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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로키/번역]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 (3/16)

토르로키 / Thorki

"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왕세자와 야수)"

by triedunture


원문: https://archiveofourown.org/works/15267873


  • 작가님께서 번역은 출처를 포함하여 자유롭게 하라고 명시하셨습니다. (https://i.imgur.com/r6PfDqx.jpg)
  • 에시르 토르x요툰 로키 정략결혼 AU입니다. 구전동화 느낌이 살짝 끼얹어진 작품으로 이야기 중간중간에 화자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 로키를 비롯한 모든 요툰 종족은 인터섹스(자웅동체)라는 설정입니다. 엠프렉 언급이 있습니다.
  • 요툰헤임에는 성별의 구분이 없고 누구나 아이를 밸 수 있기 때문에, 어머니/아버지라는 단어 대신 (주로 동물 번식에서) 누가 씨를 뿌렸고 누가 새끼를 배었는지 칭하는 단어인 dam/sire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 단어들은 원문에서 사용한 의미와 가장 비슷한 단어인 '종빈/종모'로 번역합니다.



*    *    *



3장.


로키는 토르를 따라 대회당으로 향했다. 종종걸음으로 다니는 시종 몇 명을 제외하고는 이제 대회당은 완전히 비워져 있었다. 홀 너머에 있는 조그만 방 안으로 들어가자, 김이 나는 요리 접시와 커다란 와인병이 차려져 있는 기다란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음식의 모습은 반가웠지만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자 로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올파더와 헬라가 각각 테이블 양쪽 끝에 앉아 있다가, 두 사람이 들어오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헬라의 시선은 무표정했지만 왕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다.

“아, 안 그래도 오늘 내 아들이 식사 자리에 나타날지 궁금하고 있었던 터이다.”

오딘이 말했다. 오딘은 접시에 놓인 소스에 빵 한덩이를 흠뻑 젖혀서 입 안에 던져 넣더니, 빈 자리 쪽으로 손짓을 해 보였다.

“아주 잘 왔다. 정력을 잘 유지하고 있어야 할 테니 말이다.”

로키가 이를 가는 소리가 머리뼈 속에서 쨍하게 울려 퍼졌다.

“제 반려에게 정원을 구경시켜 주고 온 참입니다.”

아버지의 말의 외설적인 함의를 모른 체 하며 토르가 대답했다. 토르는 로키를 테이블 중간 쪽으로 데리고 가 의자를 잡아 빼내 주며, 간청하는 듯한 눈빛으로 로키를 바라보았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나가 보지 않으면 아쉬울 것 같더군요.”

토르가 빼 준 의자에 자신이 앉아야 한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로키가, 그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토르는 로키의 왼쪽에 앉은 후 접시에 음식을 수북이 쌓기 시작했다. 로키는 찌푸린 얼굴을 한 채 자신 앞에 놓인 빈 접시를 내려다 보았다가, 고개를 들어 앞에 놓인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 더미를 쳐다보았다. 음식들은 죄다 갈색 아니면 하얀색을 띠고 있었고, 그레이비 소스로 뒤덮여 있었다.

“여기, 내가 놓아 주도록 하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야.”

토르가 이렇게 말하더니, 갈색에다 흰색을 띤 곤죽 덩어리 같은 것과 고기 몇 덩이, 그리고 녹색의 퓌레를 로키의 접시에 떠 주었다.

로키는 그 음식들이 한 데 엉기는 모습을 무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요툰의 식단은 에시르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스가르드인들이 하루 세 번 풍성한 식사를 하는 반면, 요툰인들은 조금씩 자주 먹었다. 체구가 작은 로키는 보통 요툰인들보다도 훨씬 더 적게 먹었다. 로키의 형제들은 하루에 아홉 번이나 열 번 정도 식사를 하기도 했다. 요툰인들의 식사는 간소했다. 설탕을 입힌 과일 한 그릇, 조그만 꿀 케이크 정도가 다였고, 가장 무거운 식사라고 해 봤자 부드럽게 쪄낸 생선 몇 조각에 얼음 와인 한 잔을 곁들인 것 정도였다. 물론, 그런 식사들은 당신이 왕족이라고 가정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아스가르드에서든 요툰헤임에서든, 혹은 우주의 다른 모든 세계가 그렇듯이, 일반 국민들이 먹는 음식은 그렇게 호화스럽거나 풍성하지는 않았다. 잠시 주제에서 벗어난 것 같지만, 중요한 점은 오딘의 테이블에 자리잡고 앉아 있는 로키가, 이 음식을 먹고 배탈이라도 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음식이 성에 안 차나, 요툰인?”

