 연회 때도 당연히 아무 것도 먹지 않았던 것이다. 머리속이 핑핑 돌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배고픔이 그를 약하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

로키가 일어나는 것을 돕기 위해 토르가 손을 내밀었지만, 로키는 그 손을 쳐 냈다.

“그럴 필요 없어.”

로키는 의자에서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아무도 안 보고 있잖아.”

“일리있는 말이군, 왕세자.”

토르가 조용히 대답했다. 토르는 그를 이끌고 정원을 빠져 나가 성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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