테이블 끝에서 헬라가 툭 쏘아붙였다. 헬라는 로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고기 한 점을 집어 들고 뼈에서 고기를 깨끗하게 빨아 삼켰다.

“음식이 익숙지 않을 뿐입니다.”

로키가 대답했다. 자신의 두려움을 드러내 보여 저 마녀에게 만족감을 안겨 주고 싶지는 않았다. 로키의 시선이 육즙으로 번드르르한 헬라의 손가락 쪽을 향했다. 아무리 예의를 지켜야 한다 할지라도, 로키는 절대 아스가르드 방식대로 음식을 손으로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생각만으로도 역겨웠다. 로키는 토르 쪽으로 몸을 돌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식사 도구 같은 건 없어?”

“아!”

구운 뿌리 같이 생긴 것을 입에 잔뜩 쑤셔 넣고 있던 토르는 거의 목이 막힐 뻔 한 것처럼 보였다.

“요툰헤임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식사를 하는가 보군. 물론, 쓸 만한 도구들이 있을 거야….”

토르가 몸을 돌리더니, 유령처럼 조용히 벽을 등지고 줄지어 서 있는 시종 중 한 명에게 손짓을 했다. 그 시종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벽과 구분이 안 되는 문 하나를 통해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시종의 손에는 은수저, 포크, 나이프 세트가 담긴 조그만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이것이면 될까요?”

시종이 토르에게 물어 보았다.

로키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그래. 고맙군.”

로키는 건네 받은 식사 도구를 집어 들었다. 없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로키는 자신이 옛날에 쓰던 정교하게 세공된 나무 수저 세트가 머리 속에 그려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바나헤임의 왕실로부터 받은 선물이네.”

올파더가 입을 열었다.

“바나헤임의 사람들도 왕세자의 종족들처럼 도구를 사용해 식사를 했지. 내 의견에는 좀 야단스러운 것 같기도 하지만, 내 처가 늘 말하기를….”

올파더가 말끝을 흐렸다. 눈매가 부드러워진 그의 시선이 먼 곳 어딘가를 응시했다. 로키는 왕이 생각을 끝내기를 기다렸지만, 왕은 끝내 그러지 못했다.

토르가 기다리지 말고 식사를 하라는 손짓을 해 보여, 로키는 먹기 시작했다. 음식은 양이 너무 많았고 약간 밍밍했지만, 불평하는 일은 현명치 못할 것이다. 로키는 접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음식을 포크로 조금씩 들어 기계적으로 입에 밀어 넣었다. 한 번 앉은 자리에서는 아주 소량만 먹는 것에 천성적으로 익숙해져 있었음에도, 로키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먹어 두려 노력했다. 다음 식사 시간이 언제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위장이 뒤틀려 오는 것 같았다. 헬라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로키는 식사에 집중하며 그 시선을 무시하려 애썼다.

“요툰인으로서는 매우 낯선 일이 따로 없겠어. 지상에서 지낸다는 것이 말이지.”

헬라가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헬라가 와인잔을 비우자 시종 한 명이 황급히 유리병을 들고 잔을 다시 채워 주기 위해 달려왔다. 헬라는 잔을 들고 있는 손이나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시종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와인잔을 옆으로 내밀었다. 헬라는 이번에는 토르 쪽으로 칼날을 관통하는 것 같은 시선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우리 땅의 태양이 너무 뜨겁지 않아야 할 텐데. 왕자비가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도록 조그만 구덩이라도 하나 파 주는 게 좋을지도 몰라.”

로키의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요툰인들은 구덩이 속에 살지 않았다. 요툰스타드라고도 불리는 요툰헤임의 왕실 도시가 지하에 건설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장소는 살아있는 바위 안쪽을 깎아 만든 거대한 동굴로, 대성채와 왕궁을 수용하고 있었으며 다른 아홉 왕국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공학과 예술의 눈부신 개가였다. 더불어, 애초에 요툰헤임의 도시가 지하에 지어진 이유는 요툰인들이 지하에서 사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에시르의 공격에 맞서 튼튼한 방어벽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로키가 그 점을 지적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토르가 테이블 밑에서 로키의 허벅지를 꼬집어 말을 막았다. 로키는 그를 쏘아보면서도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왕세자는 내가 준비해 준 방에서도 충분히 편안해 하는 것 같더군, 누이. 걱정해 줘서 고마워.”

토르가 말했다.

“천만에 말씀을.”

테이블 한 쪽에 앉아 있는 토르와 로키를 뜯어보는 헬라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곧 임박할 출산은 어떻게 준비할 예정이지? 내 조카아들, 아니면 조카딸이 이 세상에 무사히 태어날 수 있도록 합당한 조치는 취해 놓았나?”

헬라의 그 말에 로키는 얼굴을 찌푸리며 설명을 요구하듯 토르 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야만인은 로키의 눈을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토르는 다소 딱딱한 어조로 누이의 질문에 대답했다.

“장래 내 아이의 출산에 관한 문제는 하나하나 찬찬히 준비해 나가려고 해. 첫 태동이 느껴지고 난 후에…”

여기서 토르는 로키의 팔에 손을 올려 놓으며, 부추기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산파들과 의논해 그들의 권고를 들어 보도록 하지.”

“왜 그래야 하지?”

로키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아스가르드에서는 출산이 그렇게 위험한 일인가? 내 고향에서는 출산과 관련해 합병증이 생기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인걸.”

사실, 출산에 관한 일에서라면 요툰인들은 아홉 왕국에서 가장 진보한 종족일 것이다. 요툰 종족의 단일 성별이 낳은 결과임이 틀림없었다. (당신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확률로 아이를 밸 수 있다고 상상을 해 보라. 우선 순위가 어디로 빠르게 이동할지 예측할 수 있지 않겠는가?)

“글쎄다.”

헬라가 어두운 눈을 로키 쪽으로 고정시키며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지. 자기 자식을 먹어 삼키는 것을 출산의 합병증으로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말이야.”

로키의 고개가 휙 돌아가 헬라를 마주했다. 로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셔 거의 자주색에 가까운 색을 띠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헬라가 상자리에서 빵 부스러기를 탁 튕겨냈다.

“요툰인이 산기에 들어선 후 고통 때문에 미쳐 버리기도 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아주 잘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내 조카 아이들이 다른 불쌍한 요툰 아기들처럼 자기 종빈에게 잡아 먹히는 꼴을 보고 싶지가 않아서 말이야.”

로키는 그 터무니없는 소리에 충격을 받아 침묵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 종족에 대한 이러한 모욕에는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더라면 우리 종족이 이렇게 오랜 세대에 걸쳐 존속해올 수 없었을 거라 반박해야 하나? 결코 사실이 아닌 무언가를 직접 목격했다고 주장한 이 ‘사람들’이라는 작자들을 직접 만나 보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해야 하나?

하지만 이번에도 로키에게는 의견을 내 놓을 기회가 없었다. 토르가 그를 대신해서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헬라 누이, 아까 말했듯이, 한 번에 하나씩 찬찬히 준비해 나가도록 하자고.”

꽉 죄어든 토르의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로키의 팔을 쥔 토르의 손아귀 또한 꽉 죄어 왔다. 토르의 손 밑에서 로키의 팔은 테이블 너머로 뛰쳐 올라가 저 악독한 여신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덜덜 떨리고 있었다.

오딘이 고기를 씹으며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문제를 굳이 사서 만들지는 말자꾸나. 특히 오늘 같은 아름다운 날에는 말이다.”

그 덕에 모든 대화가 잠시 끝을 맺었고, 오딘과 사령관은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로키도 그렇게 하려 했지만,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재를 씹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스가르드인들이 자신네 그 악독한 마음을 다해 요툰헤임을 미워하고 요툰헤임의 명예를 폄하하려 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자신에게 무슨 광기 들린 동물의 이미지를 덧씌우기까지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진정한 야수들은 바로 이 작자들이다! 어떻게 감히…!

인내심을 가져. 로키는 스스로에게 일렀다. 일단은 살아남는 거야. 경계심을 가지고 행동해. 탈출한 후에 마음껏 복수를 하는 거야.

하지만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헬라가 작은 조소를 띤 채, 다시 접시에서 눈을 들었다.

“그래서 말이다. 어젯밤은 어땠어, 토르?”

헬라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널 걱정했잖니.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서리 거인의 몸이 차디차지는 않던?”

로키는 씹는 것을 멈췄다. 포크가 접시에 부딪혀 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로키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몸 안을 타고 흐르는 온 분노를 담아, 로키의 눈이 헬라의 시선을 마주했다.

“제 고향에서는, 식사 자리에서 남의 침대 사정을 논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일이라고 배웠습니다만.”

로키가 이렇게 말했다.

“음, 그렇다면 명확해지는군.”

헬라가 뾰족한 손톱을 기른 손을 허공에서 딱 튕기며 말했다.

“생선처럼 차갑다 이거지.”

로키의 손이 나이프를 꽉 움켜 쥐었다. 예의 따위는 개나 주라지. 로키는 저 끔찍한 혀를 당장 잘라내 버리고 싶었다. 토르가 로키의 생각을 감지했는지, 그 거대한 손으로 로키의 손을 감싸 나이프를 그 자리에 고정시켜 주었다.

“누이, 딱 한 번만 말하도록 하지.”

토르가 으르렁대듯 일렀다.

“로키 왕세자는 내 반려이고, 우리 왕실의 손님이야. 예의를 갖추어 말을 하지 않겠다면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군.”

토르의 그 말에 로키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식사 나이프를 움켜쥐고 있던 로키의 손아귀가 느슨해졌다. 마침내 자신을 변호해주는 말을 듣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자신의 변호자가 이 야만인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헬라가 받아 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오딘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내 딸아, 토르의 말이 맞다.”

오딘이 와인잔 쪽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런 적대감을 보일 필요 없다. 지금은 평화의 시대이지 않느냐.”

“그렇고 말고요.”

헬라의 웃음은 수 천개의 창날보다 더 날카로웠다.

“제 실수를 용서하시지요.”

토르가 여전히 로키의 손을 붙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례가 안된다면 먼저 일어서도록 하겠습니다. 식욕이 떠나가 버리고 말았군요.”

“식욕만 떠나간 것이었으면 좋겠군 그래.”

오딘이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하더니, 빵조각을 쥔 손으로 손짓을 했다.

“그래, 가렴. 가려무나. 젊음을 즐겨야지.”

로키는 남편의 옆을 따라 식당을 떠났다. 토르의 손이 여전히 그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로키는 시종과 경비병들이 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거리에 이를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로키가 입을 열었을 때도, 그의 목소리는 조용한 속삭임이 되어 나올 뿐이었다.

“나를 변호해 주었군. 네 누이를 상대로 말이야.”

토르가 그를 흘깃 쳐다보며 불편한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우리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을 수도 있어.”

“그렇다고 해도, 고마워.” 

로키가 대답했다.

태양처럼 따스한 웃음이 대답을 대신했다. 토르의 손가락이 로키의 손가락에 얽혀 왔다. 로키의 뺨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왕실 사저로 돌아가는 긴 복도에는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로키는 토르의 손을 떨쳐내지 않았다.

“모든 아스가르드인들이 헬라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토르가 로키에게 말했다.

“헬라는 상식 밖으로 잔혹한 사람이야. 당신이 헬라의 기질로 우리 종족 모두를 판단한다면 마음이 언짢을 것 같군.”

“안 그럴 거야.”

로키가 황급히 대답했다. 너무 황급하게 대답했는지도 몰랐다. 로키는 목을 가다듬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히 네 누이는 독자적인 사람처럼 보여. 네 종족들 중 가장 끔찍한 사람을 네 종족과 한데 뭉뚱그려 판단하는 것은 부당한 일일 것 같아.”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토르가 잠깐 몸을 멈춰 세웠다가, 로키의 두 손을 잡아 끌고 석조 벽 사이로 움푹 파인 벽감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피난처 같은 공간이 마법 같은 효과를 발휘해, 두 사람이 완전히 홀로 동떨어진 채 이 성에서 살아 움직이는 유일한 사람들인 것 같은 느낌을 안겨 주었다.

토르가 가까이 밀착한 채, 조용한 속삭임으로 일렀다.

“운명의 여신들께서 우리를 기묘하고 끔찍한 방식으로 만나도록 만들기는 했지만, 조만간 네가 날 네 동맹으로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어. 어쩌면…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로키는 그 푸른색의 눈을 응시하며 거짓 봄날의 하늘을 떠올렸다.

“그래, 어쩌면. 언젠가는.”

로키가 중얼거렸다.

오딘슨은 그 대답에 충분히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딘슨이 입이 찢어지도록 환하게 웃어 보였다.

“우정을 쌓기 위해 우리 둘만 있을 때는 서로의 본모습을 보여 주도록 하자고. 어떻게 생각해?”

“좋은 생각이야.”

로키 또한 역시 웃음으로 응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조그만 벽감 안의 고요함 속에서 두 사람은 웃음을 띠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절박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로키의 마음이 가벼워져 왔다. 포로로 잡혀온 후 처음으로 일말의 희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서는 오딘슨이 다시한번 그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하나만 물어 봐도 될까?”

토르가 여전히 웃음을 띤 채 로키의 관자놀이 쪽으로 애매하게 손짓을 해 보였다.

“당신의 뿔은 어디 있는 거지?”

유쾌한 기분이 다시 씻겨 나가는 것을 느끼며 로키가 눈을 깜빡였다.

“내 뭐라고?”

“뿔 말이야. 조금 더 나이가 들면 돋아나는 건가? 아니면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는 거야?”

토르가 까치발을 해 몸을 들어올리더니 로키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네 뿔은 그냥 조그만 건가?”

“나는….”

로키는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수치심이 걸쭉한 기름처럼 마음 속을 채워 왔고, 분노가 그것을 불살랐다. 마침내 로키가 입을 열어 불구덩 같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뿔 같은 건 없어.”

“없다고?”

토르가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들은 이야기에선 죄다 당신 종족들에겐 뿔이 있다고 했는데.”

“네가 들은 이야기는 다 틀렸어.”

로키가 쏘아 붙였다. 로키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얼굴에 떠오른 실망감을 토르가 보지 못하도록 했다. 자신도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이 야만인이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니. 아스가르드인들 중 좋은 사람은 없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네가 뿔이 있대도 상관 없어. 아주 근사할 것 같은걸.”

토르가 달래듯 말했다.

“난 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관심 없어.”

로키가 딱 잘라 말했다.

“내가 무슨 동화책에 나오는 악마 같은 존재인 줄 알아? 우리 종족에게는 뿔이 없어. 우리 아기를 먹지도 않고, 구덩이에서 살지도 않는다고. 그것 외에도 네가 생각하는 그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니야. 대체 왜 너는…!”

로키는 입을 다물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설명해 봤자 소용 없을 것이다. 이 야수에게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은 더더욱이 소용 없을 것이다.

“난 당신이 악마라고 생각하지 않아. 왕세자.”

토르의 거칠고 따스한 두 손이 로키의 어깨를 붙잡았다. 로키는 그 손길을 떨쳐내 버렸다. 토르는 큰 저항 없이 코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당신의 노여움을 사게 되는 것 같군. 그저…우리 둘만 있을 때는 마음 놓고 네 본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고 바랐을 뿐이었어.”

“그래, 이게 네가 바라는 내 본 모습이야.”

로키가 토르의 얼굴에다 대고 쏘아 붙였다.

“네가 얼마나 무식하고 역겨운 인간인지 이야기해주고 있는 이게 내 모습이라고.”

토르의 얼굴이 임박한 천둥처럼 일그러졌다.

“내 평화의 제안을 거절하려 드는 걸 보니 바보로군. 머리를 좀 써 봐! 나 말고 다른 그 누가 당신을 그렇게 보호해 줄 것 같아?”

격렬한 분노가 로키의 몸 안으로 흘러 지나갔지만, 로키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오딘슨이 자신을 방어해 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혹시….

로키가 토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로키의 진홍색 두 눈이 의혹감으로 차 올랐다.

“네가 일부러 주선한 일이야? 네 누이를 상대해 날 변호해 준 것이?”

“뭐라고?”

토르가 벽감 안의 좁은 공간 안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토르의 얼굴이 진한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미쳤어? 난 결코 헬라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야. 그 누구도 그럴 수 없다고.”

“아니지. 하지만 올파더의 식사 자리에 그 여자가 있을 거란 사실은 알고 있었겠지.”

로키가 앞으로 다가서며 한층 더 열기 띤 어조로 쏘아붙였다.

“그 여자가 날 물어뜯으리라는 사실을, 내가 그 여자의 조롱의 대상이 될 걸 알면서도 날 식사 자리에 초대한 거지. 그 때 네가 슬쩍 끼어들어 영웅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런 게 아니….

토르가 시선을 돌렸다. 토르의 몸짓 하나하나에서 죄책감이 묻어 나왔다.

“헤임달에게 식사를 가져다 달라고 한다거나,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지. 내가 가장 취약함을 느낄 만한 장소에 일부러 데려간 거지!”

토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꽉 악다문 이를 드러내 보였다.

“당신은 이해 못 해. 당신의 신뢰를 얻어야 했다고.”

로키의 분노가 널뛰기를 했다.

“내가 정말로 당신 같은 야만인을 신뢰할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해?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지, 오딘슨? 왜 날 네 동료로 삼으려 드는 거야?”

토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두 눈은 그의 나머지 존재와 마찬가지로 거짓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당신에게 모든 걸 이야기해 준다면, 우리 두 사람 왕국의 운명 모두가 위험에 처하게 될 거야. 우리 목숨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지. 우리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어, 왕세자. 하지만 당신이 최대한 적게 알수록, 더 희망이 있을 거야.”

로키가 비웃음을 던지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되면 네게는 참 편리하겠지. 날더러 거짓말쟁이이자 폭군인 사람의 말을 그냥 냅다 믿어 주라고? 그러고 싶지는 않군.”

“날 믿어 주든지 그렇지 않든지 상관 없지만, 내가 지금 한 이야기는 사실이야. 당신을 헬라와 마주하도록 놓아 둔 것은…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선 내가 당신의 친구라는 사실을 증명할 길이 없어서 그랬어!”

“넌 내 친구가 아니야. 네가 증명해 보인 사실은 그것 뿐이야.”

로키는 벽감 쪽에서 빠져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누가 엿듣든지 신경 쓰지 않은 채, 로키는 걸음을 옮기며 크게 소리쳐 일렀다.

“우리 휴전은 이걸로 끝이야. 당신이 계약 조건을 어겼지. 지금부터 날 내 의사에 반해서 억류당한 포로로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군. 이제 나는 당신과 어울리고 싶지 않아.”

“왕세자….

야수의 무거운 발걸음이 로키의 뒤를 따랐다.

로키가 머리 너머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 날 부르지 마. 날 건들지 마. 날 쳐다보지도 마.”

“대체 어떻게 안 쳐다볼 수가 있어?”

“한번 잘 노력해 보던가.”

로키가 꽉 악다문 이 사이로 내뱉었다. 자신의 사저 앞에 도착한 로키가 문 손잡이를 붙잡았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몇 번이고 문고리를 흔들어 보았지만 소용 없었다.

토르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다가오더니 열쇠를 꺼냈다. 토르가 열쇠를 문고리에 집어 넣어 잠금을 푸는 동안, 로키는 뒤로 물러나 있었다.

“닫으면 잠기는 문이야.”

토르가 말했다.

“나와 시종들만 열쇠를 가지고 있지.”

“그래, 진정한 죄수로군.”

자신이 약속한 침묵을 지키지 못하고 로키가 내뱉었다.

“당신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야.”

토르가 그 차디찬 두 눈 안에 읽을 수 없는 표정을 담은 채, 몸을 돌렸다.

“하지만 날더러 솔직하게 이야기 해 주기를 바란다면 말이지, 당신 말도 맞아. 당신을 이 곳에 붙들어 두기 위한 목적 또한 있지. 당신에게는 아직 해 주어야 할 역할이 있어, 왕세자. 내가 당신에게 밝힐 수 없더라 해도 말이야.”

“지옥에나 떨어져.”

로키는 문을 벌컥 열어젖힌 후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제 그만 날 내버려 둬.”

로키가 토르의 얼굴에다 대고 문을 쾅 닫아버릴 수 있기도 전, 토르의 손이 문을 붙잡았다.

“지금 당장은 떠나 주겠지만….”

토르가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밤이 되면 다시 당신 방으로 돌아 와야 해. 앞으로 몇 주 동안은, 매일 밤마다 그렇게 해야 할 거야.”

“아직까지는 네 계획에 놀아나 주어야 한다는 거지?”

로키의 얼굴이 진한 자주색으로 물들었다.

“그래, 네가 매일 밤 내 몸에 발정해 내 배 속에 아기를 억지로 밀어 넣어주고 있다고 올파더께서 생각하시게 만들어 드려야지.”

“제발 좀….

토르가 말을 뚝 끊더니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고 난 후 토르가 다시 입을 열어,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일렀다.

“어젯밤처럼 바닥에서 자도록 하지. 당신이 원한다면 말은 걸지 않도록 하겠어. 그리고 쳐다보지도 않으려 노력해 보지.”

“기사 나셨군!”

로키가 거칠게 웃음을 내뱉었다.

“네 흠 잡을 곳 없는 예의범절 덕분에, 언젠가는 정말로 내 우정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이번에는 로키는 문을 힘껏 쾅 닫는 데 성공했다.

당신이 한 번이라도 문을 쾅 닫아 본 적이 있거나, 혹은 쾅 닫힌 문 앞에 서 있어야 하는 입장이었다면, 문이 닫힌 소리가 희미해져 사라지는 동안 슬며시 기어들어오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잘 알 것이다.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과 함께 무겁게 몰아 쉬던 숨소리도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한다. 날뛰는 마음이 입에서 튀어나왔던 말 하나하나를 되새기며, 가장 분노 어렸던 말들을 반복 재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후에는 체념만이 남는다. 이 때에도 문 양측의 상황은 그와 마찬가지였다. 로키는 호흡이 잦아들고 난 후 오딘슨의 발걸음이 떠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한참 동안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망할 놈의 열쇠로 무장한 저 야만인이 다시 문을 강제로 따고 들어와 끝으로 말 하나를 더 덧붙이려 하기라도 했다면, 로키는 어떻게 대처해야 했을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로키는 문 손잡이를 다시 한번 붙잡아 돌려 보려 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문은 잠겨 있었다. 정말로 이 곳에 갇힌 신세가 된 것이다. 오딘슨이 내킬 때마다 자신의 방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방 안에는 시간을 때울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방이기는 했지만, 책 한 권도, 종이 뭉치도, 잉크도, 감상할 만한 미술 작품 같은 것도 하나 없었다. 로키가 동료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각 밖에 없었다. 그리고 머리 속에 지금 떠오르고 있는 생각들은 너무도 암울한 것들 뿐이었기에, 로키는 잡혀온 이후로 지금까지 참아 누르고 있던 눈물을 지금에서야 떨구어 낼 수 있었다.

로키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울었다.

로키는 곧잘 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작은 체구로 이 세상에서 자라난 로키로서는, 울음을 터뜨릴 만한 이유가 꽤 여럿 있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서부터 로키는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나약함의 상징이라는 점을 배웠다. 그리고 나약함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착취될 수 있다. 그래서 로키는 얼음물에 처넣어진 강철처럼 스스로를 굳게 연마했다. 홀로 남겨져 있을 때조차 로키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누군가 목격할까 봐 두려웠고, 그것보다 더 최악의 경우, 자신을 흔들리게 만드는 일을 마음 속에 감출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 로키는 평생 울었던 것보다 지난 이틀동안 더 많이 울었다.

부족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로키는 아름답게 울었다. 다른 이들이 그러하듯 로키의 코에서는 콧물이 흘러내리거나, 얼굴이 퉁퉁 붓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일러 두어야 할 것 같다. 로키의 얼굴은 수평선의 하늘처럼 약간 창백한 푸른색으로 바뀌었을 뿐이고, 뺨 위로 눈물이 수정 같은 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릴 뿐이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난 후 헤임달이 들어왔을 무렵, 로키의 모습은 그러했다. 해가 저물어 창문 바깥이 어둑어둑해져 오고 있었다. 로키는 소매로 열심히 눈물을 닦다가, 그제서야 헤임달이 자기 눈물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해 냈다.

“왕자님께서 저녁 식사를 가져다 주라고 부탁하시더군요.”

헤임달이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떤 음식을 드시고 싶어 하실지 확실치 않았습니다. 이걸로 충분할까요?”

로키는 쟁반을 흘긋 쳐다보았다. 또 그레이비 소스로 덮인 갈색과 하얀색 덩어리진 음식들이었다. 로키는 목을 가다듬은 후 울먹이는 목소리가 튀어나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충분하네. 고맙군.”

헤임달의 구름 낀 두 눈이 로키 쪽을 향했다. 그 눈길 아래 로키는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힘든 하루셨나 봅니다.”

왕자의 신하가 이렇게 말했다.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 하루가 잘 흘러가는 것은 불가능했을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떠나는 게 편하실까요? 아니면 여기 있어 드리는 편이 나으실지요?”

로키는 주저했다. 로키는 헤임달과 헤임달의 당당한 태도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딘슨이 내 신뢰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당신을 보낸 거라면, 떠나 달라는 말을 해야겠군.”

헤임달이 고개를 흔들었다.

“왕자 저하께서는 아직 자신의 분노에 젖어 있느라 바쁘셔서, 그런 명령을 내릴 처지가 아니십니다. 만약 그러셨다고 해도, 제게는 제가 어리석다고 여기는 명령을 무시해 버리는 고약한 버릇이 있어서 말이지요.”

헤임달의 미소는 따스했고 진심 어려 보였다. 로키는 헤임달의 말을 조금이나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 모든 일이 무슨 의미인지 내게 설명해 줄 생각은 없겠지? 왜 오딘슨의 계획에 내가 포함되어야 하는지도?”

그 고결한 자가 머리를 가로젓자, 땋아 내린 머리가 함께 옆으로 흔들렸다.

“그 사항에 있어서 만큼은 왕자님의 생각이 옳은 것 같습니다. 왕세자님은 아셔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아직은요. 허나 이 말씀만은 해 드리고 싶군요. 두 분 다 너무도 인내심이 부족하신 것 같습니다.”

로키는 눈알을 굴려 보였다가, 맹인을 배려해 이렇게 말을 더했다.

“볼 수는 없겠지만 나 지금 눈알 굴리고 있어.”

“안 봐도 알 것 같군요.”

헤임달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헤임달은 벽난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 불길을 피우기 시작했다.

“왕세자님, 제 이야기를 믿어 주실 이유가 없다는 점은 잘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말씀 드리지요. 토르 왕자님께도 여럿 약점이 있지만, 왕자님께서는 결코 왕세자님께 나쁜 일이 닥치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왕자님은 옳은 일을 하려 최선을 다하고 계시지요.”

“날 자유롭게 놓아 준 후 전사의 태도로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일일 텐데.”

로키가 대답했다. 로키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후 테이블로 다가가 저녁 식사를 살폈다. 음식은 그다지 식욕을 돋우지 못했지만, 쟁반 옆에 식사 도구들이 놓여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로키는 은 포크를 집어 들어 살펴 보았다가, 달각 소리를 내며 다시 제자리에 내려 놓았다.

헤임달이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 토르 왕자님께서 포크와 수저를 꼭 함께 가져다 달라고 일러 주시더군요. 나이프는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이해해 주시겠지요.”

헤임달이 다시 몸을 돌려 불쏘시개를 벽난로에 집어 넣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는 필요 없을 것 같다고, 로키는 결정을 내렸다. 위장이 동하지 않았다. 로키는 헤임달이 불을 붙인 후 조용한 발걸음으로 떠나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로키는 다시 한 번 홀로 남아 생각에 잠겨 들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벽난로에서 타고 있는 장작을 하나 꺼내다가 침대를 불질러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연기에 숨이 막혀 죽는 결과밖에 나지 않을 것이다. 로키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저녁 식사 쟁반을 저 멀리 집어 던져 버리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방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 또한 끔찍하게 싫었다. 방을 둘러보던 로키의 눈에 어젯밤 오딘슨이 침대로 썼던 곰가죽 깔개와 베개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좋아. 그 야수는 자기가 바닥에서 자겠다고 말했다. 정말로 바닥에서 자 보라지. 로키는 깔개와 베개를 집어 든 후, 조금 더 숙고해 볼 수 있기도 전 조그만 창문 바깥으로 그걸 죄다 내던져 버렸다. 깔개와 베개가 저만치 아래 있는 뜰에 가볍게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로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털었다.

한참 후 침대에 누운 채 야수가 문고리에 열쇠를 집어넣는 소리를 기다릴 때가 되어서야, 오딘슨이 로키의 조그만 계략에 격분해 응징을 가하려 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로키의 머리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걸쇠가 달각거리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 왔을 때, 로키는 팔다리가 움찔 떨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토르가 어두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동안 로키는 꼼짝하지 않은 채 잠든 척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자신이 약속한 대로, 에시르 왕자는 로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문을 닫은 후 한참 동안 팽팽한 침묵을 유지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로키는 숨조차 내쉴 수가 없었다. 분명히 저 야만인도 자기 깔개와 베개가 없어진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로키는 눈을 꽉 감은 채, 포악한 손이 자기 머리채를 휘어잡아 오거나 목덜미를 조여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토르는 그저 조용히 체념한 것 같은 희미한 한숨 소리를 내뱉을 뿐이었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로키는 토르의 망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조끼 끈이 스르륵 풀려나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고서는 돌바닥 위로 풀썩 눕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한번 침묵이 찾아 들었다.

로키는 베개에서 슬쩍 눈길을 돌렸다. 사그라들어 가는 희미한 불에 비친 토르의 널찍한 등이 보였다. 저 멍청이는 망토를 베개로 삼은 채 맨바닥 위에 모로 누워 있었다.

작은 승리였다. 로키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로키는 눈을 꽉 닫은 채 마침내 잠에 빠져 들었다.


*    *    *




이미 눈치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작품 제목 ‘왕세자와 야수(The Crown Prince and the Beast)’는 ‘미녀와 야수(The Beauty and the Beast)’를 살짝 패러디한 제목입니다. 원문 태그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을 거에요!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더 확실히 아시겠지만, 이 작품의 전개도 어느 정도 그 동화 내용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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